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사라, 바람을 타다 (5) >
“끄응.”
키도가 새롭게 작성중인 네임(콘티)을 무섭게 노려보며 끙끙댄다.
최근 파시엔시아의 무서운 추격으로 네임을 만드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지고 있던 탓이다. 전체적인 이야기야 이윤환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세세한 에
피소드는 역시 만화가인 자신이 직접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건 다른 사람의 감성으로 대신할 수 없는 법이다.
네임작업은 도대체가 늘 하면서도 쉽게 적응하기 힘들다는 걸 수도 없이 느낀다. 하지만 스토리를 직접 만드는 만화가에게는 숙명 같은 일. 결국 즐길
수밖에 없다.
혼자 네임에 있는 대사를 중얼거리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하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으음. 역시 이럴 땐 남자를 흔드는 초미녀가 등장해서······. 음······ 초미녀가 핵심이겠군.”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다 곧바로 머리를 번쩍 들고는 소리쳤다.
“이보게, 마에다 군!”
“네?”
한참 톤 깎기에 열중하던 마에다 준페이가 화들짝 놀라며 대답했다.
“너, 여자에게 인기 많다고 했지?”
“제, 제가요? 서, 설마요.”
마에다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돌아본다. 하지만 누구도 그와 눈을 마주치려하지 않았다. 어쨌건 오늘은 그가 키도 선생의 제물이 될 것이다.
그의 희생으로 다른 사람들은 편안한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된다.
모두 마에다에게 묵념을.
어시들이 모두 머리를 더 깊이 처박는다.
“자네, 전에 분명 여자에게 인기라고 했잖은가.”
당황스럽다.
자신은 결코 그런 말을 한 기억이 없다.
저건 그냥 키도 선생의 망상에서 나온 생각일 뿐이다.
“그러니까, 빨리 한번 해보게.”
“뭐, 뭘요?”
“뭐긴, 여자들이 멋진 남자에게 하는 행동이랑 대사 말이야.”
황당하다.
저런 걸 자신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만약 그랬다면 지금 그가 애인도 없이 이런 곳에서 몇날며칠을 시달리며 그림이나 그리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화를 그리는 사람은 여자에게 인기가 없으니까.
“자자, 일단 이쪽으로 와 보게.”
그 말에 머리를 숙이고 열심히 원고 작업 중이던 어시들이 쿡쿡거리며 어깨를 들썩거린다.
마에다는 오만 상을 다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키도 앞으로 갔다.
“자자 내가 치바 료야. 자네는 완전 청순 미소녀. 알겠지?”
“······네?”
“네는 무슨 이야기에 집중해. 알겠어?”
“네.”
마에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머리를 힘없이 끄덕인다. 모든 것을 다 포기한 사람의 모습이다.
“자자, 다시 집중해봐. 내가 치바 료야. 그런 치바 료를 네가 꼬시는 거야. 요염함으로 말이지.”
“요, 요염······. 아까는 분명 청순하다고······.”
“청순하면서 요염할 수도 있지.”
“그러니까 선생님 그 두 개가 애초에 양립한다는 것이······.”
그때였다.
“여보. 간식 드시고 하세요.”
키도의 부인이 화실로 들어오며 특유의 미소를 지은 채 말한다.
“아. 음. 할 수 없지. 일단 여기까지 하자고.”
그 순간 마에다가 살았다는 듯 한숨을 푹 쉬더니 서둘러 자기 자리로 간다. 그러자 화실로 들어왔던 키도의 부인이 돌면서 자리마다 간식이 들어있는
접시를 올려준다. 집에서 직접 만든 군만두다.
어시들의 자리에 일일이 접시를 올려주고 마지막으로 키도의 자리에 접시를 올리다 뭔가 떠올랐는지 시계를 쳐다본다.
“어머, 여보. 오늘 오후에 서점에 가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아, 참. 잊고 있었군. 그래 가 봐야지.”
“선생님. 서점에 무슨 일이신데요?”
“오늘 써니와 유난의 첫 번째 단행본이 나오는 날이잖느냐.”
만두를 우물거리더니 노무라가 손바닥을 짝 하고 쳤다.
“아, 오늘 삼사라 단행본 나오는 날이군요. 저도 그거 한권 살 생각인데.”
“저도요.”
“뭐야? 너희들도 살 생각이었냐?”
“그럼요. 그림 그리는 애들에게는 교본 같은 작품이에요. 연출, 배경. 정말 배울게 많아요.”
