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01화 (101/425)

< 정신 차려! (2) >

“이거 재미없어.”

“뭐?”

“이번 이야기. 심심해.”

“······.”

선희가 삼사라의 콘티를 보며 말했다.

전에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던 선희였는데.

그 때문에 박상식도 당황하고 있었다.

“역시 내가 만든 콘티 문젠가? 다시 만들어 볼까?”

“이야기가 심심해.”

그렇다는 건 콘티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어느 부분이 심심해?”

내 질문에 콘티부분에 연필로 표시를 하며 말했다.

“여기, 여기, 여기.”

“······!”

놀랍게도 이번에 내가 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만 귀신같이 집어내며 말했다.

화실 사람들이 모두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긴장한 듯 보인다.

잠시 살펴본 후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 오빠가 다시 고쳐볼게.”

곧바로 콘티를 가지고 와 스토리를 다시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마음한편으로는 스스로 어느 순간부터 안일한 생각으로 스토리를 만들어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승승장구하다보니 가볍게 생각하고 만든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항상 그림에만 충실한 선희지만, 평소에도 만화를 좋아해서 수시로 만화들을 읽고 있는 아이다. 담당인 지로에게 부탁해서 올 때마다 신작 인기 단행

본 만화를 내가 직접 부탁해서 가져와 그것들을 읽고 있으니까.

덕분에 이 아이의 눈도 이전에 비해 상당히 높아져 있는 것이다.

이젠 어설프게 이야기를 만든다는 건 어렵게 되었다. 선희까지 저렇게 날카로운 눈으로 스토리를 살피고 있으니까.

어쨌건 선희가 지적한 스토리는 모두 캐릭터가 불안정한 느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완벽하게 잡히지 않은 캐릭터들이 좀비라는 괴물

과 맞닥뜨린 장면이다.

삼사라는 다른 연재만화와 달리 묘하게 리얼한 감이 있어서 캐릭터가 상황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면 그게 쉽게 느껴진다.

일반적인, 아니 특히나 이시절의 만화들은 만화적인 허용의 장면이 많아 조금은 엉뚱해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삼사라의 경우는 다르다.

다른 만화에 비해 독특한 설정이라고는 해도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리얼함이다. 그런 곳에서 만화적인 행동을 하는 캐릭터가 끼어있으

면 그것이 거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지금의 독자들이라면 어느 정도 허용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문제 있다고 인식하고 있는 장면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다.

무의식적이었던 아니면 일부러건 간에 문제 있다는 걸 인식한 이상 고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하지만 고치는 건 관두기로 했다.

“······고치지 않고, 싹 다 새롭게 쓴다고?”

“그래. 요즘 나도 매너리즘에 좀 빠졌나봐. 그래서 아예 싹 다 갈아엎고 새로 만들어보자.”

“그래, 나도 요즘 삼사라의 내용이 좀 밍숭맹숭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같은 시간이 반복되고 있지만 주인공은 성장한다.

이것이 처음엔 새로우면서도 흥미 있는 전개였지만, 한권분량이 훨씬 넘은 지금은 이제 익숙함이 되었다.

맛있는 음식도 계속 같은 것만 먹으면 질리듯, 삼사라도 이젠 변화를 줄 시점이 된 것이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틀을 바꾸지 않고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고심했다.

삼사라엔 새로운 캐릭터가 필요할 시점이었다.

처음 등장했던 리더 급의 좀비들과는 달리 주인공을 좀 괴롭혀 줄 수 있는 존재의 필요성도 느끼던 참이다.

반복되는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의 등장이 긴장감을 더욱 높여 줄 것이다.

일단 대략적인 설정이 머릿속에 잡히자 박상식과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제까지 시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건 주인공뿐이잖아. 그래서 적어도 그런 존재가 하나 정도는 필요할 것 같아.”

“그렇게 되면 주인공 켄의 엄청난 고난이 시작되는 거 아니야?”

“아무래도 그럴 거야. 일단 이름은 정했어. 칼파나. 힌디어로 환상이라는 뜻이야. 물론 여자들이 사용하는 이름중 하나라 여성성을 가진 악당이지.”

이번 삼사라 스토리를 준비하면서 이름정도는 미리 정해두었었다.

“오, 그래서?”

“캐릭터는······.”

잠시 생각하다가 선희에게 다가갔다.

“새로운 캐릭터를 하나만 그려봐 줘.”

“응.”

“느낌은 말이지. 붉은 긴 머리에·······.”

선희가 내 설명을 듣고 그림을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몇 개의 러프스케치를 보고 그중 가장 이미지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자, 곧바로 선명한 이미지로 만든다.

