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02화 (102/425)
  • < 정신 차려! (3) >

    “네? 선생님이 사라져요?”

    키도 담당인 테고시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버럭 소리쳤다.

    그 덕분에 주변에 있던 편집부의 직원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돌아본다.

    그런 주변의 시선을 느낀 테고시가 목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자세하게 말씀해 보세요.”

    그러자 전화기 건너편에서도 당황한 음성이 들려왔다.

    - 네. 아침에 출근해서 선생님 나오실 때까지 기다렸는데, 이상하게 화실로 나오시지 않으셔서 사모님께 여쭤봤더니, 원고에 대한 압박감에 아마 어디

    론가 도망치신 것 같다고······.

    “······압박감요?”

    - 네.

    순간 테고시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어이가 없어 말이 나오지 않는다.

    밑도 끝도 없이 도망이라니.

    이제까지 마음대로 완결을 짓는 등 여러 가지 기행을 일삼기는 했어도 원고를 두고 도망친 적은 없었던 그였다.

    늘 근성과 열혈을 부르짖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원고를 두고 도망을 친 것이다.

    물론 1위를 한 달 반 이상 지켜가던 그의 몰골이 최근 들어 지나칠 정도로 핼쑥해진 건 사실이다. 그래서 걱정스러운 말을 건네면 늘 ‘괜찮네, 이 정도

    쯤은. 하하.’ 그렇게 대답하며 시원하게 웃고 넘기더니.

    결국 속마음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차라리 연재를 조금 쉬신다고 할 일이지. 갑자기 이런 식으로······.”

    - 죄송합니다.

    그냥 혼잣말로 한 건데 그걸 들은 어시가 미안해하자 서둘러 손을 휘젓는다.

    “아, 아뇨. 방금은 제 헛소리였습니다.”

    - ······.

    “그나저나 선생님, 어디로 가신지는 모르세요?”

    - 사모님도 모르시겠다고 하시네요.

    “혹시 평소에 자주 가시는 곳은?”

    - 저희들이 알만한 곳은 모두 연락해보거나 찾아가 봤지만, 역시 안계셨어요.

    알만한 곳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인근 파칭코 게임장이나, 선술집 정도일 것이다.

    “아, 그렇군요.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곧 한번 다시 찾아뵙죠.”

    전화를 끊은 테고시가 서둘러 가방을 챙겼다.

    그때 다가온 팀장이 테고시에게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진짜 키도 선생님이 도망쳤다고?”

    “그런가 봐요. 오늘 갑자기 사라지셨다는데.”

    “그냥 잠시 바람 쐬러 나간 걸 화실사람들 모두가 착각 한건 아닐까?”

    “뭐, 사모님이 그렇다고 말씀하시니까. 일단 제가 가서 자세한 사정을 알아볼게요.”

    “그래, 얼른 가봐. 나는 진심의 남자 쉰다는 소식이랑, 혹시 모르니까 만약을 위해서 그 자리를 잠시 메울 단편 작을 알아볼게.”

    “네,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편집실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보던 직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키도 선생님이 원고를 두고 도망을? 별일이네.”

    “그러게. 이야기가 갑자기 산을 타는 경우는 있어도, 원고를 두고 도망치는 분은 아닌데.”

    “이런 중요한 때에 이야기가 산을 타면 안 되지. 요즘 우리 잡지 판매부수 엄청 늘었잖아. 이럴 때 1위중인 진심의 남자가 삐끗하면 난리나지.”

    “내가 보기엔 그 때문인 것 같은데. 부담감이 얼마나 많겠어.”

    “하기야, 최근 계속 위태로운 1위를 유지하고 있었잖아. 파시엔시아의 맹추격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워 졌겠지.”

    “듣기론 화실 어시 몇 명이 원고 중에 병원에 실려 가고 난리도 아니었데. 아무래도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던 모양이지.”

    “그래도 이렇게 잘나갈 때 갑자기 종적을 감추다니.”

    직원들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떠든다.

    그때 놀란 표정의 편집장이 빠른 걸음으로 편집실로 들어왔다.

    “뭐야? 정말 키도 선생이 원고를 두고 도망쳤다는 거야?”

    “네. 그런 모양이에요.”

    “갑자기 뭣 때문에?”

    “글쎄요. 얼핏 듣기론 압박감, 어쩌고 하던데.”

    “그 초합금Z로 만들어진 인간이······ 압박감?”

    “네.”

    “허.”

    편집장도 어이가 없는지 곧 헛웃음을 흘렸다.

