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위 쟁탈전 (5) >
엽서 속에 비어있는 세 개의 네모 칸.
그곳엔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을 좋아하는 순서대로 세 개를 적어두는 자리가 있고, 그곳엔 자신의 진심의 남자, 그리고 두 번째는 삼사라, 세 번째는 아
직 비워둔 상태다.
받는 곳 주소와 이름은 모두 어시들 것으로 했다.
그의 눈이 책상 위를 향하고 있을 때 어시들이 그런 자신을 힐끔거리자 헛기침을 하고는 곧바로 시선이 옮겨진다.
- 하하, 그럼요. 다섯 표 차이면 엄청나게 큰 거죠. 그러니까 마음에 여유를 가지시고······.
“아니, 호랑이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법. 여유 따윈 어림없지.”
그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목이 바짝 말라온다.
물 생각이 간절하다.
- 아, 네. 그럼 최선을······.
“그럼, 난 원고를 해야 하니, 나중에 연락하지.”
- 아, 그럼······.
뚝.
전화를 끊은 키도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걸어가며 소리쳤다.
“여보, 물 한잔만 주시오!”
곧 키도 부인의 밝은 음성이 들려왔다.
“네. 알겠어요!”
거실로 나가는 키도의 모습을 보며 어시들이 수군거렸다.
“방금 1위 했다고 들은 것 같은데, 잘못 들었나?”
“당연한 결과라고 하신걸 보면 맞는 것 같은데.”
“그럼 왜 저러시지? 1위 했으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기분이 영 안 좋아 보이시지?”
두 사람이 수군대던 그때 건너편 어시가 끼어들었다.
“파시엔시아 때문이잖아요. 방금 못 들었어요? 5표차이라잖아. 겨우 5표. 그 정도 차이면 그냥 순위가 같다고 봐야지.”
그러자 곁에 있던 어시도 대화에 참여한다.
“맞아. 전에 보니까 파시엔시아 때문인지 네임작업도 엄청 신경 쓰고 계시더라. 요즘엔 식사 중에도 거의 진심의 남자의 장면구상에 열을 올리시잖아.
그리고 틈틈이 파시엔시아도 보시고.”
“음, 그래. 엄청 신경 쓰고 계시긴 하더라.”
“솔직히 저, 이 화실에 일하면서 이런 말 하면 곤란하긴 한데. 개인적으로는 파시엔시아가 더 재밌었어요. 진심의 남자도 요즘 엄청 재밌기는 하지만 파
시엔시아는 정말 가슴 두근거리게 한다고나 할까······. 덕분에 요즘 주말엔 친구들이랑 아침에 축구 시작했다니까요. 아참, 친구들도 파시엔시아가 더 재
밌다고 그러더군요.”
“저는 진심의 남자가 더 좋아요. 전 스포츠 만화엔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리고 진심의 남자는 완전히 남자의 로망이잖아요. 두근거림이라면 어디에도
꿀리지 않을걸요.”
“그래도 선생님, 한 번도 다른 작품에 저렇게 신경 쓰신 적이 없으셨는데. 이번엔 진짜 별일이다.”
“네? 키도 선생님 다른 만화 신경 안 쓰세요?”
“당연하지. 선생님이 인정하는 만화는 ‘거인의 별’ 정도가 유일할걸?”
“와, 거인의 별이라니. 대단하시네요.”
“그나저나 선생님 이번엔 진짜 심각하신데. 좀 걱정스럽다.”
“그러게요.”
어시들의 시선이 키도가 나간 거실방향으로 모인다.
그런데 그 순간 키도가 화실로 들어서더니 그 시선들과 마주쳤다.
“어? 모두 왜 그런 눈빛으로 보는 건가? 무슨 일 있어?”
그 말에 모두 그의 시선을 피하며 후다닥 원고에 집중했다.
“······?”
키도가 잠시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곧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의 자리로 간다.
그래도 부인이 준 따듯한 물 한잔에 기분이 많이 가라앉았기 때문에 평온함을 얻었다.
그런데 그때 한쪽 구석에서 주간소년 히어로를 살피던 어시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서, 선생님!”
“······무슨 일인가?”
“혹시 선생님, 파시엔시아를 그린 텐겐이란 분과 잘 아시는 사이세요?”
