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85화 (85/425)

< 1위 쟁탈전 (4) >

오랜만에 혼자 전상길의 화실을 찾았다.

“안녕하세요.”

작업 중이던 전상길이 나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반갑게 맞이한다.

“어, 그래. 어서와.”

“이건 이번 데생원고에요.”

내가 건넨 서류봉투를 받더니 문하생 한명에게 넘겨준다.

“윤환이 너 커피 삼삼삼이지?”

“아, 네. 하하.”

“진구야. 커피 두잔. 삼삼삼으로.”

그렇게 말하고는 날 보며 싱글거린다.

“뭘 일부러 이런 걸 가져와. 우리 애들 보내면 되는데.”

“겸사겸사 오는 김에 가져온 거죠. 그런데, 화실에 사람들이 좀 늘었네요.”

내가 화실을 둘러보며 말하자 전상길이 슬쩍 웃으며 작은 소리로 말한다.

“어. 맞아. 떠났던 애들 몇 명도 돌아왔고, 몇 명 신입 애들도 좀 받았거든.”

어쩐지 몇 명은 눈에 익다했더니.

“작업은 어때요?”

“전에 너희들이 넘겨줬던 평발 스트라이커 콘티 그거 다시 작업하느라 요즘 엄청 바빠. 너희들이 넘겨준 게 20권 분량이었잖아. 그거 완성하려면 지금

인력으로는 두 달 이상 걸리지 싶다. 아, 그 망할 놈들이 작업 중이던 원고까지 모조리 쓸어가 버린 바람에 다 새로 그려야 하니까 엄청 머리가 아프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표정은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이다.

하기야, 이제 원래의 자리를 조금씩 찾아가고 있으니 당연한 일인가.

“그럼 저희들 그림 작업까지 있어서 더 바쁘시겠네요.”

“아이고, 그런 말 말아. 지금 이게 다 너희들 덕에 위험한 고비를 넘길 수 있어서 생긴 기회잖아. 그리고 의리가 있지, 사정이 나아진다고 갑자기 등을 돌

리면 되겠어. 인간적으로 그럴 수는 없잖아.”

하지만, 무작정 이런 상태로 계속 시간을 보내면 그것도 문제다.

솔직히 나도 계속 이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전상길의 화실 인력을 무작정 오래 사용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당장은 파시엔시아를 그릴 팀을 따로 구성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만 해도 추양구의 펜터치를 커버할 사람을 구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

우니까.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정미자에게 펜터치를 맡길 수도 있는 문제다. 이제 화실 식구들도 슬슬 그림속도가 빨라진 탓에 여유가 있는 편이니까. 거기다 정

미자의 경우 인물터치 속도가 상당히 빨라 화실에서 시간이 가장 많이 남는다.

하지만, 그런 정미자도 추양구의 강렬한 그 펜터치에는 아직 한참 미치지 못한다.

일반인에게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눈에는 그 두 사람의 실력차이는 눈에 확 뛸 정도다.

만약 정미자가 이대로 파시엔시아까지 맡아 그린다면, 팬들도 미묘하지만 그 차이를 분명 느낄 것이다.

예를 들어 ‘내일의 죠’의 강렬하고 굵은 펜터치가 하루아침에 가늘고 섬세한 느낌으로 바뀐다면 어떨까? 기존의 팬들이 곧바로 그 문제를 지적할 것이

다.

‘갑자기 다른 그림 같다.’

‘이런 건 내가 알고 있던 야부키 죠가 아니다.’

‘빨리 우리의 죠를 돌려줘.’

물론 극단적은 예일 뿐이지만, 결국 비슷한 상황이 되지 않을까.

이것은 인기가 있으면 있을수록 더 할 것이다.

아직은 완전히 자리를 잡기 전이니 서서히 바통을 넘겨줄 그런 어시를 찾아야 할 시점이다.

음. 삼사라의 문제를 파시엔시아로 해결했나 싶었더니, 또 새로운 문제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때 전상길이 상념에 빠져있던 나를 깨운다.

“아참, 일본에서의 반응은 어때?”

“잡지 엽서 앙케이트에서 3위를 했어요.”

내 말에 전상길이 입을 떡 벌리며 놀란다.

“그······, 잡지에 연재하는 만화가 20개라고 했지? 거기서 3위?!”

“네.”

“와, 그럼 엄청 잘한 거잖아. 일본잡지에서 그런 순위라니 어째 감동인데?”