    *

    “정말 키도 선생님께서······.”

    “네. 힘들어서 도망치셨어요.”

    키도의 부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남편이 도망친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음에도 부인은 평소와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런 테고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인은 계속 이야기를 이었다.

    “며칠 전부터 남편이 잠결에 ‘이런 식으로는 곤란해. 도망치고 싶어. 숨이 막혀. 한계야.’ 이렇게 잠꼬대까지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아침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그이를 보고, ‘그렇게 힘들면 도망쳐 보는 건 어때요?’ 라고 말씀드렸는데. 정말 그러신 모양이에요.”

    그렇게 말하면서 스스로 재밌는지 다시 웃는다.

    그 모습을 보는 테고시의 마음은 더 바짝 타 들어갔다.

    “저기······ 웃으실만한 상황이······.”

    “늘 이런 점이 남편의 매력이죠.”

    “······그러니까, 지금은······.”

    담당 입장에서야 미치고 팔짝 뛸 입장이지만, 한편으로는 부인의 입장을 생각해보면 얼핏 이해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평소 남편이 그렇게 힘들어했다면야 걱정도 되었겠지.

    물론 지금 그녀의 모습에선 그런 느낌이 전혀 들지 않기는 하지만.

    하지만 담당으로서 부인에게 쓸데없는 소리를 할 필요는 없다.

    “혹시 선생님께서 가셨을 만한 곳이 짐작되는 장소는 없겠습니까?”

    “있어요.”

    단번에 대답하자 테고시의 표정이 곧 밝아졌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안 가르쳐 줄래요.”

    그렇게 말하고는 호호거리며 웃는다.

    “······.”

    그 순간 진심으로 ‘이 여자 때려 줄까.’하는 생각이 테고시의 머리를 스쳤다.

    ***

    “또 칼파나 그려?”

    내 질문에 선희는 책상에서 머리를 숙인 채 작업하며 대답했다.

    “응.”

    요즘 선희는 시간만 나면 칼파나에 대한 그림만 그리고 있다.

    최근 파시엔시아와 삼사라의 데생 정도는 마음먹으면 하루만에도 다 끝낼 정도로 속도가 빠르다. 그러다보니 요즘엔 남는 시간이 좀 많아졌다.

    평소라면 이렇게 남는 시간엔 주로 만화를 본다거나 백설기 쓰다듬고는 했는데, 요즘엔 예전처럼 남는 시간엔 그리고 싶은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림의 대상이 명확하다.

    며칠 전 삼사라에 새롭게 추가된 빌런 ‘칼파나’에 뭐가 꽂혔는지 계속 칼파나에 대한 그림만 그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짐작되는 부분이 없는 건 아니었다.

    파시엔시아는 땀범벅의 남자 스포츠만화이고, 삼사라는 망가진 좀비들이 쏟아지는 만화다. 그런 와중에 삼사라에서 소름끼칠 정도의 미모를 가진 빌

    런인 칼파나의 등장이 선희에게는 반가웠던 모양이다.

    사실 칼파나의 경우, 처음 내가 불러줬던 외모도 결국 연재에 들어갔을 땐 더욱더 예뻐지고 화려해졌다. 물론 내용이 너무 잘 부합되는 외모라 마음에

    들었지만 선희 스스로도 그림에 만족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틈만 나면 칼파나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 선희를 바라보는데 연필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만족한 표정을 보니 다 그린건가?

    자리에서 일어난 선희가 그렸던 그림들을 정리하더니 그것을 가지고 내게 다가온다.

    “······?”

    선희가 내게 그림들을 내밀었다.

    “나 보라고?”

    “응.”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뿌듯해 하는 표정이다.

    “알았어.”

    곧바로 그림을 살펴보니 애니메이션 설정집에서 자주 보던 포즈의 앞과 뒤 옆모습이다. 그리고 칼파나의 복장과 액세서리 따위를 따로 확대해 디테일

    하게 그려져 있다.

    나름 액세서리에 들어있는 힘이나 사용법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도 첨부되어있다.

    물론 그건 거의 다 내가 처음부터 주문했던 부분이긴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걸 내게 보여주는 이유가 뭐지?

    그런 내 눈빛을 이해했는지 선희가 입을 열었다.

    “칼파나 이야기 하나 써 주면 안 돼?”

    “뭐? 칼파나 이야기?”

    “응.”

    “느닷없이 무슨 말이야?”

    “삼사라에 등장하지 않은 이야기.”

    “등장하지 않는······.”

