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위 쟁탈전 (6) >
“2위요?”
- 네. 1위인 키도 선생님의 진심의 남자와 표차도 겨우 5표입니다. 요즘 그쪽 담당 반응으로 봐서는 키도 선생님 잔뜩 기합을 넣고 만화를 그리신다더
군요. 뭐 덕분에 담당도 즐거워하는 것 같아 보이긴 합니다만. 하하.
잘 된 일이다.
키도가 평소 삼사라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하고 훌륭한 작품이라고는 말해도 실질적으로 라이벌 의식 같은 건 느끼지 않고 있다. 그 이유는 결코 분야가
달라서가 아니다. 앙케이트에서 차이가 나니 딱히 라이벌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파시엔시아는 다르다.
진심의 남자와 전혀 다른 분야인 축구임에도 기합을 잔뜩 넣고 있다는 건 확실히 라이벌 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 거기다 실제로 표차도 거의 나
지 않는 상황이니까.
사실 쫓아가는 2위보다 쫓기는 1위가 불안한 법이다.
거기다 겨우 5표 차이라면 더 그렇겠지.
개인적으로 1위에 대한 욕심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막 1위가 간절할 정도는 아니다. 처음부터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탓도 있지만, 삼사라 이
후 너무 작품에 대한 기대감을 키우는 것이 오히려 해가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저 편하게 평소처럼 그동안 덕질을 해서 얻었던 경험을 바탕으로 즐겁게 써가기로 한 것이다.
그 덕분인지는 모르지만 결과도 좋게 나왔으니 내 생각이 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 편집부에서도 5표 차이라면 금방 역전이 될지 모른다는 분위깁니다. 흐름도 지금 파시엔시아가 엄청나게 상승세고요. 그래서 일단 제 생각도 다음 주
면 순위가 바뀌지 않을까 예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지금 연재되고 있는 진심의 남자는 과거에 내가 본 것보다 훨씬 재미가 있다.
그림도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더 뛰어나다. 이것만 봐도 키도가 얼마나 이 작품에 열정을 쏟아 붓는지 알만하다.
하지만 지로의 말대로 지금 파시엔시아는 상승세다.
최근 추세도 진심의 남자 같은 남자의 열정을 주제로 한 만화보다는 파시엔시아 같은 스포츠물의 분위기가 더 좋은 편이다. 그러니까 같은 완성도라고
해도 파시엔시아 쪽이 월등히 유리하다는 거다.
이런 것을 모두 종합적으로 생각해보면 파시엔시가가 1위를 차지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 어쨌거나 진심의 남자와 파시엔시아 덕분에 요즘 편집장님도 늘 웃고 다니실 정도입니다. 아무튼 이래저래 경사가 겹치고 있어서 편집부도 들떠 있
구요.
“삼사라 순위가 좀 아쉽기는 하지만 파시엔시아라도 인기를 얻어주니 다행이네요.”
- 삼사라도 곧 순위가 오를 겁니다. 좋은 작품은 언제 건 뜨게 되어있으니까요. 아, 그리고 부탁하신 책자들은 방금 선생님 화실에 택급편으로 보냈습니
다. 일본에서 구할 수 있는 유럽, 특히 스페인리그에 대한 자료가 중심입니다.
“네. 고맙습니다.”
아이디어와 이야기, 그리고 어느 정도의 기억만으로는 리얼 축구만화를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법이다.
처음 계획도 원래는 대본소용이라 조금 가벼운 느낌으로 시작했지만, 일본연재를 시작한 이상 자료수집에 소홀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리고 선희역시도 그냥 상상만으로는 계속 내 요구를 다 표현하기는 어려울 테니 그 문제도 있고.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를 좀 더 나눈 뒤 지로와 통화를 끝냈다.
그런데 전화를 끊자마자 다시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은 성준희가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는 수화기를 막으며 나를 불렀다.
“유, 윤환아.”
“······응?”
“이, 일본인이야. 네가 좀 받아줄래? 난 한마디도 못 알아듣겠어. 그보다. 이 아저씨 무척 화난 것 같은 음성인데.”