그러더니 각도별로 몇 개의 그림을 더 그려 완성한다.

그림을 보니 머릿속의 이미지가 더욱 뚜렷해졌다.

“좋아. 고마워. 이걸로 다시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야겠어.”

내 말에 선희가 살짝 웃더니 머리를 끄덕인다.

곧바로 다시 박상식과 스토리 회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대략 두어 시간의 회의 끝에 새롭게 추가된 이야기가 대충 완성되었다.

곧장 박상식이 그것을 가지고 콘티작업에 들어갔다.

간단한 형식의 콘티로 한편의 이야기를 끝내자마자 선희에게 노트를 넘겼다. 선희가 콘티를 슥 훑어본다. 그러더니 머리를 끄덕이며 곧장 데생작업에

들어갔다.

이번엔 그럭저럭 마음에 든 모양이다.

솔직히 표정만으로는 정확히 알기 어렵긴 하지만.

1시간 반 정도 흐르자 전체 데생이 완성되었다.

무서울 정도로 빨라서 요즘엔 그냥 가볍게 낙서를 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데생이 완성되자마자 정미자가 서둘러 원고를 받아간다. 그리고 성준희를 포함해 한참 작업 중이던 세 명의 여자들이 정미자의 자리로 가서 데

생원고를 읽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퇴짜를 맞은 스토리가 새롭게 만들어져 나오니 그것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잠시 후, 모두 원고를 다 읽었는지 놀란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더니 곧장 내 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어시들도 이번 이야기가 마음에 든 모양이다.

그 모습들을 보고 난 뒤에야 박상식도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고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더 이어지는 콘티 작업에 열중한다.

그렇게 한참을 작업하던 박상식이 선풍기에 머리를 쭉 내밀며 말했다.

“그나저나 엄청 덥네. 안 그러냐?”

“그러게.”

“여름엔 정말 힘들어.”

그러고 보니 날씨가 너무 더운 탓에 화실 식구들 모두 녹초가 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화실의 선풍기가 열심히 회전하고 있었지만, 더위는 어쩔 수가 없다.

어시들은 나름 찬물을 세숫대야에 담아 가져와 발을 담그기도 하며 버텨보지만, 낮 더위가 생각이상으로 높아 견디는 것이 쉽지가 않다.

얼음공주 선희도 이런 더위엔 어쩔 수 없는지 머리위에 찬물로 적신 수건을 돌려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래서 과감하게 결단을 내렸다.

다음날.

유명 전자회사 직원 복을 입은 남자들 몇 명이 화실로 들어왔다.

그들의 등장에 화실사람들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직원 한명이 내게 물었다.

“어느 창문에 설치할까요?”

“중앙에 있는 창문에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잠시 후 나갔던 직원들이 들어오더니 네모난 박스형 물건을 들고 들어온다. 얼핏 보면 TV처럼 보이는 갈색의 나무색 박스, 바로 에어컨이었다.

“어? 저거······. 에어컨 아니에요?”

“정말이네?”

“서, 선생님 정말 우리화실에 에어컨 설치하는 거예요?”

놀란 정미자가 묻자 내가 머리를 끄덕였다.

“네. 더우면 작업효율이 떨어져서 안 되겠더라고요.”

“이거 엄청 전기세 많이 나온다던데.”

“효율이 떨어지면 그게 더 손해죠.”

에어컨이 비싸기는 해도 구입에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정확히 33만 원짜린데, 일시불로는 27만원에 구입했다.

어지간한 공장 노동자 한 달 치 월급을 훨씬 능가하는 돈이긴 하지만, 그보다 전기세가 두려워 사용하기 힘든 물건이긴 하다.

하지만, 더위 때문에 제대로 원고를 하지 못하는 건 엄청난 손실이니 당연히 설치하는 게 오히려 이득이다. 거기다 지금은 자금사정도 좋아졌으니.

“작동합니다.”

위이잉.

에어컨의 소음이 생각보다 크다. 거기다 작동을 시작하면서 생기는 묘한 냄새 때문에 살짝 인상이 찌푸려진다.

무식하게 커다란 주제에 뭔가 성능은 떨어진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화실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신기한지 모두 에어컨에만 정신이 가있다.

그리고 잠시 후 사람들의 탄성이 튀어나온다.

“와아, 찬바람이다, 찬바람!”

“시원해! 살 것 같아.”

“천국이야, 천국. 너무 좋아요.”

일하다말고 모두 에어컨 앞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곧 찬 공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감탄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에어컨이 귀하던 시절이라 그런지 이것만으로도 컬쳐쇼크를 받는 모양이다.

