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03화 (103/425)
  • < 정신 차려! (4) >

    내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자 키도가 얼굴을 살짝 찌푸린다.

    “어이, 그래도 형이 왔는데, 그런 표정이라니 너무 한 거 아니냐?”

    “아, 미안. 갑작스러워서.”

    내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하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주위사람들은 갑자기 등장한 이 남자에게 호기심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키도와 내가 일본어로 서로 대화를 하고 있으니, 대부분 지금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 이 아저씨는 ‘진심의 남자’를 그리는 키도 죠타로입니다.”

    그 말에 모두 놀란 눈치다.

    생각도 못한 사람이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물론 이곳에 있는 사람치고 소년 히어로의 앙케이트 지존인 진심의 남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거기다 대부분 진심의 남자를 재미있게 보고 있었으니

    까.

    어쨌건 내가 자신을 소개한다는 걸 눈치 챈 키도가 화실 사람들에게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했다.

    “키도 이무니다. 자루 부타그 드리무니다.”

    어눌하긴 하지만 그래도 한국어를 하다니, 기특하네.

    아무튼 키도의 말에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키도 선생님. 반갑습니다.”

    “평소에도 진심의 남자 잘 보고 있어요. 선생님.”

    어시들과 박상식이 그를 반갑게 맞이한다.

    실버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대충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앉아 그림에 열중했고, 선희도 대충 인사를 하고 나더니 데생에 다시 빠져버린다.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보더니 다른 어시들에게 인사말을 한 번 더 했다. 그리고 내가있는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뭐가 좋은지 싱글거리는 키도를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지금 원고로 한 참 바쁠 때 아니야?”

    “너는 형을 보고도 반갑지 않은 것이냐?”

    “누가 안 반갑다고 했어? 갑자기 예고도 없이 찾아왔으니 궁금하기도 하고, 또 지금 바쁠 때니까 무슨 일인가 걱정이 되서 그렇게 묻는 거지. 혹시 미

    리 원고는 끝낸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것이냐. 비축분 따윈 애초에 만들지 않는다. 진심의 남자는 그 순간, 순간에 진심을 쏟아 넣어 만드니까.”

    코를 바짝 세우며 말하는 폼을 보니 정말 어이가 없다.

    “이 양반아, 그럼 더 큰일이잖아! 그리고 뭐가 자랑스럽다고 멋을 부리며 말해!”

    내가 버럭 소리치자, 모두 이쪽으로 시선이 모인다.

    일본어라 알아듣지는 못하지만 뭔가 큰일이 있다는 것을 눈치 챈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 말에는 관심 없는지 키도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저, 남자로군.”

    그렇게 말한 키도가 실버를 향해 슬쩍 턱짓했다.

    “무슨 말이야?”

    “파시엔시아. 그렇지 않느냐?”

    “아.”

    실버가 새로운 인물펜선을 그리는 사람이라는 걸 눈치 챈 모양이다.

    “어떻게 알았어?”

    “펜선의 느낌과 비슷하니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펜선의 느낌으로 사람을 알아본다는 건가?

    이 인간 혹시 지구인이 아닌가?

    “역시 날 이기기 위해 엄청난 괴물을 입수했군.”

    “입수라니, 사람을 앞에 두고 말이 심한 거 아뇨?”

    귀가 밝은 실버가 곧바로 일본어로 말한다.

    놀란 키도가 돌아보자 실버는 여전히 머리를 아래로 한 채 펜선에 열중해 있다. 그러면서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보다, 비축분도 없이 이곳으로 왔다면 연재펑크를 낸 거 아닌가? 작가로서 자세에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그 말에 키도가 그를 향해 바라본다. 그러자 작업을 멈춘 실버가 머리를 들어올렸다.

    곧바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다.

    보이지는 않지만 만화로 표현하면 두 사람의 눈에서 쏘아진 광선이 중간에서 불꽃을 튀기는 모습으로 표현될 것 같은 분위기다.

    “마음에 드는 남자로군.”

    어째서?

    “남자에게 그런 소리 따위 듣고 싶지 않은데. 거기다 이미 그렇게 지껄이는 인간이 하나 더 있어서 머리가 아픈데 말이야.”

    “······?”

    이대봉을 말하는 모양이다.

    이대봉이야 조금만 마음 맞으면 엉겨 붙는 스타일이니 이해가 되는 말이지만.

    아무튼 두 사람의 묘한 신경전이 이어지자 어시들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신경 쓴다. 그때 정미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지금 바쁘니까, 원고에 집중해 주시면 좋겠는데.”

