< 정신 차려! (5) >
늦은 밤.
화실엔 사람들이 이리저리 잠들어 있다.
드르렁. 드르렁.
몇몇이 코를 골며 자는 그 곳엔 책상 하나에 불이 켜져 있어서 어두운 주변을 밝히고 있다.
책상에서 열중하고 있는 사람은 부리부리한 눈매를 가진 사내, 바로 키도 죠타로였다.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 자신의 화실도 아닌 낯선 장소임에도 그런 사정 따윈 상관없다는 듯 그는 혼자 원고에 열중해 있었다.
슥슥슥
키도의 연필이 원고용지 위를 거침없이 움직이며 그림을 만들어 나간다.
모든 열정을 쏟아 그리는 탓일까? 어느새 그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있다.
물론 지금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 하지만 이곳은 바깥과 달리 에어컨이 밤새 돌아가며 적당한 온도를 만들어서 쾌적하다.
지금 주변에 온통 잠들어 있는 이들은 바로 이 에어컨 때문에 이곳에서 합숙을 한다는 모양이다.
그런 사정이야 어쨌건 그는 오로지 자신의 눈앞에 있는 원고에만 모든 정신을 쏟고 있었다.
그렇게 자신을 불사르며 원고를 해가다 어느 장면에서 털컥 걸리고 말았다.
“아······.”
네임을 만들지 않은 작업 때문만은 아니다.
뭔가 알 수 없는 이질감이 키도를 머뭇거리게 만든다.
그냥 스토리를 진행해도 되지만, 지금 그림 장면이 자꾸만 신경 쓰인다.
뭐지?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거지?
고개를 갸웃거려보지만 당장 알아차리기는 힘들다.
아마 피곤함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정도 피곤함은 수도 없이 겪었던 일이다.
혼란스러움이 계속되자 슬슬 당황하기 시작했다.
“젠장.”
씹어뱉듯 중얼거리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한심스럽긴.”
고요를 뚫고 전해져온 말에 흠칫 놀라 머리를 홱 돌렸다.
어둠이 눈이 익숙해지자 보이는 얼굴.
실버였다.
그가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키도가 그리던 데생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나 참, 화면을 가득 채운 진의 얼굴이 문제구만. 그걸 두고 얼마나 고민할 거요?”
“······?”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그렇게 말을 툭 던지는 그를 말없이 쳐다봤다. 실버는 그런 키도의 시선을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야마토의 얼굴에서 간절함이 부족하게 느껴져. 볼 부분, 펜선 두께를 30퍼센트 정도 늘리고. 눈에 감정을 더 넣어야지.”
야마토를 알고 있나?
진심의 남자 주인공의 이름은 키시 야마토다.
한눈에 주인공의 이름을 불렀다는 건 자신의 만화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조, 존 실버. 자네 내 만화를 아는 건가?”
“그런 건 상관없잖아. 그리고 조심봉이라니까. 쳇.”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그렇게 말하더니 머리를 긁적이며 화실 밖으로 나간다. 아마도 화장실에라도 가는 모양이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키도가 피식 웃었다.
자신이 무엇을 놓쳤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는 그의 말대로 연필선의 두께를 조절하고 눈 부분을 다시 그려본다.
확실의 실버의 말대로다.
자신이 생각한 그 느낌이 살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되었어. 이대로 끝까지 간다.’
그제야 혼란에 빠졌던 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슥슥슥
그렇게 아침의 해가 밝아올 때까지 키도의 손은 쉴 틈 없이 움직였다.
***
“어머, 밤새 원고를 하셨어요?”
놀란 정미자가 부스스한 머리에 멍청한 눈을 하고 있는 키도에게 물었다.
한국어라 알아듣지 못해도 대충 뜻을 이해했는지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형. 설마. 한편 데생을 완전히 끝낸 거야?”
내가 그런 키도에게 다가가서 묻자 퀭한 눈으로 내게 엄지와 검지로 동그라미를 만들며 대답했다.
“조금만 더 하면 끝난다.”
“괜찮겠어?”
“당연하지 않느냐. 이 형은 이런 밤샘쯤은 이미 수년째 해오고 있다.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런 거 치고는 눈이 풀린 데다가 손도 심하게 떨고 있잖아.”
“하하하. 아침부터 무슨 농담을 하느냐.”
어색한 표정으로 웃는다.
농담이 아닌데.
저 인간 어제 찾아왔을 때도 조금 얼굴이 상해 있었는데.
그냥 말릴걸 그랬나?
하긴, 최근 압박감으로 잠까지 설쳤던 모양이니······.
