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98화 (98/425)
  • < 해적 외다리 실버 (4) >

    실버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계속 나와 이대봉을 번갈아본다. 그리고는 곧바로 곁에 놓인 물주전자를 들이킨다.

    “욱.”

    들이킨 물에 이상이 있는지 실버는 창가로 기어가서는 서둘러 물을 뱉더니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콜록! 콜록!”

    기침이 진정되는 모양인지 곧 입가를 닦아내고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젠장, 보리차가 맛이 갔네.”

    그 모습을 본 이대봉이 혀를 찼다.

    “쯧쯧, 그러니까 평소 자주 끓이라고 했잖아. 바보도 아니고, 왜 그래?”

    “시끄럽다, 이 엉큼한 놈!”

    “뭐하는 거야? 내가 왜 엉큼해? 내가 넌 줄 알아? 그리고 도대체 엉큼하다는 근거가 뭐니?”

    “평소 관심도 없던 주간 히어로를 매번 구해왔잖아. 솔직히 좀 이상하긴 했었는데, 결국 이유가 있었던 거군.”

    그 말에 움찔거렸지만 곧 얼굴을 바짝 쳐들며 말했다.

    “······그거랑 엉큼한 거랑 무슨 관계야?”

    “너, 이런 날이 올 거라고 계산하고 그런 거 아냐? 어? 그런 네 녀석이 엉큼한 게 아니면, 도대체 뭐야?”

    “야 이, 미친놈아. 단어를 쓰려면 좀 제대로 써. 거기서 엉큼하다는 게 어울리니?”

    “어찌되었건!”

    “어휴, 내가 정말······. 그림만 그리는 저 바보 같은 인간.”

    “그래 난 너처럼 모든 것을 계산하고 살지는 않으니까.”

    “어떻게 모든 걸 계산해? 이럴 때만 날 이상한 천재로 몰고 가더라.”

    생각해보니 놀랍다. 정말로 오늘 같은 일은 계산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대봉이라면 충분히 저런 생각을 했을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이런 내 생각을 눈치 챈 것일까. 나를 보며 이대봉이 미간을 찌푸린다.

    “설마, 윤환이 너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난 곧바로 이대봉의 질문을 무시하고 실버에게 물었다.

    “어때, 형? 파시엔시아를 맡아 줄래?”

    “야, 그거 내 말에 대한 긍정이지?”

    이대봉의 말을 억지로 무시하며 실버를 바라봤다. 그랬더니 그가 콧등을 긁으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보인다.

    역시 싫은 걸까.

    “저기······, 지금 내 상태가 이래서 한동안 출퇴근은 어려울 텐데.”

    기브스를 한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며 말한다.

    휴, 그 문제였냐?

    “한동안 화실에서 생활해도 돼. 쓰지 않는 조그마한 빈방이 있으니까. 임시로 쓰기엔 나쁘지 않을 거야.”

    “아, 그렇다면 다행이지.”

    그렇게 말하며 크게 웃는다.

    그런 실버를 보며 이대봉이 ‘이런 한심한 인간’이라 중얼거리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

    주간 히어로 편집장 스도가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10만부가 그새 완판이 되었다고?”

    “네. 도쿄 시내 쪽에 배포된 책들은 진작 동이 났구요. 그 외 지역도 몇 곳 빼놓고는 책이 없대요.”

    지로의 대답에 여전히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 앞에 있는 미니 달력을 살핀다.

    “도대체 며칠이 걸린 거지? 음, 대충 5일 정도인가? 5만부 완판 이후 이후로 추가로 증쇄한 10만부가 5일 만에 다시 완판이라······.”

    “편집장님 추가 증쇄는 얼마나······?”

    지로의 질문에 턱을 만지작거리던 편집장이 입을 열었다.

    “이미, 출판부랑 영업부도 이런 사정은 알고 있을 거니까.”

    그렇게 말하더니 근처에 있던 팀장 두 명을 손으로 가리키며 소리쳤다.

    “거기, 야마다 랑 마키 두 사람, 나랑 같이 출판부로 가자. 그리고 너도 삼사라 담당이니까 같이 가고.”

    “네.”

    그렇게 편집장이 몇 명을 데리고 편집부를 빠져나와 위층으로 올라가려던 그때였다.

    반듯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여직원 하나가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어? 편집장님. 저기.”

    “응?”

    “부사장님 비서 아니에요?”

    “그렇군.”

