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100화 (100/425)
  • < 정신 차려! (1) <4권 끝> >

    “이게······, 새로 들어온 사람이 그린 거?”

    전상길이 인물펜선까지 마무리된 원고를 보며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네.”

    “와, 실력이 상당한데? 야, 양구야 이리와 봐라.”

    전상길이 부르자 추양구가 그리던 그림을 잠시 멈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 쪽으로 다가왔다.

    “이거 한 번 봐봐.”

    전상길이 원고를 건네자 무심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이 달라진다. 본인과 다른 스타일의 강렬한 펜선에 놀란 모양이다.

    “어때?”

    “······.”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원고를 들여다볼 뿐이다. 그리고는 다른 원고들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한다. 마치 단번에 다 분석이라도 하려는 기세다.

    아무튼 그렇게 뭔가에 열중한 추양구의 모습은 처음이다.

    지금 추양구는 뭘 생각하며 그림을 보고 있을까.

    혹시 실버의 펜선에 라이벌 의식이라도 느끼는 걸까.

    한참 그림을 들여다보던 추양구가 입을 열었다.

    “펜선이······, 살아 있군요.”

    “그렇지?”

    “데생의 원래 느낌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펜선만큼은 제가 완벽히 밀리네요.”

    스스로 저렇게 단번에 인정해 버리다니.

    “음······.”

    전상길도 동의한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다.

    당신이 그렇게 대놓고 긍정하면 추양구가 불쌍하잖아.

    하지만 그런 전상길의 태도에도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곧 자기 자리로 돌아가 다시 작업을 시작한다.

    그런 추양구를 보던 전상길이 피식 웃으며 작게 속삭이듯 말했다.

    “자극이 좀 되었을 거야.”

    “네?”

    “지금 양구 엄청 열 받았어.”

    열을 받아?

    그렇게 안 보이던데.

    “어떻게 구했어?”

    “어? 대봉이 형 연락 안 왔어요?”

    “뭐? 그 자식, 만났어?”

    “그럼요. 대봉이 형 소개로 구한 사람인데.”

    “역시 대봉이가 구해준 사람이구나. 그 놈 참, 어디서 사람을 잘도 구해오네. 그것도 대단한 사람만 골라서.”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는다.

    “짜식이, 우리 화실에도 사람 필요한데.”

    “조만간 화실을 확장하면 나머지 일도 완전히 저희가 다 할 테니까 그때까지만 좀 도와주세요.”

    “당장 추양구만 그쪽 일에서 빠져도 숨통이 트이니까. 그리고 너무 서두르지 않아도 돼. 우리도 이제 사람이 어느 정도 충당이 되었거든. 아, 그리고 평

    발 스트라이크 말인데.”

    “네.”

    “조만간 출간될 거야.”

    “그래요? 반가운 일이군요.”

    “한꺼번엔 아니고, 몇 권씩 나눠서. 어쨌거나 사람이 부족해서 좀 오래 걸렸어. 이거 출간되면 화실도 이젠 좀 제대로 돌아갈 것 같다. 이거 나온다는

    소식에 달라는 곳이 전국에 좀 많아서 출판사도 바쁘다더라. 아무튼 만화가는 작품을 잘 만나야 된다니까.”

    전상길이 날 보며 웃는다.

    “그나저나 너무 덥네. 명욱아, 우리 미숫가루나 좀 시원하게 타서 마시자.”

    “네.”

    “너도 먹고 갈 거지?”

    “아, 네.”

    “이 친구 거도 한잔 더 타와.”

    “네.”

    직원이 곧 미숫가루 두 컵을 가져와 전상길과 나에게 한잔씩 나눠준다.

    그것을 마시며 화실을 천천히 둘러봤다.

    요즘 전상길의 말대로 사정이 많이 나아진 것인지 휑하던 화실의 느낌이 많이 좋아졌다. 낡은 책상 몇 개도 새것으로 고쳤고, 이젠 비어있는 자리도 없

    고.

    “아, 경영의 왕 말인데.”

    “네.”

    “조만간 여유가 생기면 B팀을 다시 만들 생각이야. 그래서 다시 시작했으면 하거든?”

    “아, 스토리 말씀이세요?”

    “어. 요즘 너 바쁜 거 아니까 콘티까지는 요구 못하겠고. 스토리만이라도 좀 부탁할 수 있을까?”

    “콘티도 해야죠. 상식이 형이랑 같이 만드는 건데. 그 형도 요즘 콘티 실력이 많이 늘어서 엄청 빨라졌거든요.”

    “그럼 다행이고.”

    “여기 평발 스트라이커 원고 좀 봐도 돼요?”

    “그럼. 당연하지.”

    전상길의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자리에서 완성된 평발 스트라이커 원고를 가져와 내밀었다.

    한동안 공백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림의 퀄리티는 더 올라가 있다. 그런데 묘하게 예전보타 리얼리티가 더 살아있다.