    대충 감이 온다. 아마도 외전이나 소소한 짧은 이야기 따위를 원하는 모양이었다.

    “연재엔 안 들어갈 텐데?”

    “괜찮아. 그냥.”

    “그려보고 싶어서?”

    “응.”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얘가 칼파나를 좋아하는 건 알지만, 설마 이런 것까지 부탁할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얘, 정말 칼파나에 푹 빠졌구나.

    “······안 돼?”

    선희가 축 늘어진 아기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부탁했다.

    이 녀석 백설기랑 붙어있더니 언제부턴가 얼굴이 고양이 상처럼 변한건가.

    이게 어디서 수작을.

    그래도 모처럼 선희의 부탁이니 그냥 무시하기도 그렇고.

    어차피 대략적인 칼파나에 대한 설정은 박상식과 대화를 하면서 따로 메모를 해 두었으니 특별히 어려울 건 없다.

    “알았어.”

    내 대답에 선희의 표정이 밝아진다.

    “하지만 콘티 없이 이야기로 해줄 테니까 알아서 콘티작업해라.”

    “알았어.”

    열심히 끄덕이더니 볼펜과 메모지를 준비한다.

    칼파나 탄생부분을 대략 설명한 뒤, 삼사라엔 등장하지 않는 칼파나 주연의 짧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주인공과의 대면 직전에 벌어진 처절한 이야기.

    짧은 사건이지만, 나름 그곳에 임팩트를 넣어 극적인 요소도 첨가했다.

    “······끝. 이제 알아서 해.”

    “응.”

    열심히 메모를 하던 선희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곧장 노트를 꺼내 콘티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데생작업에 들어간다.

    어시들은 작업 중에도 그런 선희의 모습에 호기심어린 시선을 보낸다.

    두 시간 정도 흐른 후 선희가 작업을 드디어 마무리 했다.

    작업이 끝나자마자 데생원고를 내게 가져다준다.

    “······!”

    연재용이 아니다보니 연필로 완전히 마무리 된 원고일 뿐이다. 그럼에도 평소 보던 데생원고와는 아예 수준이 다른 느낌이다.

    연필만으로 디테일한 배경까지 세세하게 그려 넣어 완벽한 12페이지짜리 단편을 만든 것이다.

    디테일한 부분은 생략한 채 구술만으로 된 간단한 이야기였지만, 그것을 나름 잘 해석해 그린 단편은 굉장히 괜찮았다.

    평소 연필로 슥슥 그린 데생과는 달리 처음부터 펜을 염두에 두지 않은 그림이라 이 자체로 완성이 되어버린 것이다.

    음영도 가늘고 두꺼운 연필 선을 이용해 맛깔나게 잘 표현했다.

    극적인 장면도 그림으로 표현되어 내 설명보다 더 마음에 와 닿는다.

    그래서일까. 덕분에 삼사라 속 칼파나의 캐릭터가 더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본 스토리상에서는 분명 주인공을 궁지에 몰게 될 그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강력한 빌런일 뿐이지만, 단편으로 인해 묘한 매력이 더해져 버렸다.

    원래라면 한동안 주인공을 괴롭히다 사라질 캐릭터지만, 이런 식으로 생명을 불어넣으니 버리기 힘들게 되었다.

    아, 나도 칼파나의 매력에 끌리다니.

    이래서는 곤란한데.

    큰 이야기를 위해 희생시키려던 기존의 계획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괜찮아?”

    “그래, 곤란할 정도로.”

    “······?”

    선희가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머리를 갸웃거린다.

    하기야, 칼파나가 사라질 캐릭터라는 걸 아예 모르니 당연한 반응이겠지.

    어쨌거나 이렇게 되면 내가 생각한 캐릭터임에도 마음대로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야기 속에서 선희에 의해 강력한 생명력을 얻은 것이다.

    복잡한 표정으로 원고를 바라보고 있던 그때 누군가 찾아왔는지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서둘러 성준희가 나가더니 곧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왜?”

    “일본인인데?”

    “일본인? 아카기 씨가 아니고?”

    “응. 모르는 사람.”

    “모르는 사람?”

    “그래. 어떻게 할까?”

    “일단 들어오라고 해.”

    지로 말고 찾아올 일본인이 있었던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찰나 화실로 낯익은 사람이 들어왔다.

    “어? 아니키!”

    “오랜만이구나. 유난.”

    화실에 들어선 사람은 황당하게도 키도였다.

    이 인간 갑자기 무슨 일이지?

    < 정신 차려!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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