    여직원이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정중하게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그러자 모두 어정쩡한 자세로 인사를 한다.

    무표정하면서도 도도해 보이는 그녀는 평소에도 접근하기 어려운 기운을 풍긴다.

    그녀는 이내 편집장에게 입을 열었다.

    “편집장님.”

    “아, 그래. 무슨 일이신가?”

    편집장도 그녀를 어려워하긴 마찬가지다.

    “지금 임원회의에 참석해 달라고 하십니다.”

    “그, 그런가. 알겠네. 자네들은 먼저 가있어. 회의실에 들렀다가 금방 갈 테니까.”

    “······네.”

    팀장 둘과 지로는 계단을 통해 출판부로 향하고 편집장은 여비서를 따라 엘리베이터를 타고 임원 회의실로 이동했다.

    잠시 후 임원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똑. 똑.

    여비서가 문을 두드리자 회의실 안에서 웅성거리던 소리가 멈춘다. 그리고는 부사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들어와요.”

    곧 여비서가 문을 열고 임원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말했다.

    “모셔왔습니다.”

    “어, 그래. 수고했네.”

    “그럼.”

    비서가 다시 인사를 하고 물러서자 문 안으로 편집장이 들어갔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평소 임원회의와는 전혀 다른 공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사정이야 어쨌건 편집장은 공손히 인사를 했다. 그러자 한쪽에서 부사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스도 편집장. 자, 이쪽으로 와서 앉도록 하게.”

    “네.”

    부사장의 권유를 받고 의자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 순간 묘하면서도 강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중앙 상석에 있는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시선

    그쪽으로 걸어가며 힐끔 쳐다보니, 평소 임원회의엔 잘 참석하지 않던 사람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아차리고 나자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

    바로 미쯔다쇼텐의 실질적 주인 미쯔다 히로유키 사장이었다.

    전대 사장의 둘째 아들로, 형을 밀어내고 사장을 차지한 남자다. 평소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도 회사에선 꽤 유명한 편이다.

    그렇게 세상천지 무서울 것 없이 날뛰는 전무도 그의 앞에서 만큼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얌전하기만 하다.

    듣기로는 히로유키 사장의 처남이라고 하지만, 회사에서 만큼은 그런 티를 전혀 내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튼 몇 번 먼발치에서 본적은 있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적은 처음이다.

    특히나 저 사람이 자신을 주목하는 건 더더욱 그렇다.

    편집장이 자리를 잡고 앉자 사장이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더니 한마디 툭 던진다.

    “그쪽이 소년 히어로 편집장?”

    그 말에 편집장이 자리에서 앉으려다 벌떡 일어났다.

    “넵!”

    “아아, 너무 그렇게 경직된 자세로 말하지 말게. 보는 사람이 부담스러우니까. 누가 보면 여기가 군대인줄 알겠어.”

    “아, 네. 아, 죄송합니다.”

    하지만 말과 달리 몸이 쉽게 풀리지는 않는다. 그런 모습을 보던 사장이 오른손으로 턱을 괴며 빙긋 웃었다.

    “그래, 방금 보고받기로는 신인만화가 한명의 작품이 짧은 시간 만에 15만부를 팔았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 말에 머리를 끄덕이더니 옆에 있던 부사장에게 물었다.

    “며칠 만에 15만부랬지?”

    “5만부를 하루만에, 그리고 다시 증쇄하고 5일 만에 10만부를 완판 됐다고 합니다.”

    “오, 대단하군, 대단해.”

    그렇게 말하더니 이번엔 다시 편집장을 바라봤다.

    “듣자하니 신인이 한국인이라고 하던데.”

    “네.”

    “알아보니까 그 신인에게 제법 경비가 많이 지출되었더군. 대부분 항공교통비였지만.”

    그 말에 편집장이 놀란 얼굴로 머리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건······.”

    “아아, 질책하자는 말이 아니니까. 아무튼 그 때문에 임원회의에서도 말이 좀 있었던 모양이고.”

    히로유키 사장이 그렇게 말하며 전무 쪽을 슬쩍 돌아보았다. 그러자 전무가 눈치를 슬쩍 보더니 시선을 피한다.

    그 모습을 보고는 다시 시선을 편집장에게 옮긴다.

    “자네도 참 대단하구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까지 한국인을 여기서 만화가로 데뷔시키다니. 그래도 이렇게 크게 성공시켰으니,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지만. 그래도 회사입장에서는 좀 무모해 보이기는 했어.”