    콘티에서는 확인 할 수 없는 리얼함이 완성원고에서는 있었다. 그런데 그 느낌이 파시엔시아와 상당히 닮아있다. 마치 파시엔시아 마이너 버전 같다고

    나 할까.

    “닮았지?”

    “네. 좀 놀랐어요.”

    “최근에 파시엔시아 원고 작업을 하다보니까 애들이 그 그림에 영향을 많이 받은 모양이야. 예전처럼 배경을 지정해줬는데, 파시엔시아처럼 그리고

    있더라고. 그 때문에 출판사에서도 그림이 너무 좋다고 난리더라.”

    은연중엔 파시엔시아의 영향을 받았다라.

    하기야, 그림의 퀄리티나 완성도 차이가 심했기는 했지.

    그렇지만 직접적으로 화실 전체에 영향을 이렇게 많이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전부 실력이 많이 늘었지만, 특히 양구 쟤, 실력이 진짜 많이 늘었어. 특히 중간 중간에 양구에게 맡긴 데생은 정말 나보다 훨씬 좋아. 지금 네가 보는

    그 페이지도 양구가 한 거야.”

    그렇군.

    그동안 파시엔시아 인물 펜터치를 하면서 데생에도 변화가 있었던 모양이다. 특히 지금 내가 보는 장면은 파시엔시아의 분위기가 강하다. 물론 캐릭터

    가 전혀 달라서 한눈에 알아볼 정도는 아니지만.

    어쨌건 대단하다.

    파시엔시아의 느낌과 닮았음에도 작업시간을 월등히 줄인 단순 스타일 그림체라니. 그 사이 한 단계 진화했다는 느낌이다.

    이런 건 선희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식이다.

    “죄송한데, 이 그림 몇 장 복사해 가면 안 될까요?”“안될게 뭐 있어. 그렇게 해.”

    잠시 후, 복사한 원고 몇 장을 봉투에 담아 전상길 화실을 빠져나왔다.

    전상길 화실도 점점 원래의 위치를 찾아가니 다행이다.

    어쨌건 이곳도 내게는 중요한 곳이니까.

    그렇게 거리를 걸어가는데 중학생쯤 되는 아이들의 모여 흥분한 소리를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평발 스트라이커 곧 나온대!”

    “와, 진짜!”

    쟤들이 저런 걸 어떻게 알지?

    호기심에 고개를 돌렸더니 아이들이 만화방 앞에서 소리를 지르고 있다. 아이들이 바라보는 곳엔 커다란 만화포스터가 걸려있다.

    그리고 그 만화는 평발 스트라이커 주인공 강도치가 자신감 어린 표정으로 공을 강하게 차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아래엔 ‘평발 스트라이커

    새로운 이야기가 곧 출시됩니다.’라고 적혀있다.

    “만화방, 주인아줌마가 일주일 쯤 걸릴 거래.”

    “정확한 거야?”

    “아싸!”

    “야, 학주 단속 있을지도 몰라.”

    “아, 씨. 학주는 너무 부지런해서 탈이야.”“맞아. 이런 거 할 때만 더럽게 부지런해.”

    그렇게 투덜거린다.

    애들이 귀엽네.

    그 모습을 본 내가 낄낄거리며 웃자, 아이들이 날 묘하게 쳐다본다.

    난 곧 헛기침을 하며 아이들의 시선을 외면하고 그곳을 벗어났다.

    ***

    지로가 편집부로 들어오자 그 모습을 본 팀장이 물었다.

    “어, 원고 우정국에서 가져온 거야?”

    “네.”

    “이제 매번 찾아가지 않아도 되겠네.”

    “네. 하지만 대신 전화통화는 더 자주해요.”

    “어쩔 수 없잖아. 거리가 있으니까. 물론 나라가 다르다는 게 더 큰 이유지만.”

    “그렇죠.”

    지로가 웃으며 우정국에서 가져온 종이박스를 열었다.

    안에는 잘 포장된 서류봉투가 들어있고 그것을 꺼내 봉투를 열었다.

    삼사라와 파시엔시아 두 개의 원고.

    먼저 원고 상태가 좋은 지부터 얼른 확인한 후, 한 장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삼사라의 원고를 살펴보다 묘한 느낌에 머리를 갸웃거렸다.

    뭔가가 달라졌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빨리 캐치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나가던 야지마가 한마디 던진다.

    “오, 삼사라 펜선 좋아졌네?”

    “네? 펜선요?”

    놀란 지로가 다시 원고를 살펴보더니 눈이 동그랗게 떠진다.

    “······그러고 보니.”

    그 말에 지나가려던 야지마가 멈칫하더니 지로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는 담당이라면서 그런 것도 금방 눈치 못 채냐?”

    “저도 뭔가 달라졌다고는 느꼈는데, 그게 펜선인줄은 몰랐어요.”

