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88화 (88/425)

< 1위 쟁탈전 (7) >

스토리를 새롭게 수정하는 건 생각보다 큰일이었다.

그나마 전체적인 스토리라인에는 큰 변화가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랄까.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 콘티 서너 편 이상 분량의 수정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선희가 자신이 그리던 데생원고까지 완전히 찢어버린 마당에 오빠라는 놈이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파시엔시아 전체적인 스토리를 다시 검토하며 더 극적인 묘사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솔직히 진심의 남자를 읽으며 상당한 충격을 받은 게 사실이다.

내가 진심의 남자 스토리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밀도가 높아졌다. 그 덕분에 성적이 좋아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난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진심의 남자는 단순히 이야기로만 설명할 수 있는 만화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스토리만 보면 단순한 일상에 과도한 열정의 남자이야기가 합쳐진 만화다. 하지만, 그 평범한 이야기에 작가의 감정이 들어가 생기가 넘치는 이야기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만화가 다시 한 번 업그레이드가 된 것이다.

기존의 키도 작품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가 어떤 식으로든 각성의 단계를 거친 것으로 보인다.

이런 키도의 만화를 이기려면 이쪽도 상응할 정도로 변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리얼 스포츠만으로 상대하기엔 너무 버거운 존재가 되어 버렸으니까.

나 스스로도 파시엔시아의 문제점을 알고 있다.

주인공 중심의 이야기다보니 그 한계가 명확하다는 점이다.

스포츠 만화는 혼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특히나 축구처럼 단체 팀플레이가 중요한 경우는 더더욱 그렇다.

이제는 슬슬 이야기에 변화를 주어야 할 시점이다.

주인공과 상성이 맞을 캐릭터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가장 먼저 떠오른 캐릭터가 있었다.

생각에 빠져 있던 내가 드디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역시, 겁쟁이 조르디와 주인공의 연계 플레이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 볼까?”

“······.”

“······상식이 형?”

“ZZZzzz ZZZzzz."

맞은편에서 콘티 작업을 하던 박상식이 졸고 있다.

시계를 보니 새벽 1시다.

모두 퇴근한 화실에 둘만 남아 스토리 작업에 빠져있었는데 어느새 시간이 이렇게 흘러버렸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웃고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작은 담요하나를 들고 와 졸고 있는 박상식에게 덮어주었다.

피곤에 쩔어 쓰러지듯 잠든 박상식을 보니 쓴웃음이 나온다.

문득 생각해 보니 지금 이 모든 만화에 관련된 인연의 시작이 되었던 사람이 바로 박상식이었구나.

요즘도 누나에게 쩔쩔매는 걸 보면 우습기도하고 측은하기도 하다.

아무튼 지금도 나와 선희의 갑작스런 돌발행동 때문에 박상식도 피해자가 되었음에도 별다른 불만도 없이 같이 해주고 있다.

늘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가 작업 중이던 새 콘티노트를 펼쳐보았다.

요즘엔 박상식의 콘티 퀄리티도 상당하다.

콘티만 죽어라 파니까, 그림도 전에 비해 눈에 확 들어오고 연출도 굉장히 좋아졌다.

늘 선희가 자신의 콘티를 넘어서는 연출을 한다며 투덜대더니, 그래도 나름 열심히 공부 중인 모양이다. 그림만 봐도 그 노력이 보일 정도다.

그때 뭔가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다.

파시엔시아.

아직 주인공은 유소년선수일 뿐이고 어쨌건 이야기 특성상 일본인이다.

그렇다면 일본인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야한다.

그리고 일본인이 염원하는 건 결국 월드컵 자력 진출이다.

그것을 떠올리고 스토리작업에 들어갔다.

***

진심의 남자가 나온 후 그 여파는 엄청났다.

파시엔시아가 무섭게 1위를 추격하며 압박하며 순위를 뒤집을 거라는 모든 이의 예상이 있던 가운데 새롭게 나온 진심의 남자는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남자들의 뜨거운 우정만을 앞세우던 만화였던 만화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새로운 캐릭터의 등장이었는데, 이제껏 거친 선과 거친 외모의 주류이던 만화 속에 놀라울 정도로 잘생긴 미소년 캐릭터가 추가된 것이다.