    사장의 말에 전무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한마디 끼어들었다.

    “매형, 그래서 제가······.”

    하지만 사장이 슬쩍 그를 돌아보며 혀를 차자 전무가 움찔거리더니 머리를 푹 숙인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아무튼 그 때문에 제가······.”

    “내 말 자르지 말게.”

    “아, 죄송합니다.”

    잠시 그를 바라보던 사장이 다시 편집장에서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런 뚝심 덕분에 그런 만화가도 얻은 거겠지. 요즘 같이 인재가 필요한 세상에 국적 따위는 중요하지 않지. 그리고 요즘 소년 히어로에 그 두

    작품 뭐였지?”

    “진심의 남자랑 파시엔시아입니다.”

    “아, 그래 그거. 어린 내 아들놈도 파시엔시아 그거 좋아하던데. 만날 다른 잡지사 꺼만 보더니 처음으로 우리 잡지에 나오는 만화를 좋아하더라고. 이

    런 말하면 좀 그렇지만, 아비로서 좀 뿌듯하더군.”

    그렇게 말하며 기분 좋게 웃는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임원들도 그를 따라 웃었다.

    “아무튼 그런 작품들도 연재를 시작해서 잡지 판매부수도 올라갔다니, 이거 복이 겹쳤군.”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오카다 전무.”

    갑작스런 사장의 말에 전무가 몸을 꼿꼿이 세우며 대답했다.

    “아, 넷! 사장님!”

    “자네, 편집장이랑 무슨 내기 같은 걸 걸었다며?”

    그 말에 전무가 화들짝 놀랐다.

    “아, 그게······. 내기는 아니고, 그냥 재미로.”

    “그래. 그 재미로 편집장이 지면 뭐하려고 했는데?”

    “네? 뭐, 뭘 하긴요. 그냥. 뭐. 하하.”

    전무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으며 웃다가 자신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사장의 시선에 움찔거리더니 다시 입을 닫는다.

    “10만부라고 했다며?”

    사장의 질문에 전무가 풀 죽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15만부면 어쨌건 편집장이 이긴 거네.”

    사장의 말에 전무가 쩔쩔매며 말했다.

    “······그러니까, 그게 절대로 내기 같은 게 아니라······.”

    “전무, 자네는 뭘 걸었지?”

    “······네?”

    “내기라면 공정하게 해야지. 자네도 뭔가를 걸었을 거 아니야.”

    “·······아, 아무것도.”

    “뭐야? 공정치 못한 내기잖아.”

    “아니, 그러니까 절대 내기 같은 게······.”

    “자네 성격에 편집장이 졌으면 보나마나 편집장에서 물러나라고 했을 거니까.”

    그 말에 놀란 전무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이고, 사장님. 절대 그럴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사장은 전무의 말을 무시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자네도, 그 자리를 걸고······.”

    “사, 사장님. 용서해주세요.”

    전무가 머리를 푹 숙였다.

    그런 전무를 사장이 곁눈질했다.

    “한심하기는······. 그래도 명색이 전무라는 인간이 기껏 한다는 짓이······.”

    사장이 혀를 차자 전무는 머리를 푹 숙인채로 그냥 있을 뿐이었다.

    물론 전무를 따르던 다른 이사들도 서로 눈치를 보며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그런 임원들을 쭉 한번 보던 사장이 다시 편집장을 바라봤다.

    “어쨌건 편집장은 수고했어. 자네 같은 사람들이 우리 출판사에서 일 해줘서 개인적으로도 고맙게 생각하네.”

    “아, 아닙니다. 사장님. 오히려 제가 영광입니다.”

    “부사장.”

    “네.”

    “자네는 편집부에 금일봉 돌리고. 물론 내 이름으로 해서.”

    “네. 사장님.”

    “너, 아니. 오카다 전무.”

    “넵! 사, 사장님.”

    “자네도 이번에 수고한 다른 편집부랑 다른 부서에 회식비 좀 돌려.”

    그 말에 전무가 눈치를 보며 자그맣게 말했다.

    “이것도 그럼······ 사장님 이름으로······.”

    “그건, 니 돈으로 하고.”

    “네?”

    “왜. 불만이라도?”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하.”

    식은땀을 흘리며 웃는 전무를 보고 사장이 만족한 듯 머리를 끄덕이며 웃었다.

    “좋아.”

    < 해적 외다리 실버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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