그 말에 키도가 한쪽 눈을 치켜떴다.
“뭣이? 갑자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여기요, 여기!”
그렇게 말하며 소년 히어로 잡지를 번쩍 들어 펼치고는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모두 그런 막내어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야야,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너, 왜 그래?”
“이걸 보세요. 이거요.”
여전히 잡지를 들어 펼친 채로 계속 뭔가를 가리킨다.
자세히 보니 잡지의 마지막 페이지다.
켄도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다가와 막내어시가 가리킨 페이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거, 작가의 후기 아닌가?”
“네. 맞아요. 그런데 이걸 보세요.”
“음······, 텐겐 작가·····? 응?”
텐겐이 쓴 후기에 적혀 있는 글을 보고는 켄도의 눈이 크게 떠진다.
그곳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진심의 남자, 1위 축하해! 아니키(형)!’
“선생님에게 형이라고 부르잖아요.”
“어? 정말이네.”
“와, 진짜다!”
모두 작가후기를 읽고는 동그란 눈으로 키도를 돌아본다.
“······.”
순간 키도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굳어버렸다.
아니키라니, 아니키라니.
자신에게 그렇게 부를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한 명밖에 없다.
설마, 설마.
생각에 잠겨 있던 키도가 심각한 표정으로 변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어시들이 그의 눈치를 보더니 조그맣게 수군거렸다.
“왜, 저러시지?”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그래?”
선배 어시가 돌아보며 말하자 막내어시가 당황하며 더듬거린다.
“네, 네? 제, 제가 뭘요? 전 그냥 작가 후기에 써져있는 걸 보고······.”
“선생님이 안 그래도 파시엔시아 때문에 최근 신경이 날카로워져 계시잖아. 그런데 그런 얘기를 하니까 그렇지.”
“네? 무슨 말씀이세요?”
“딱 보니까 도발이네, 도발.”
“도, 도발요?”
“그래.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차이 날 땐 정신력 싸움이라고. 그런데 저쪽에서 먼저 정신적 데미지를 주기 위해 공격한 건데. 그걸 네가 선생님께 전달해
버린 거잖아.”
“······!”
그때 다른 어시도 끼어들었다.
“나도 어디선가 들은 것 같다. 만화가들은 서로 만날 땐 웃으면서 하하 호호하지만 뒤에선 칼을 간다고 들었어. 그리고 이렇게 작가후기 같은 곳에서 보
이지 않는 전쟁을 벌인다는 얘기도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었구나.”
“시, 신인만화가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다고요?”
“연재는 전쟁이야, 전쟁. 몰라?”
“그래. 상대의 비수를 저 녀석이 바보처럼 받아서 선생님께 날린 거라고. 이런 닌자 어택 전달자 같은 놈.”
“니, 닌자 어택 전달자요? 도대체 그게 뭔데요?”
“배신자라는 말이지. 그것도 모르냐?”
“저, 전 억울합니다.”
“억울해도 이미 일을 벌어졌다. 저 선생님의 모습을 보라고.”
“아아······.”
키도의 표정이 아까보다 더 굳어져 있다.
그런 키도를 보던 막내어시가 절망에 사로잡혀 머리를 감싸 쥐고는 책상에 엎드렸다.
“나, 난 아무것도 몰랐다구요. 전 정말 그 어떤 의도도 없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부르르 떨고 있자 어시들이 킥킥거리며 웃는다.
막내어시를 놀려주는 건 항상 즐겁다.
하지만 지금의 키도 행동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 말대로 파시엔시아를 그린 텐겐이라는 인간이 도발을 건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그 정도의 도발쯤이야 평소의 키도라면 그저 웃고 넘길 정도로
가소로울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키도 반응은 그런 예상과 완전히 반대였다.
평소와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키도 때문에 고참 어시들도 조금 걱정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키도가 자신의 책상에 놓아두었던 엽서를 들고는 그 자리에서 북북 찢어버렸다.
그 모습을 본 모든 어시들의 표정이 파랗게 질려 들어갔다.
평소 유별난 선생이긴 했어도 저런 거친 행동을 보여준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경력이 오래된 어시들도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장난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느꼈다.
그 순간 키도의 모습을 보며 어시 한명이 말했다.