그런데 이 미소년 캐릭터는 양면성을 가진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분명 그의 사고방식은 위험한 것임에도 그것에 납득되는 언변, 거기다 완벽한 외모까지 추가되자 주인공의 인기를 넘어서는 씬 스틸러가 된 것이다.

분명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면 보고 있음에도 왠지 설득당할 것 같은 카리스마가 돋보이는 캐릭터.

결국 새로운 미소년, 하지만 카리스마가 넘치는 빌런 캐릭터의 등장에 만화의 분위기가 확 바뀌며 이야기의 완성도가 확 올라가 버린 느낌이 든 것이다.

압도적 카리스마를 지닌 캐릭터의 등장 덕분에 이번 화의 파급력이 상당할 것이라는 건 편집부의 모든 사람이 느끼고 있었다.

“와, 이정도면 파시엔시아가 1위를 차지하기엔 힘들겠다.”

“맞아. 파시엔시아가 그동안 무섭게 추격하고 있었는데, 진심의 남자가 완전히 다른 레벨의 이야기를 만들어 버렸으니······.”

“와, 키도 선생님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평소 키도 선생님의 이야기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런 캐릭터가 묘하게 어울리는 것도 신기하네.”

“담당은?”

“지금 그 녀석 엄청 바쁘잖아. 키도 선생님 화실에 요즘 매일같이 영양제 사들고 들락거리는 모양이야.”

“그래?”

“응. 키도 선생님, 완전 불붙었대. 파시엔시아 때문에 원고에 목숨 걸었다고 하더라. 아, 그리고 오늘 어시 두 명 더 데리고 가더라니까.”

“왜?”

“왜긴, 그쪽 어시들 몇 명이 이번 화 작업하면서 몸살이 난 모양이야.”

그 말에 직원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평소에도 키도의 유별난 행동이 화제가 되긴 했지만. 이번 화를 만들 때 있었던 뒷이야기는 정말 황당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그만큼 대단한 작품이 나왔으니, 그건 그거대로 또 존경스럽긴 하지만.

“아참, 안 그래도 작가후기 말이야. 진실이 뭐래? 진짜 키도 선생님이랑 텐겐이 아는 사이야?”

“일단 그렇다고는 하던데, 정확한건 담당인 테고시가 말해주지 않으니 알 수가 없지.”

“그거 신인인 텐겐이 도발한 이야기라는 말도 있던데?”

“나도 처음 그거 봤을 때, 당돌한 신인이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진실이야 모르지. 뭐.”

“어쨌건 덕분에 키도 선생님이 제대로 레벨이 오른 건 사실이니까.”

“그래.”

“와, 부럽다. 담당만화가가 저렇게 열을 올리며 엄청난 작품을 만들어 주니까 테고시도 요즘 힘이 나는 모양인데. 우리 선생님은 벌써 앙케이트에서 위

태위태하니.”

그때 지나가던 편집장이 모여 있는 직원들을 보며 말했다.

“그렇게 투덜거릴 시간에 좀 더 담당 선생님들 서포터 할 생각을 하라고. 푸념만 늘어놓지 말고.”

그 순간 직원들이 후다닥 흩어졌다. 그 모습을 본 편집장이 혀를 쯧 하고 차며 편집실을 빠져나갔다.

어쨌건 그도 이번 파시엔시아와 진심의 남자가 1위 쟁탈전을 벌이는 모습은 즐거운 일이었다. 그동안 잡지가 생겨난 이후로 제대로 라이벌 관계라고 할

만한 작품들이 잡지 내에서 있었던 적이 없었다.

아니, 그런 것을 떠나 이렇게 눈에 띄는 작품도 드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작품이 두 개나 한꺼번에 같은 시기에 출현한 것이다.

편집장은 자신도 모르게 입 꼬리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그렇게 복도를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임원 세 명이 마주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앞에 선 사람은 전무, 그리고 그를 따르는 이사들 두 명이다.

그런데 선두에 섰던 전무가 편집장을 보고는 손을 번쩍 들며 아는 체를 한다.

“여어, 스도 편집장.”

“안녕하십니까, 전무님.”

“아하하, 그래, 그래.”

웃으며 전무가 다가왔다. 그리고는 다른 이사들을 먼저 보내고는 편집장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래. 요즘 분위기가 좋다던데. 어떤가?”