“아저씨?”
내가 수화기를 받고는 일본어로 말했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 아, 유난! 나다. 형이다.
“어? 키도 형?”
화난 음성이라는 성준희의 말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하긴, 키도의 음성이 좀 공격적이긴 하지.
- 그래. 그동안 잘 지냈느냐?
“뭐, 그럭저럭. 그나저나 형 요즘 1위던데.”
- 하하핫, 그럼. 이 형이 누구더냐. 키도 죠타로가 바로 나다. 1위는 당연하지.
전화기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웃어대자 내가 잠시 전화기를 귀에서 살짝 뗐다.
웃음소리가 그치고 나자 내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셔?”
- 이, 형이 꼭 이유가 있어야 전화하겠냐만은, 오늘은 용건이 있다.
“······?”
- 먼저, 너의 축하인사는 잘 받았다. 파시엔시아, 잘 만들었더구나.
“형에게 축하인사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는데, 거기가 딱 좋겠더라고.”
- 그래. 덕분에 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게 해줘서.
무슨 말이지?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게 해줘?
- 솔직히 이번엔 이 형이 솔직히 좀 위기감을 느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더러운 수법으로 1위가 되려했었지?
“더러운 수법?”
- 아, 뭐. 그 얘기는 관두고. 어쨌건 결코 쉽게는 1위를 내어줄 수 없다. 승부에 형제애 따위 필요 없다는 건 잘 알고 있겠지?
아, 참나. 이형 또 시작이네.
하기야, 이런 사람이니까 그런 만화를 그릴 수 있는 건지도 모르지만.
그나저나 갑자기 왜 갑자기 이렇게 불타오르는 거지?
하지만 이럴 땐 그냥 맞장구를 쳐주는 게 좋다.
“당연하지.”
아무튼 어색하게 웃으며 키도의 말을 받았다.
그러자 키도가 더 신나하며 소리쳤다.
- 좋아! 그래야, 내 동생이지! 진검 승부다, 잘 해보자!
“그·····래. 지, 진검승부.”
와, 이거 엄청 손이 오그라드네.
키도 이 인간은 정말 이런 말을 잘도 내뱉는구나.
- 아, 그리고 써니의 그 열혈적이고 강렬한 그림, 이 오라버니가 감동을 제대로 먹었다고 좀 전해다오.
“······알았어.”
- 그럼 다음 주, 제대로 승부해 보자! 너도 물러서지 마라!
그렇게 말하며 전화를 끊는다.
“······.”
도대체 어디로 물러서지 말라는 건지.
아무튼 뭔가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날 보던 박상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야, 너 기가 왕창 빠진 사람 같다.”
그 말을 듣고 소파에 몸을 묻으며 허탈하게 웃었다.
와, 진짜. 키도의 분위기에 휩쓸리면 정말 몸에 힘이 몽땅 빠져나가는 기분이다.
***
며칠 후 지로가 화실을 찾아왔다.
그가 오자 곧바로 작업을 끝낸 삼사라와 파시엔시아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원고를 확인한 지로가 만족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서류봉투에 챙겨 넣었다. 그리고는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소년 히어로 두 권을 꺼낸다.
“신간 소년 히어로입니다.”
“네.”
“그런데, 선생님. 이번 진심의 남자······말인데요.”
어쩐지 지로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갑자기 왜 저러지?
“진심의 남자가 왜요?”
“그게 좀······, 충격입니다. 일단 읽어보시면 아실 겁니다.”
충격?
뭘 보고 저런 소리를 하는 거지?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잡지를 펼쳤다.
그리고는 곧바로 진심의 남자부분을 찾아 천천히 읽어나갔다.
잠시 후, 테이블에 잡지를 조용히 내려놓았다.
“왜 그래?”
박상식이 물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냥 멍한 표정으로 앉아만 있었다.
방금 본 진심의 남자를 보다가 생각지 못한 크로스 카운터 한방을 맞은 기분이었다.
