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89화 (89/425)

< 1위 쟁탈전 (8) >

“저번에 5표차이라고 하지 않았나?”

“맞아.”

“그런데 이번엔 103표나 차이난다고?”

“자 봐. 그렇게 적혀 있잖아.”

결과표를 들이밀며 확인시켜준다.

사람들이 표를 확인하며 머리를 끄덕인다.

“이번엔 솔직히 진심의 남자가 좀 쎄긴 했지. 이제까지는 주인공인 키시 야마토만으로는 좀 부족한 느낌이었는데, 꽃미남 치바 료가 등장하면서 완전

히 새로운 만화로 탈바꿈한 느낌이라니까.”

“맞아. 그리고 이번에 키도 선생님 팬레터 엄청나게 늘었다며?”

“그래. 이제까지 남자애들 팬레터가 주류였는데, 여학생 팬레터가 급증했다고 하더라. 단 한편 등장한 것만으로 이정도 효과라니. 어마어마한 거지. 테

고시가 팬레터를 커다란 박스에 담아 왔더라니까.”

“하긴, 남자가 봐도 치바 료는 묘한 매력이 있으니까. 거기다 키도 선생님도 이번에 료의 얼굴에 공을 많이 들인 것 같고.”

“이젠 완벽하게 1위로 자리 잡은 느낌이야.”

직원들의 수군거림에 가장 기분 좋은 사람은 역시 키도의 담당인 테고시 케이였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두 개의 원고 식자작업에 여념이 없는 파시엔

시아 담당인 지로를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주먹을 불끈 쥔다.

***

- 핫핫핫, 어떠냐! 유난! 표차이가 좀 나지 않느냐?

이 인간이 또 갑자기 전화를 해서는 이렇게 자랑 질이다.

최근 분위기를 탄 건지는 모르겠지만, 툭하면 전화를 걸어 속을 긁고 있다.

하지만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 목소리에 신경 쓴다.

“난 모르겠는데?”

- 103표라고, 103표. 확 벌어졌잖아. 전에 다섯 표에서 거의 100표 정도나 더 벌어진 거라고.

“전체 판매량에 비하면 103표야 뭐.

- 어허, 유난. 넌 잘 모르는 모양인데. 103표 차이는 엄청 크다고. 중간에 103명이라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103명이면 할 수 있는 일이 엄청나게

많고.

“알아, 적지 않은 숫자라는 건, 그 정도면 전쟁도 치르겠지. 숫자로만 따지면 중대급이니까.”

- 오,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겠군. 중대가 어떤 규모인지는 모르겠지만.

아, 잊고 있었다. 키도는 일본인이라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이럴 땐 부럽구나.

“한국에서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알게 돼.”

- 그래. 유난은 군대를 경험했다고 했지?

“그렇지 뭐. 육방이긴 하지만.”

- 육방? 그게 무엇이냐? 특수부대인가?

특수부대라는 말에 웃음이 터질 뻔 했다.

“그런 게 있어.”

생각해보니 상당히 억울하다.

원래 난 전방에서 제대로 기간을 다 채웠는데, 본체 녀석이 육방이라, 이곳에선 방위병 출신 취급을 받아야 하니까.

뭐. 일본인인 키도에겐 말해도 이해 못하겠지만.

- 아, 그리고 팬레터도 받았다. 그것도 많이.

이젠 팬레터 자랑인가.

“팬레터라면 나도 가끔씩 이지만 받고 있어.”

진짜 가끔이다.

파시엔시아 쪽은 아직 연재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예 없었고, 삼사라 쪽은 간혹 오기는 하는데, 그나마도 열성적인 젊은 남자들이 대부분이

다.

작가가 써니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장르의 특성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 여자 팬레터가 왔다. 그것도 왕창. 하하핫.

“여자 팬레터?”

젠장, 이건 진짜 부럽네.

- 그래. 이전엔 대부분 팬레터가 남자였는데 말이지. ‘선생님의 만화는 진정한 남자만화입니다!’, ‘남자의 로망을 제대로 표현해 주시는군요!’ 뭐 이런

내용이 대부분 이었다고.

“역시 치바 료 때문이겠네. 그 꽃미남 악당.”

- 아하하, 너도 충실하게 읽고 있었구나.

키도의 만화치고는 유별나게 꽃미남이라 솔직히 좀 놀라고 있었다.

그의 그림체가 강렬한 스타일이라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꽃미남을 그리는 재주도 있었던 모양이다.