“네. 덕분에 요즘 소년 히어로가 증쇄했습니다.”

“아아 좋은 일이야. 좋은 일. 듣기론 두 작품이 그렇게 인기라며? 그 때문이겠군.”

“그 두 작품 때문만은······.”

“거, 보라구. 대단한 작품을 만드는 일본인은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굳이 한국까지 큰돈을 써 가면서 힘들게 원고를 가져올 필요가 없었다니까. 내가

처음부터 주장하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니까.”

“······.”“아참, 그래 전에 말했던 그 뭐냐 삼······.”

“삼사라 말씀입니까?”

“그래, 그 만화. 그건 요즘 인기가 어떤가?”

은근하게 물어오는 폼이 이미 알고 있다는 눈치다.

“네. 10위 정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흐음. 더 떨어지지도 않고 아직 10위나 유지하고 있나니. 용하긴 하구만.”

“······.”

“자자, 너무 침울한 표정 하지 말라고. 그래도 혹시 모르지 않나. 단행본은 생각보다 잘 팔리게 될지.”

전무가 싱글거리며 이야기 한다.

그때 편집장이 조심스럽게 전무에게 말했다.

“그, 그런데 전무님.”

“응? 왜?”

“전에 전무님이 말씀하신 거 말입니다.”

“응? 뭐?”

짐짓 잘 모르겠다는 시늉을 해 보인다.

정말 몰라서 저러는 걸까. 아니면 편집장이 직접 제 입으로 말하기를 원하는 걸까.

“삼사라 단행본 판매 말입니다. 그거, 판매량 부진의 기준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아, 그거?”

“네.”

“흐음, 그래도 대충 10만 부 정도는 팔려줘야 하지 않겠나?”

“시, 십만 부요?”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게 많은 비용까지 치르면서 서포트를 하는 작가라면 말일세.”

“······.”

10만부.

말이 쉬워 10만 부지 주간소년 히어로 같이 인지도가 낮은 잡지사에서 그만큼의 단행본을 판매할 수 있는 작품이 나오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

다.

이제껏 두어 작품 정도가 있었지만, 그것도 기성으로서 기존작품에 대한 인지도가 충분히 있던 작가 가능했던 것일 뿐 소년 히어로 출신의 신인작가 중

에선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나마 가장 인기 있었던 ‘요괴 검사’가 7만부를 찍었던 게 최고였다. 그나마도 5권이 넘어서야 초판으로 5만권이 넘었고, 누적으로 평균 7만부가 겨우

넘은 것이다.

그런데 이건 애초에 신인인 것도 모자라 1권인데 10만부라니.

대충 3만권 언저리 정도로 생각했던 편집장의 예상은 백만 광년만큼이나 빗나가 버린 것이다.

애초에 전무는 가능하지 않은 일을 숙제로 던져준 것이다.

미리 권수를 임원회의 때 확정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아, 뭐. 자네가 영 부담스럽다면. 9만부 정도로 생각해 줄 수도 있어.”

“······.”

“아무튼, 출판사를 위해 열심히 해주게. 그럼 난 바빠서 이만 가보겠네.”

그렇게 말하며 손을 흔들고는 히죽거리며 발걸음도 가볍게 걸어간다.

그런 전무의 등 뒤에서 인사를 하는 편집장의 얼굴을 굳어있었다.

*

며칠 후.

드디어 앙케이트 결과가 나왔다.

앙케이트 결과표를 나눠주던 직원이 키도의 담당인 테고시 케이에게 다가갔다.

테고시는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테고시, 이번에도 진심의 남자가 1위야.”

그 말에 키도의 담당이 소리를 양손을 위로 번쩍 들며 환호했다.

“야호!”

그 모습을 본 주변의 직원들이 앙케이트 자료를 나눠주던 직원에게 모여들었다.

“진심의 남자가 이번에도 1위? 파시엔시아는?”

“이번에도 2위.”

“그럼 이번엔 몇 표 차이야?”

결과표를 확인하던 직원이 놀란 표정을 짓더니 곧 머리를 들어 말한다.

“······103표 차이.”

“뭐?!”

순간 주변 사람들이 모두 경악했다.

< 1위 쟁탈전 (7)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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