“오. 그래? 과연 그런 경지의 그림이었군.”
“네. 어시들 중에선 써니 선생님 한번 만나보는 게 소원인 놈도 있어요.”
“오, 그건 몰랐네.”
“그런데. 진짜 써니 선생님 어떤 분이세요? 선생님 의형제라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 이상은 안 가르쳐 주시니까.”
“그건, 어쩔 수 없다. 편집부 쪽에서도 부탁받은 사항이라 그 이상은 알려줄 수 없다.”
그 말에 어시들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만두를 먹은 뒤 서둘러 키도가 가방을 챙겨들었다.
“오늘은 그것만 마무리하고 일찍 퇴근하도록 해. 며칠 동안 피곤했을 텐데.”
그렇게 말하며 급하게 화실을 나선다.
“다녀오세요. 여보.”
키도의 부인은 평소처럼 밝게 웃으며 남편을 배웅했다.
그리고 키도의 부인이 거실 쪽으로 사라지자 모두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투덜거린다.
“오늘 넘겨준 원고 완성하려면 한참 걸릴 텐데.”
“선생님은 진짜······.”
어시 한명이 그렇게 말하며 자신 앞에 놓여있는 원고를 내려다본다.
복잡한 연필데생의 원고가 눈앞에 놓여있다.
“이게 어딜 봐서 빨리 퇴근할 원고냐고요.”
모두 비슷한 소리를 중얼거리면 한숨을 푹 쉰다.
화실을 나선 키도가 자신이 아끼는 86을 몰고 시내로 나갔다.
모처럼 간만에 시내 드라이브를 하니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최근 진심의 남자가 소년 히어로에서 계속 1위를 지키고 있지만, 파시엔시아의 추격과 뒤늦게 상위권에 진출한 삼사라 덕분에 늘 긴장상태라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는데 덕분에 기분이 많이 풀어졌다.
어느새 도착한 빅클럽 서점 인근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파킹을 한 뒤 서점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서점 입구부터 뭔가 분주하다.
젊은 사람들이 서점을 빠른 걸음으로 들락거리질 않나, 서점 직원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밖에서 뭔가를 기다리는지 계속 도로 쪽을 주시하고 있다.
“······?”
그런데 그때 직원 중 한명이 소리쳤다.
“저기 오고 있어요!”
“빨리 준비해!”
사람들이 우르르 나오더니 창고주변에 모여든다. 곧 트럭하나가 창고 쪽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이 트럭에게 몰려들었다.
키도는 서점에 들어가려다 말고 그 광경에 호기심이 생겨 계속 쳐다보았다.
트럭이 완전히 멈추고 트럭기사가 내려 트럭적재함 위로 올라가 책 묶음을 내려 직원들에게 하나씩 내려주자 직원들은 그것을 받아서는 서둘러 서점
으로 달려 들어간다.
그런데 슬쩍 보니 같은 책처럼 보인다.
그때 근처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오늘 벌써 몇 번째래?”
“세 번이었나?”
“네 번째야.”
“와, 대단하네. 무슨 만화책이 하루 만에 이렇게 많이 팔려?”
“듣기론 책을 많이 찍지 않았나보더라. 그래서 이 서점에서 서둘러 책들을 보내달라고 했다는 모양이야.”
“나 참, 출판사 사람들 무슨 일을 이렇게 바보처럼 하는 건지. 덕분에 우리가 죽어나잖아.”
“뭐, 점장은 매출 오른다고 좋아 죽던데 뭐.”
그 이야기를 들은 키도가 호기심어린 시선으로 책을 들고 뛰어올라가는 직원들을 보며 피식 웃었다.
요즘은 대단한 만화들이 많긴 많은 모양이었다.
초판부수 200만부를 최초로 넘긴 닥터슬럼프라는 만화도 있고, 다카하시 루미코가 1억 5천만 엔이라는 엄청난 세금을 작년에 납부해 만화가 세금납
부 1위가 됐다는 얘기도 들었었다.
자신이야 벌이가 나쁜 편은 아니어도 어디 그런 만화가들에 비할 수야 있을까.
일본엔 대단한 만화가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거진이나, 점프 만화인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그들을 따라 느긋한 걸음으로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곧 자신이 원하는 코믹코너 쪽으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줄을 길게
선 모습이 보인다.
“······?”
잠시 머리를 갸웃거렸다가 방금 입구에서 일어났던 일을 떠올리며 ‘아하’하며 납득했다. 이들은 바로 직원들이 아까 입구에서 받아가던 그 책들을 사
러온 사람들일 것이다.