아까부터 계속 에어컨을 힐끔거리던 선희도 어시들 사이에 서서 에어컨의 찬바람을 만끽한다.

최근에는 한동안 보이지도 않던 백설기도 언제 왔는지 일찌감치 에어컨 아래에 자리를 잡고 널브러져 있다.

그 모습을 본 내가 혀를 찼다.

“저 놈은 이제껏 어디에 있다가 온 거야?”

일본에서 본 이후로 처음인가?

하지만 그런 녀석임에도 선희는 오랜만에 찾아온 백설기가 반가운지 그리던 그림도 잠시 접어두고 널브러진 녀석을 연신 쓰다듬느라 바쁘다.

“앗! 여기, 냉장고 속 같다!”

방학이라고 일찌감치 나갔던 경희가 화실에 놀러오더니 시원한 공기에 깜짝 놀라며 에어컨 앞으로 달려가 양팔을 쫙 벌린 채로 시원함을 만끽한다.

“아아, 시원해! 여긴 완전히 북극이구나, 북극.”

그렇게 말하더니 한참 스토리에 빠져있는 날 보며 후다닥 달려온다.

“오라버니! 소녀, 감동 했······. 읍!”

다가오던 경희의 얼굴을 손으로 탁 막아버렸다.

“더우니까 떨어져라.”

“켁! 디러! 오빠 손 디게 짜!”

“시끄럽고, 온 김에 미숫가루나 좀 타서 돌려.”

“앗, 미숫가루 있어?”

“냉장고에.”

“알겠슴다!”

거수경례까지 하며 호들갑스럽게 부엌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에어컨을 달고 나자 이제는 새로운 문제가 생겨버렸다.

다음날.

“사모님, 저희가 좀 도울까요?”

“아니, 괜찮아요. 그림 그리느라 힘들 텐데. 쉴 때는 쉬어요. 난 쉬엄쉬엄 할 테니까.”

“괜찮아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엄마가 낮엔 화실에서 거의 살다시피 한다는 점이다.

일부러 집에도 한 대 더 에어컨을 달려고 했지만, 엄마의 만류로 그러지 못했다. 에어컨 가격도 가격이지만, 전기세 무서워서 틀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런데 엄마는 결국 더위 때문에 거의 화실에서 살다시피 한다.

뭐, 점심과 저녁 준비 때문에 하루에 두 번씩은 기본적으로 오고는 있었지만, 엄마는 더위 핑계로 계속 화실 한쪽 구석에 자리를 완전히 잡은 모양이

다.

물론 가끔 성준희가 준모를 데리고 출근하면, 아이를 봐주기도 하고, 더불어 청소도 하지만. 그런데 검정고시를 모두 끝내고 대학을 준비하던 누나도

요즘엔 주로 화실에 나온다.

너무 더워서 시립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게 힘들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내가 살던 시절이야 공공시설에 가면 여름에 에어컨을 짱짱하게 틀어주곤 했지만, 지금 시절은 공공시설이라도 에어컨을 틀어주는 곳이 그리 흔하지

않으니까.

그래도 온 가족이 화실에서 이 더운 여름에 피서를 즐길 수 있다는 것도 행복이다.

솔직히 가장 놀란 건 집밖의 평상뿐만 아니라 도로 주변에 돗자리를 깔고 잠자는 가족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이색적인 풍경을 보고 좀

놀라기는 했는데, 이것도 뭐 익숙해지니까, 이제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있다.

아무튼 에어컨을 달고 나서 새롭게 생긴 문제는 또 있었다.

“오늘은 좀 더 남아서 할게요.”

“저도요.”

날이 더워질수록 더욱더 일을 많이 하려한다는 점이다.

더위 때문에 나가는 것을 꺼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어시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오늘 더 그려도 돼?”

“좀 쉬지 않고.”

“괜찮아.”

선희까지 이런다는 거다.

“야야, 적당히 해라.”

“더 할게.”

그러다보니 온 가족이 늦게까지 화실에 죽치고 시간을 보낸다. 화실 한쪽 구석에선 가족들이 TV를 보기도 하고.

일찌감치 한쪽에 매트 깔아놓고 잠이 든 엄마를 보니, 마음도 짠하고.

어쩔 수 없다는 생각에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날씨가 심하게 더울 땐 그냥 여기서 잠을 자도록 합시다. 자리는 넓으니까 남자, 여자 이렇게 나눠서.”

“야호!”

경희가 제일 좋아하네.

< 정신 차려!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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