“큰일이다. 선생님 폭주하시려나 보다.”
“아, 한동안 조용했는데, 다시 화실에서 피바람이 부려나?”
“아, 씨. 이제야 제대로 일 좀 하려나 했는데. 또 급 완결인가!”
“미후네 선생님 쪽에 어시자리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사사키 쪽도 알아봐. 그쪽에 요즘 일손이 부족하다는 얘기를 들었어.”
모두가 패닉상태에 빠져버렸다.
“저, 저는요?”
“스스로 살길을 도모해야지.”
“아, 씨. 아직 대출금도 못 갚았는데 하필 이럴 때.”
그렇게 모두 앞일을 걱정하고 있는 그 순간 갑자기 키도가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핫. 하하핫. 하하하하.”
그 모습을 본 어시들이 모두 절망했다.
“젠장. 이번엔 좀 크다.”
“망했어.”
“왜, 왜요?”
“저번 연재도 선생님의 저 웃음소리와 함께 끝장이 나버렸어.”
“네?”
그렇게 모두가 경악하고 있을 때 키도가 갑자기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팔짱을 끼더니, 눈을 번쩍이고는 곧 다시 입 꼬리를 살짝 끌어올렸
다.
“그래, 그랬군. 어쩐지, 이런 말도 안 되는 괴물 같은 신인이 뜬금없이 툭 튀어나올 리 없지. 이젠 알겠어.”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신이 찢어버린 엽서를 내려다보며 인상을 팍 썼다.
“내가 추하게 이 딴 짓이나 하려했다니. 형으로써 내가 너무나 한심하고 부끄럽구나. 좋아, 남자대 남자, 이젠 정면승부다!”
주먹까지 불끈 쥐고 허공에 소리치자 어시 모두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자, 제군들.”
갑자기 키도가 어시들에게 말하자 모두 긴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본다.
“지금 작업 중인 원고를 모두 위로 들어라.”
“네?”
“갑자기······.”
모두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볼 뿐이었다. 도대체 지금 키도가 하는 이야기의 저의를 전혀 파악하지 못해서다.
“어서!”
키도가 소리치자 모두 놀란 눈을 한 채 반사적으로 원고를 머리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모두 그 자리에서 찢어라!”
“······!”
“······!”
어시들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찢으라니, 뭘 말인가?
“뭐, 하는 건가? 빨리 그 원고들을 찢어라!”
“서, 선생님!”
“찢으라니 무슨 말씀이세요! 원고를 말입니까?!”
“······!”
혼돈과 패닉.
그렇게 어시들이 당황하고 있을 때 키도는 가장 가까이 있던 배경 전문 어시가 들고 있던 원고를 빼앗더니 그 자리에서 쫘악 찢어버렸다.
“악!”
“선생니이임~!”
“안 돼!”
어시들이 비명을 질렀다.
이제까지 여러 번 키도의 미친 짓을 봐 왔지만 오늘을 그 중에서도 최강이었다.
선생이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 틀림없다.
모두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충격에서 깨어 나오지 못했다.
며칠 동안 죽어라 완성시킨 원고가 키도의 손에서 갈가리 찢겨 나가는 모습을 보니 마치 자신의 사지가 찢겨나가는 듯한 고통이 몰려왔다.
그런 순간에도 키도는 버럭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모두 거침없이 찢어라! 이딴 원고로는 절대 파시엔시아를 못 이긴다! 이젠 모든 것을 쏟아야 한다! 좀 더 완벽한 이야기로 새하얗게 불태울 것이다!”
“선생님! 이제 마감까지 이틀밖에 남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러시면.”
“제발 고정하세요!”
“전 이 배경 그리느라 오늘 하루 종일 매달렸어요!”
결국 어시 한명이 울부짖으며 그를 만류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우는 소리 마라! 이제부터 진짜 만화를 그리는 거다. 어설프게 자신을 속이지 말고 모든 것을 걸어라! 그리고 파시엔시아를 이기는 거다! 파시엔시아
타도다!”
그때 화실로 간식을 들고 들어오던 키도의 부인이 평온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도 응원할게요. 모두 힘내세요.”
그 순간 어시들은 공포와 충격에 빠져 들어갔다.
< 1위 쟁탈전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