자신도 언젠가 저런 인기가 되는 날이 되기 위해서 재가 될 때까지 불태우자며 다짐한다.
그리고는 그들을 지나 드디어 코믹 코너에 도달했다.
“그래, 어디쯤에 있으려나?”
만화코너를 이리저리 돌며 새로 나온 만화책들을 살핀다.
거기서 ‘인간흉기’라는 만화를 발견했다. 현재 주간 만화 고라쿠에 연재중인 성인만화다.
“20권이 나왔네.”
책을 집어 든다.
주인공이 점점 괴이하게 변해가는 중이었지만, ‘거인의 별’, ‘내일의 죠’, ‘타이거 마스크’의 스토리를 쓴 ‘카지와라 잇키’의 작품이라 보고 있을 뿐이다.
카지와라 선생이 점점 괴상한 스토리를 써가는 게 마음이 아프지만, 뭐 한번 팬은 영원한 팬이니까.
작가로서는 존경하지만, 인간적으로는 이래저래 문제를 많이 일으키고 있는 양반이라 별로라는 생각에 잠시 얼굴을 찌푸린다.
또 무엇을 볼까 이리저리 구경을 다닌다.
그러다 주간소년 히어로의 단행본들이 주로 배치되는 구석진 자리로 이동했다. 주간소년 히어로야 늘 다른 잡지사에 밀려 그런 곳에 비치되고 있어서
언제부턴가 지정석처럼 된 곳이다. 자신의 대표작이었던 ‘불타라 마구’도 그곳에 배치되었었다.
물론 그 자리에선 꽤나 잘 팔리는 만화책이었지만.
“······어? 어디에 있지?”
주변을 아무리 돌아봐도 삼사라는 보이지 않는다.
“분명 오늘이라고 하던데. 날짜를 잘 못 알았나?”
하기야, 출시일이 어긋나는 게 특별한 일도 아니니까.
그래도 혹시나 싶어 지나가는 여직원을 불렀다.
“네, 손님.”
“삼사라 오늘 나왔소이까?”
“삼사라요?”
여직원이 놀라는 눈치다.
하긴 삼사라의 인지도가 떨어지니 여직원이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니까, 만화가는······.”
“네. 써니 작가님의 삼사라 맞죠?”
“오, 역시 대형서점의 직원이라 다르군. 그렇소. 바로 그 삼사라······.”
“죄송하지만 손님, 아무래도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여직원의 말이 납득되지 않는다.
힘들다니 뭐가 말인가?
곧바로 여직원이 어디론가 손을 뻗어 가리킨다.
그녀의 손 끝 방향엔 아까 지나오면서 보았던 긴 인파의 줄이었다.
그곳엔 여직원 하나가 소리치는 모습이 보인다.
“죄송합니다. 지금 남은 건 200권이 전부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줄을 셀 테니까 200명 이후에 계신 분들은 죄송하지만 며칠 후에 오세요. 그리고 200
권은 한사람에게 한권씩만 판매합니다.”
그 말에 200명 이후의 사람들이 짜증을 부린다.
“아니, 일곱 시간을 기다렸는데, 뭐야 진짜!”
“으아악!”
“젠자앙!”
200명 이내도 나름 불만이 있다.
“1인당 1권밖에 살수 없어요?”
“아, 젠장. 나도 새벽에 줄 설걸. 친구 놈들은 두 권 이상씩 다 샀다고 하던데.”
“아 후. 할 수 없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던 키도가 여직원에게 물었다.
“삼사라랑 저 사람들이랑 무슨 관계가 있다는 거요?”
“어머? 모르셨어요? 저기 저 분들 삼사라 구입을 위해 저렇게 줄을 서신 거예요. 인근 서점에선 이미 삼사라가 모조리 완판 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나
마 우리 서점이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서 인쇄소에 있던 마지막 재고까지 싹 다 가져온 거고요. 듣기론 불량 인쇄된 책도 사겠다는 분들이 계서서 그거라
도 있나 연락중이라는데, 뭐.”
그 말을 들은 키도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줄의 가장 앞부분 자리 쪽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그곳엔 아까 입구에서 봤던 책, 바로 ‘삼사라’가 있
었고. 그것을 한 권씩 집어가며 계산하는 사람들의 모습 있었다.
“······.”
순간 할 말을 잃은 그가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 삼사라, 바람을 타다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