    “나 참, 아직 초짜 벗어나려면 멀었구만.”

    야지마가 그렇게 혀를 찼다.

    “딱 봐도 선이 전보다 많이 살아 있잖아. 전에는 조금 신중한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좀 더 자신감이 있어 보이고.”

    “자신감이요?”

    “어휴, 이걸 어떻게 설명으로 해. 아무튼 많이 보면 저절로 알게 돼. 그런데, 삼사라 펜선 느낌은 저번이랑 비슷한 스타일이라 사람이 바뀐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

    “글쎄요. 한동안 화실에 가질 않아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요.”

    “자랑이다. 그런 거 변화 있을 때 마다 째깍째깍 전화를 걸어서 확인하는 게 네 일이야.”

    “네.”

    “아무튼 열심히 해라.”

    그렇게 말한 야지마가 원래 가려던 길로 다시 걸어간다.

    그 뒷모습을 보면 다시 원고를 보던 지로가 머리를 긁적였다.

    확실히 경력자가 다르긴 다르다구나 싶은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다시 삼사라를 전체적으로 살펴보니 확실히 느낌이 좋아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곧이어 이번엔 파시엔시아의 원고를 살펴본다.

    그런데.

    “······어?”

    이쪽도 펜선의 느낌이 달라졌다.

    자신의 눈에도 그 변화가 느껴질 정도로 예전의 파시엔시아에 비해 더 강렬해졌다.

    분명 외주를 주는 곳의 노련한 어시가 펜선을 담당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다. 하지만, 이번 펜선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느낌이

    다르다.

    거기다 이전에 비해 데생의 느낌을 더 잘 살리는 듯한 노련함도 보인다.

    파시엔시아의 기존 펜선은 다른 편집자들도 감탄할 정도로 괜찮았는데, 이번 느낌은 그것을 또 뛰어넘고 있다.

    그래서일까.

    전체적인 그림이 더 안정감을 찾은 느낌이다. 덕분에 장면이 더 눈에 잘 들어온다.

    거기다 스토리도 점점 더 재미있어지고 있다.

    계속 발전하고 있다.

    담당자로서 뿌듯함이 밀려왔다.

    그런데 그때 편집부가 소란스러워졌다.

    “······?”

    원고를 내려놓고 머리를 들자 누군가 편집부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하하, 그래. 오랜만이요.”

    들어오면서 넉살좋게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

    바로 키도였다.

    “어, 키도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직원 중 한명이 키도에게 묻자 그가 웃으며 대답한다.

    “아, 뭐. 5주 연속 1위라고 해서 기념패를 준다기에 받으러 왔소이다.”

    “바쁘시면 담당이 직접 가져다 드렸을 텐데.”

    “아니지. 이런 건 내가 직접 받아야 하지 않겠소이까.”

    “아, 그러시군요.”

    그렇게 말하며 직원이 키도와 같이 온 담당인 테고시를 쳐다본다. 그러자 테고시는 곧 어깨를 으쓱하며 어색하게 웃을 뿐이다.

    아마도 직접 받으면서 1위라는 기분을 만끽하려 그러는 것임을 모두 눈치 챘다.

    그때 키도가 지로를 알아보고 다가갔다.

    “아, 파시엔시아 담당이시군.”

    “네. 안녕하세요. 키도 선생님.”

    “반갑소.”

    그렇게 웃더니 그의 책상 앞에 있는 원고를 발견하고는 호기심을 보인다.

    “아, 그거······.”

    “죄송합니다만, 이건······.”

    “거, 스토리를 훔쳐갈 것도 아닌데 좀 보면 어떻소이까. 라이벌로서 잠시만.”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쭉 내밀어 원고를 슬쩍 본다.

    지로가 그런 키도의 행동에 어쩔 수 없다는 듯 슬쩍 물러난다. 조금 본다고 해서 문제될 것이야 있을까싶긴 하다.

    그런데 곧 키도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서둘러 원고를 덥석 집어 들었다.

    “엇! 키도 선생님!”

    지로가 놀라 소리쳤지만 키도는 원고를 든 채로 부르르 떨기만 했다.

    “······!”

    너무 격하게 떨어대는 그의 손을 보니 점점 불안해진다. 근처에 있던 직원들도 그런 키도를 보며 놀란 눈으로 수군거렸다.

    “어어, 저러다 원고 찢는 거 아니야?”

    “키도 선생님 화나신 거 같은데.”

    “저거 위험한데.”

    그 이야기를 들으니 더 불안해진다.

    그 순간 부르르 떨던 키도가 원고를 다시 책상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나, 이만 돌아가 봐야겠소!”

    “네?”

    그때 담당이 소리쳤다.

    “선생님, 상패는요?”

    “그건 자네가 알아서 하게. 지금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들어왔던 길로 다시 서둘러 나간다.

    그 모습을 본 담당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딴 거라니······.”

    < 정신 차려! (1) <4권 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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