전에 진심의 남자 스토리에 참여 할 때만 해도 이정도의 이야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있었
으니까.
하지만, 그 생각을 완전히 뛰어 넘은 이야기가 내 눈앞에 있다.
내가 멍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앉아있자 계속 콘티작업을 하던 박상식이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내 앞에 놓여 있는 소년 히어로를 읽기 시작했다.
아참, 박상식은 일본어를 모르지만 읽는 데는 무리가 없다.
그 이유는 바로 지로 덕분이었다.
늘 지로는 잡지를 가져올 때 비행기 안에서 번역을 해 가지고 온다. 화실 식구들이 일본어를 모른다는 사실 때문에 일부러 수고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분량 때문에 가장 중요한 만화 서너 개 정도만 번역을 하는데, 이번엔 삼사라, 파시엔시아와 함께 진심의 남자를 번역해 온 것이다.
덕분에 박상식도 볼펜으로 번역되어 있는 만화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사실이야 어찌되었건, 진심의 남자를 읽은 박상식의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큰소리로 감탄했다.
“와, 이거 엄청난데. 몰입감이 장난이 아니야. 진심의 남자 이번 편은 엄청 재밌군요.”
“네. 저도 이번 편을 읽으며 상당히 놀랐습니다. 담당인 테고시 씨에게 듣기론 키도 선생님이 원래 작업 중이던 원고를 다 찢어버리고 새롭게 완성시켰
다더군요.”
뭐 작업 중이던 원고를 찢어?
그 인간이 진짜 미쳤구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당연히 원고 한 장을 완성하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도 한사람만이 아닌 화실 사람들 모두의 것이 말이다.
그런 원고를 모조리 찢어버리고 새롭게 그렸다니.
그것을 눈앞에서 봤던 화실 어시들의 충격이 어땠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겨우 이틀 만에 완성했다고 합니다. 그 짧은 시간에 이만한 퀄리티도 놀랍지만, 그보다 내용이 너무 좋습니다.”
“이 정도라면······.”
그렇게 말을 하던 박상식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가 한숨을 푹 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파시엔시아의 완패야.”
그 말에 한참 열을 올리며 그림을 그리던 선희가 움찔거린다. 그러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
선희가 소년 히어로를 들고는 펼쳤다.
단번에 진심의 남자를 찾더니 한 장씩 넘겨가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읽어나간다.
그리고 금방 다 읽었는지 곧바로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
선희의 표정엔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인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선희가 곧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모두의 시선이 그런 선희에게 집중되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았던 선희가 갑자기 작업 중이던 데생원고와 서랍에 들어있던 데생원고를 꺼낸다.
설마 아니겠지.
하지만 그 설마 했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선희가 데생원고들을 찢기 시작한 것이다.
“어? 서, 선생님!”
“어맛! 작은 선생님!”
“어어, 서, 선희야!”
어시들과 박상식이 비명을 지른다.
그 모습을 보던 지로는 그대로 얼어버렸다.
갑작스러운 선희의 행동에 화실 내는 아비규환을 변해버린 것이다.
한 번도 저런 행동을 한 적이 없던 애가 갑자기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자신이 그렇게 공들여 그렸던 원고를 사정없니 찢어버리고 있으니 모두 경악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데생원고를 모조리 찢어버린 선희가 콘티노트를 들고 내게 다가오더니 불쑥 내밀었다.
“오빠, 다시 해줘.”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푹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곧바로 물었다.
“그래, 이걸로는 안 되겠지?”
내 질문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알았어. 이 오빠가 더 좋은 콘티를 만들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알겠지.”
“응.”
나는 곧바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곧바로 박상식을 불렀다.
“형.”
“어, 어.”
“오늘 밤샘을 해서라도 제대로 된 스토리로 만들어보자.”
그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짓더니 박상식이 머리를 벅벅 긁더니, 한숨을 푹 쉰다.
“에휴, 너도 참. 그래, 알았다. 알았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면 그렇게 해야지. 내가 뭐 힘이 있나.”
그렇게 말하며 낄낄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 1위 쟁탈전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