그때 목에 수건을 두른 구자희랑 칫솔을 물고 있는 박소미가 놀란 얼굴로 작업 중인 키도를 보며 말했다.
“어머, 키도 선생님 눈이 완전히 풀리신 것 같아.”
“괜찮으실까?”
잠시 후 부스스한 눈으로 잠에서 깬 경희가 좀비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한참 작업 중인 키도를 보고는 내게 다가와 조용하게 말했다.
“키도 아저씨, 아침 일찍 일어나셨네.”
“일찍은 개뿔······, 한숨도 안 잤다더라.”
“엥? 정말?”
놀란 경희가 키도에게 후다닥 다가가 물었다.
“키도 아저씨, 안 주무셔도 괜찮아요?”
“써니냐?”
“어머, 눈이 완전히 갔어. 저 경희에요. 이경희.”
“경이? 아, 써니 시스터.”
“네. 그런데 돈 슬리핑해도 다이조부에요?”
저건 또 어느 나라 말이야?
하지만 키도는 용케 알아들은 모양이다.
“아아, 괜찮단다. 이 큰 오라버니는 끄떡없어요.”
팔을 걷어 보이며 말하자, 경희가 ‘아.’하며 말하더니 엄지를 척 내밀었다.
“키도 아저씨! 최고!”
“하하하.”
“하하하.”
두 사람이 병신처럼 웃고 있다.
묘하게 두 사람의 케미가 좋네.
그런 키도에게 엄마가 시원한 식혜 한 컵을 가져다준다.
“밤새 잠 안자고 괜찮겠어요? 이거라도 한잔 쭉 들이키면 정신이 좀 날거에요.”
“감사합니다. 어머님.”
키도는 엄마가 내민 식혜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캬! 맛있습니다, 어머님!”
“맛있데.”
“나도 이 정도는 알 것 같다.”
그렇게 웃은 엄마가 서둘러 부엌으로 가신다.
모두가 분주하게 움직인다.
같은 장소에서 잠을 자고 비슷한 시간에 깨다보니 모두가 바쁜 것이다.
그런 혼란스러운 주변 상황에서도 키도는 놀라운 집중력으로 데생을 해 나갔다.
그런데 언제 일어났는지 선희가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키도의 작업 모습을 바라본다.
눈도 껌뻑이지 않고 키도의 작업 모습을 보는 표정.
이제는 알고 있다.
저건 뭔가에 선희가 집중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아마 키도의 작업 데생작업을 보면서 새로운 뭔가를 배우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게 두 사람을 내버려 둔 채 사람들은 각자 개인 일을 마무리하고 아침 식사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리고 화실 중앙에 새로 구입한 대형 밥상을 놓고 식사준비가 마무리되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키도가 책상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끝났다!”
“오, 진짜?”
“그래. 이젠 가봐야겠어.”
“왜? 아침 준비되었는데 먹고 가지.”
“아니다. 원고 마감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그렇게 말하더니 화실식구들과 우리 가족에게 어눌한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화실을 빠져나갔다.
“같이 가.”
결국 내가 그를 따라 나섰고, 근처에서 택시를 잡아 그를 공항으로 보냈다.
***
“평화롭죠?”
“그래. 모처럼 정말 평화롭네.”
“이런 날이 다 오네요.”
“그러게.”
“와, 정말 몸이 나른한 게 기분 너무 좋다.”
키도의 화실 식구들이 모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축 늘어진 채로 한마디씩 하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사라진 키도 때문에 모두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지만, 오늘 화실에 나온 후 막내인 무카이의 말로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어차피 선생님이 안 계신 이상 우리끼리 할 수 있는 건 없잖아요.”
“그래서?”
“차라리 잠시의 휴가라고 여기는 게 낫지 않을까요?”
“어? 그러네.”
모두 막내어시의 말에 납득해 버렸다.
어차피 그들로서는 선생이 어디 있는지 알 수도 알 방법도 없다.
물론 키도의 부인은 알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긴 하지만, 일부러 알려주려 하지 않는 걸 굳이 알아낼 필요가 있을까?
안 그래도 최근 몇 달간 원고에 시달린 것을 생각하면 모처럼 즐거운 휴가라 생각하면 될 일이다.
그때 키도의 부인이 화실에 들어온다.
그녀는 쟁반에 접시 여러 개를 담아 들고 들어오더니 각자 하나씩 나누어 준다.
“여기 아이스크림이에요.”
“아, 감사합니다.”
“네. 맛있게 드세요.”
“넵.”