정말 카운터펀치를 제대로 맞은 기분이다.

- 자자, 승부는 계속 되고 있으니 포기하지는 말라고.

“포기한적 없는뎁쇼.”

- 하하, 그래야지. 그럼 다음에 또 연락하자고.

“이거, 국제전화야. 옆집 전화처럼 걸지 마.”

- 이깟 국제전화 요금 따위에 이 형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말거라. 아무튼 잘 지내거라!

유치한 대화였다.

전화를 끊고 나서는 피식 웃었다.

키도가 이렇게나 즐거워하고 있으니 나도 덩달아 즐거워지는 기분이다.

단순한 사람이긴 하지만, 키도와 대화를 하고 나면 묘하게 에너지를 얻는 기분이다. 좀 길어지면 오히려 기를 빨리는 기분이 들 때도 있긴 하지만.

“그래! 돌려! 돌려!”

“······?”

“조금만! 더!”

“악! 안 돼!”

화실 TV앞에서 사람들이 모여 소리를 지르고 있다.

그들이 보고 있는 건 레슬링이다.

지금 이 순간, 남녀 할 것 없이 레슬링에 저렇게 열광하는 이유는 지금 보고 있는 경기가 바로 금메달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사실 며칠 전에 올림픽이 시작되었다.

1984년 미국 LA올림픽.

덕분에 요즘엔 길거리 전파사 앞에선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올림픽이라는 것이 사실 내게는 그리 크게 와 닿지 않지만, 이 시절의 사람들에겐 아주 특별하다.

- 62kg급 결승전. 자, 우리의 김원기 선수, 잘 싸워주고 있습니다! 점수는 3대3 동점. 시간은 흐르고 있습니다!

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도 잔뜩 흥분해 소리를 지르고 있다. 마치 이 한판에 지구의 운명이라도 걸려있는 것처럼 처절하기까지 하다.

TV를 보는 화실식구들도 모두 흥분했는지 잔뜩 상기된 얼굴이다.

솔직히 지금 이 순간 나는 경기보다 그것을 보는 그들의 얼굴에 더 흥미를 느끼고 있다.

지금은 즐길 거리가 지극히 적은 시대, 그러다보니 이렇게 올림픽처럼 큰 스포츠행사는 굉장한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닐까.

특히나 지금 경기는 올림픽 금메달 결정전이 있는 레슬링경기라 더욱 그렇겠지.

듣기론 76년에 레슬링에서 받은 금메달이 한국최초이자 유일한 올림픽 금메달이라고 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번 올림픽에서의 금메달 염원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할 것이다.

뭐, 나야 이제껏 하계건 동계건 금메달을 목에 건 한국인의 모습이 낯설지 않지만.

“3초! 2초! 1초!”

“끝났다. 판정! 판정!”

- 62kg급 그레코로망형, 김원기 금메달! 금메달입니다!

“와아아! 이겼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화실 내에서만이 아니다.

바깥에서도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뭔가 아쉽다.

나도 이런 순간만큼은 이들과 함께 승리의 기쁨은 누리고 싶지만 그런 흥분된 감정이 생기지는 않는다.

조금은 혼자 동떨어진 기분이랄까.

“아하하! 금메달이야, 금메달!”

박상식이 날 붙들고 좋아라 한다.

어시들도 자기들끼리 부둥켜안고 난리다.

경희도 선희를 붙들고 소리를 지르고 있고.

이 순간만큼은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된 것 같다.

보기 좋은 광경이다.

***

며칠 후.

소년 히어로 편집부내에선 새롭게 신간잡지가 나오자마자 모두 파시엔시아와 진심에 남자에 대한 이야기로 열기가 뜨거웠다.

최근 분위기는 오로지 두 작품 중 누가 1위를 차지하느냐에 쏠려 있었다.

“와, 키도 선생님 이번에도 좋은데? 치바 료의 카리스마도 좋고.”

“그럼요. 이번에 키도 선생님, 치바 료 캐릭터에 공을 많이 들이셨다고 하셨어요. 자세히 보면 그림체도 료는 기존 캐릭터와도 다르죠. 아, 참. 저는 키

도 선생님께 가봐야 해서.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담당인 테고시가 자랑하듯 떠들더니 손목시계를 확인하고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나간다.

테고시가 사무실을 나가고 나자 곧장 누군가 소리쳤다.

“어? 이번 파시엔시아. 진짜 재미있는데?”