    “아, 넵.”

    실버가 순간적으로 시선을 거두고 원고 펜선에 집중한다. 그 때문에 삽시간에 실내에 흐르던 긴장이 사라지자 키도가 좀 실망하는 눈치다.

    그리고는 곁에 있는 정미자를 슬쩍 바라본다.

    그도 실버가 정미자에게 약하다는 걸 눈치 챘을 것이다.

    두 사람 요즘 묘한 분위기가 흐르긴 하던데. 뭐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아무튼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던 키도가 이번에는 선희 쪽에 시선을 둔다.

    완전한 몰입상태의 선희를 보자 키도의 입에 미소가 걸린다.

    마치 조카를 보는 삼촌의 시선처럼 자랑스러워하는 눈치다.

    그런데 그때였다.

    “저, 왔어요. 모두 안녕하세요.”

    경희가 모두에게 인사를 하며 들어온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는 게 덥긴 더운 모양이다. 하기야, 에어컨 앞에만 있다 보니 요즘의 불볕더위를 잊고 있었다.

    “응, 어서와.”

    “밖에 덥지?”

    “네. 와, 역시 여기가 천국이라니까.”

    그렇게 말하며 에어컨 앞쪽으로 달려가 양팔을 벌리고 선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키도가 입을 떡 벌린다.

    이 인간 또 왜이래?

    “써, 써니가 또 있다니!”

    아, 참.

    키도는 선희와 경희가 쌍둥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구나.

    그제야 이해한 내가 머리를 끄덕이는데 그 순간에도 계속 놀란 눈빛으로 경희를 바라본다.

    경희도 에어컨 앞에서 뭔가 이상한 시선을 느꼈는지 돌아본다. 그리고는 키도와 시선을 마주쳤다.

    경희가 갸웃거렸지만 곧 인사를 한다.

    “어? 안녕하세요.”

    “써니?”

    “아, 선희랑 헷갈리셨구나.”

    그렇게 말하며 날 돌아본다.

    키도가 누군지 말해달라는 표정이다.

    “아, 진심의 남자를 그리는 키도 죠타로. 내가 형으로 부르는 사람.”

    “아, 일본 만화가 선생님이시구나.”

    그렇게 말하더니 키도에게 꾸벅 인사한다.

    “전, 경희에요. 이경희. 선희와 쌍둥이. 트윈스. 제가 언니. 오네상.”

    그 순간 선희가 듣고 있었는지 중얼거린다.

    “사기 치지 마. 내가 언닌데.”

    “치, 귀도 밝아.”

    아무튼 트윈스라는 말을 이해한 키도가 그제야 머리를 끄덕인다.

    “오, 경이”

    뭐, 발음은 틀렸지만, 일본인인 키도에게 너무 큰 걸 바랄 수는 없지.

    “진심의 남자 너무 재밌었어요. 앞으로도 파이팅해주세요. 선생님.”

    내가 경희의 말을 번역해주자 키도가 만족했는지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이다. 단 한편도 허투루 그리지는 않을 테니까.”

    “연재 펑크를 내고 저런 소리를.”

    “······.”

    실버의 말에 키도가 어색한 표정으로 웃는다.

    주변 사람들이야 대부분 일본어를 모르지만 어쨌건 실버가 던진 말에 반응하는 걸로 봐서는 좋은 말이 아닐 거라는 건 짐작할 것이다.

    “형,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야? 펑크 괜찮아?”

    “괜찮지는 않지. 하지만 지금의 상태로 네임을 만들어봐야 제대로 된 것이 나올 리 없지.”

    “스토리가 막혔구나.”

    “아니, 그건 아니야.”

    “뭐? 그럼 뭐가 문젠데? 혹시 화실에 무슨 일 있어?”

    “그것도 아니다.”

    “······?”

    “이야기에 감정을 실을 수가 없어서야.”

    “감정?”

    “그래. 남자로서 솔직하게 말하지.”

    솔직한데 남자는 무슨.

    이런 오글거리는 대사를 직접 입으로 하는 이 인간도 참 대단하다.

    “파시엔시아, 삼사라에 대한 부담감 때문이다.”

    “······부, 부담감?”

    키도의 입에서 전혀 뜻밖의 단어가 튀어나왔다.

    부담감이라니.