“와, 시원하고 맛있어!”
“생딸기까지 넣으니까 전문점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어요!”
“어머나, 고마워요.”
그렇게 키도의 부인이 입을 가린 채 웃으며 말하고는 곧장 부엌으로 간다.
어시들은 아이스크림을 작은 숟가락으로 퍼 먹으며 이 행복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 우리에게도 이런 평화가 있군요.”
“그래. 이게 파라다이스지.”
“파라다이스, 좋은 말이에요. 마음 같아선 선생님이 한 일주일 정도는 푹 쉬시다가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맞아. 안 그래도 담당인 테고시 씨의 말로는 단편도 곧 준비될 거라니까.”
“그럼, 걱정할 건 없는 거죠?”
노무라가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떠 입에 넣으며 머리를 끄덕인다.
“그럼, 우리가 걱정할 건 없지. 선생님이 당장 들이닥치셔서 원고를 하자고 하지 않는 이상은······.”
그 순간 화실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아, 미안해요.”
“그래, 소름 돋는 말은 하지 마. 모처럼 기분도 좋은데.”
“맞아요. 상상만 해도 털이 벌떡 서는 기분이었어요.”
“미안. 나도 모르게. 하긴, 이미 단편도 결정되었다니까.”
“그럼요. 그런 일은 없죠.”
모두가 다시 안심하며 아이스크림을 떠먹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안심하며 평화로운 분위기에 빠져 있을 때였다.
갑자기 화실 문이 덜컥 열려버렸다.
그러자 모두의 고개가 느리게 문을 향해 돌아갔다. 그리고 어시들의 눈이 동시에 부릅떠졌다.
키도가 돌아온 것이다.
“서, 선생님!”
“오. 다행이야, 모두 준비 중이었군.”
“네? 준비요?”
“자, 이거.”
그렇게 말하며 선임 어시에게 자신이 들고 온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뭐긴, 데생원고지.”
“데, 데생원고요?”
“그래. 밤새 작업한 거지만 내 최선을 다해 그렸어.”
“······.”
그때 화실로 키도의 부인이 들어왔다.
“다녀오셨어요?”
“그렇소. 이제야 돌아왔군.”
“당신 표정······, 역시 떨쳐내셨군요.”
그 말에 키도가 머리를 끄덕였다.
“맞소, 부인. 그리고 깨달았다오. 내가 무엇이 부족했는지, 그리고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그 말에 부인이 웃었다.
“수고하셨어요.”
“고맙소.”
“그럼, 간식을 가져올게요.”
“부탁하오.”
그렇게 말한 키도가 어시들을 돌아본다.
데생 원고를 받은 어시가 놀란 표정으로 확인하는 모습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어떤가?”
어시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원고를 자세히 살핀다. 그리고 곧 표정이 서서히 썩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모두 죽어나가······, 아니 굉장히 섬세한 데생이에요.”
“그럼, 당장 달리도록 하지.”
“네? 이번 원고는 시간이 좀 많이 남아있는데, 너무 서두르시는 거 아니세요?”
“내일까지 아니었나?”
“내일요? 내일은 담당이 다른 단편으로······.”
“무슨 소리! 테고시에겐 미리 말해 두었다네. 그러니까 우리 원고가 들어갈 거야.”
“네?!”
“으악!”
어시 중 몇 명은 의자에서 넘어질 정도로 놀랐다.
“괜찮아. 밤샘작업을 하면 되니까. 그 시간 안에 무조건 완성시킨다는 약속도 했으니까 이제 제대로 달려보자고.”
그 말에 어시들의 표정은 더욱 절망으로 물들었다.
“서, 서생님!”
“미안, 모두 걱정했지?”
“그 점은 솔직히 별로······, 아니 그게 아니라······.”
“아참, 나도 이럴 시간이 없지. 인물 펜선을 완성해야하니까.”
“······.”
“······.”
“후후, 이번엔 인물 펜선도 좀 깨달은 바가 있지. 역시 유난은 괴물어시를 두고 있었어. 뭐, 덕분에 눈으로 좀 훔친 기술도 있고.”
그렇게 말하며 뭐가 좋은지 혼자 낄낄거린다. 그리고는 곧 눈을 빛내며 어시 한명에게 말했다.
“마에다, 냉장고에서 리포비탄(일본의 박카스) 꺼내게. 일단 영양 드링크 한 병 마시고 시작하자고.”
“······.”
“······.”
평화롭고 안락했던 어시들의 짧은 휴가는 거기서 끝이 나고 말았다.
< 정신 차려!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