그 말에 다른 직원들도 서둘러 진심의 남자를 읽자마자 자연스럽게 다음 페이지로 이어지는 파시엔시아에 몰두했다. 그리고는 몇 사람이 감탄하며 말

했다.

“와, 켄토가 최연소 국가대표가 되는 이야기로 흘러가면서 자연스럽게 월드컵과 연결이 되네? 이번 건 정말 재밌다.”

“맞아. 스페인 리그라는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다가, 월드컵 이야기가 나오니까 뭔가 막 와 닿는다.”

“그러게. 우리 일본이야 월드컵에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으니까. 뭔가 간절함 때문일까.”

“아참, 지금 열리는 올림픽 축구 브라질 경기 언제야?”

“7월 30일요. 그날 서독 경기도 있어요.”

“같은 날이야? 시간 확인해 봐야겠다.”

갑자기 축구이야기로 화제가 넘어가자 누군가 다시 원래의 이야기로 돌린다.

“어쨌건, 이번 화는 텐겐 선생님이 노린 것 같은데?”

“와, 진심의 남자랑 파시엔시아의 싸움이 너무 재미있는데?”

“우리 선생님도 이런 레이스에 참가하면 얼마나 좋을까.”

“야, 그쪽은 요즘 성적이 위험해 보이던데.”

“아휴, 나도 요즘 이것 때문에 밥이 안 넘어간다.”

말하던 직원의 표정이 갑자기 침울해졌다.

*

“안녕하세요. 선생님.”

“이보게! 테고시!”

테고시가 화실에 들어서자마자 키도가 그를 불렀다.

“네. 선생님.”

테고시가 다가가자 키도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번에 책 나왔지? 그거 어서 줘 보게.”

“아, 네.”

테고시가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주간소년 히어로 신간을 꺼낸다. 오늘 편집부로 나온 신간으로 아직 외부로 뿌려지기 전의 따끈따끈한 상태다.

담당편집자들은 그 책을 먼저 만화가들에게 가져다주는 것이다.

그 책을 받아든 키도가 서둘러 책을 펼친다. 당연히 그의 관심은 이번에 나온 파시엔시아다.

그리고 파시엔시아를 다 읽고 나자 그의 표정이 굳어져버렸다.

“왜? 그러세요?”

“이번 편······, 대단하군.”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묘한 이질감을 느껴졌다.

“네? 뭐가요?”

그런데 갑자기 키도가 묘한 표정으로 기괴하게 웃기 시작했다.

마치 만화 속 악당 같은 표정으로.

“크크크. 재밌군 재밌어. 이렇게 나와 줘야 할 맛이 나지.”

그렇게 말하며 점점 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어시들의 얼굴이 시퍼렇게 변해갔다. 저 표정 뒤에 나올 그의 말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어시의 예상이 현실로 변하려 했다.

미친 듯 웃던 키도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난바군! 지금 그리고 있는······.”

“덮쳐!”

“읍!”

갑자기 어시들이 키도에게 달려들어 그의 입을 막고 몸을 붙들었다.

“무카이! 빨리 너도 붙들어! 선생님의 폭주를 막아야 한다!”

“넵!”

“읍, 이······ 이게 무슨, 읍! 읍!”

“더 꽉 붙들어!”

“조금 있으면 제 정신으로 돌아오실 테니까, 그때까지 참아!”

“놔, 놔라! 이놈들아! 읍! 읍!”

키도에게 여섯 명의 어시들이 모조리 달라붙어 그를 완벽하게 봉쇄한다.

키도가 이마에 핏대를 올리며 몸부림 쳐 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담당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 쟁반을 든 키도의 부인이 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평소처럼 평온한 모습으로 웃으며 담당에게 인사했다.

“어머, 테고시 씨. 어서 오세요.”

“아, 사모님. 안녕하세요. 그, 그런데 지금 상황이······.”

“어머, 오늘도 모두 힘이 넘치시는군요. 날씨 덥죠? 아참, 내 정신 좀 봐. 마실 것을 가져다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며 즐거운 듯 호호 거리며 부엌으로 걸어간다.

그 모습을 보던 담당이 다시 난장판으로 변해가는 화실을 돌아보았다.

“이번만은 안 됩니다! 절대로!”

“맞아요! 요즘 저 3kg이나 빠졌어요! 그러니까 이번엔······.”

“무조건 막아! 우리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

< 1위 쟁탈전 (8)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