    이것처럼 이 남자랑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또 있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최근 1위를 차지한 이후로 한 번도 그 자리에서 내려온 적이 없다. 보통이라면 한 번씩 엎치락뒤치락하는 게 정상이고. 나 역시 그 1위를 차지하기 위

    해 파시엔시아와 삼사라의 스토리에 더 힘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는 한번도 1위를 내주지 않았다.

    지금의 나에겐 그 어떤 철옹성보다 높게 느껴지는 만화가 분명하다. 그런데 그 만화를 그린 장본인은 우리 작품 때문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니.

    평소 강인한 느낌의 키도였지만, 이런 스트레스가 있었구나.

    그나저나 문제에 봉착했음에도 직접 찾아오다니, 역시 키도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

    “글쎄. 나도 아직은 잘 모르겠다.”

    조금은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다.

    하기야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왔다고 한들 갑자기 뭔가를 얻어가는 건 힘들 테지.

    그때 생각난 것이 있었다.

    “선희야. 칼파나 단편 가져와 볼래?”

    “응.”

    자신의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원고를 꺼내 들고는 우리에게 가져왔다.

    내가 그것을 선희에게 받아 키도에게 내밀었다.

    “이거 한번 볼래?”

    “이게 뭐지? 신작인 것이냐?”

    “신작은 아니고. 삼사라 외전이야. 비공개용.”

    “비, 비공개?”

    놀란 키도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얼른 받아 원고를 펼친다.

    그리고는 첫 페이지부터 깜짝 놀란다.

    “이, 이건······ 주인공이 칼파나?”

    “어? 잘 아네?”

    “당연하지. 나도 엄연한 삼사라의 팬이니까. 어시들도 모두 삼사라를 좋아하고. 단행본도 각자 다 구입했을 정도니까. 그런데 데생이······.”

    “응. 펜선으로 마무리 하지 않고 연필데생만으로 완성 시킨 거야. 그래서 비공개이기도 하고.”

    “과연······, 펜선으로 표현하긴 어려운 느낌이라는 거군.”

    나 역시도 그런 생각을 하긴 했다.

    연필만의 묘사법이 많이 사용된 데생이라 펜이 줄 수 없는 느낌을 상당히 갖고 있으니까.

    그런데 키도는 내 예상보다 더 충격을 받았는지 페이지를 넘기면 넘길수록 정신이 완전히 빠진 사람처럼 변해간다.

    “······.”

    어떤 장면에서는 페이지를 넘기지도 못하고 한참을 바라보기도 한다.

    키도에게 뭔가 말을 걸려고 해도 표정이 너무 비장해서 말도 못 붙이겠다.

    그런 키도가 곧 데생원고를 내려놓더니 선희 쪽을 돌아본다.

    “······이건, 그린 사람의 감정이 완벽하게 들어가 있는 원고군. 스토리 이상의 감정이 느껴진다.”

    “형도 그렇게 느꼈어?”

    “그래. 칼파나의 캐릭터가 완벽하게 생명을 얻은 느낌이다. 이렇게 되면 칼파나는 삼사라에서 네가 통제할 수 없게 될 거야.”

    “맞아.”

    이 인간 진짜 대단하네.

    그 짧은 시간동안 완벽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내 마음대로 미래를 결정하기 어렵게 되었지만 그래도 앞으로 칼파나가 어떤 활약을 할지 기대가 되기도 해.”

    “과연 대단한 단편이다. 써니가 이걸 그릴 때 느꼈던 감정까지 알 것 같군.”

    “그런 것도 알아?”

    “즐거움과 자유로움이다. 모처럼 원 없이 그렸을 것이 분명하다.”

    키도의 말을 들으니 그제야 선희가 그릴 때 그런 묘한 표정을 지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게 즐거움과 자유로움 이었구나.

    “감동적이다. 써니의 작품을 보고 났더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던지 알 것 같은 기분이구나.”

    “어. 그럼?”

    “머릿속이 제대로 정리가 되었다.”

    아. 이제야 돌아갈 모양이다.

    그래. 가끔 이런 외도도 필요한 법이지.

    “테이블과 연필, 그리고 원고용지를 좀 빌릴 수 있겠느냐?”

    “뭐? 갑자기 왜?”

    “왜긴, 바로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원고를 여기서?”

    “그래.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는 바로 그릴생각이니 네임 따위는 필요 없을 거야.”

    “아니, 네임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야 이곳에 온 보람이 있었구나!”

    갑자기 크게 웃어대자 어시들이 놀란 표정으로 키도를 바라본다. 경희도 그런 키도를 보며 같이 ‘하하하’하며 흉내 내고 있다.

    < 정신 차려!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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