그렇게 말하더니 머리를 들어 한참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추양구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양구야! 파시엔시아, 일본잡지에서 3위 했단다. 네 펜터치가 일본에서 먹힌 거야!”

그 소리를 들은 추양구는 잠시 전상길을 빤히 바라보더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곧바로 다시 원고작업에 열중한다.

“저, 재미없는 놈.”

그렇게 말하며 낄낄거리더니 다시 날 바라본다.

“그래도 저 녀석 제법 기분이 좋은가보다. 입 꼬리를 보니까.”

“입 꼬리요?”

나도 봤지만, 평상시와 별로 다를 게 없던데.

“아무튼 역시 일본 놈들은 우리보다 작품을 보는 눈이 있다니까. 암튼 철호 형은 이런 작품을 왜 걷어찬 거야? 뭐, 그것도 본인 복이겠지만.”

전상길이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그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리며 세 명의 남자들이 화실 안으로 들어서며 어정쩡한 자세로 인사를 한다.

쭈뼛거리며 들어오는 폼이 이곳에 처음 온 사람들인 모양이다.

막내 문하생이 자리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아, 네. 아까 전화를 드렸었는데.”

“문하생 지원하러 오신 분들이군요.”

“네.”

그 모습을 보고 곧바로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어. 그래. 그리고 대봉이 녀석 혹시 연락되면 화실에 좀 들리라고 해줘. 그 자식. 이렇게 중요할 때 어디서 뭘 하는지.”

지금은 실력 있는 사람이 필요한 시기다. 거기다가 이대봉의 인맥도 절실하겠지.

“네. 그럼.”

곧바로 화실을 빠져나왔다.

***

“또 완판?”

“진짜 무슨 일이지?”

“그러게. 진짜 히트작이 나온 건가?”

“진심의 남자 효과 아니야?”

“파시엔시아도 연재를 시작한 마당이니, 이젠 뭣 때문인지 모르겠다.”

잡지의 완판 소식을 들은 소년 히어로의 편집부 직원들이 모여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저번 주만 해도 그 사건을 두고 우연이다, 아니다하며 직원들 대부분 반신반의하던 일이었다.

그리고 이번 주는 아예 처음부터 15만부를 찍었는데, 그게 완판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실 새롭게 잡지를 찍어내려 하던 순간까지도 출판부에선 몇 부를 찍어낼지에 대해 토론이 꽤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15만부가 결정된

것이다.

물론 결정을 하고난 뒤에도 몇 번의 잡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 이런 결과가 나왔다.

물론 거의 한주를 다 채운 상황에서의 완판소식이라 증쇄를 하기는 애매한 상황이다. 어쨌건 또 이만큼의 부수가 판매된 상황이니 이젠 확실히 변화가

시작되었다는 건 모두 피부로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정확한 건 아직 아무도 모른다.

진심의 남자가 원인이라고 하기엔 애매하고, 파시엔시아는 연재 전부터 저랬으니 이 때문도 아니다.

“최근 단행본 성적이 좋은 작품이 몇 개 늘었잖아요. 그것 때문이 아닐까요?”

“경험상 그것만으로 이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데.”

“전체적인 변화가 아닐까요? 작품들의 인식이 예전에 비해 올라갔다거나.”

“별로 그런 느낌은 아닌데. 주변에선 어때?”

“주변이고 뭐고, 애초에 소년 히어로를 아는 사람이 없어요. 아, 말하고 보니 서글프네.”

“분명 독자들에게 우리 소년 히어로가 관심을 받는 건 맞는데 그 원인을 모르겠다는 게 문제네.”

“출판부에선 얘기 없어요?”

“몰라, 그쪽에서도 아직 원인 파악을 못한 모양이던데.”

그 시각 출판부.

젊은 직원 한명이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로 들어왔다.

그를 본 출판부장이 서둘러 물었다.

“어때? 알아봤어?”

“네.”

“어서 말해봐.”

“편의점을 중심으로 학교주변 문구점등을 돌면서 확인해 봤는데요. 일단 소학교, 중학교 판매량은 아직 눈에 띌 정도의 판매변화는 없었습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데?”

“일단 변화는 고등학교 이상의 독자층에서 생기고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이상?”

“네. 그리고 편의점 직원들에게도 물어봤는데 최근 20대층 남자 독자들이 많이 증가했다고 합니다.”

“20대······. 그거 정확한 거야?”

“네. 확인한 곳은 그렇습니다. 물론 30곳을 돌아보고 내린 결론이니까. 완벽하지는 않습니다만.”

“아니, 그 정도면 대충 흐름은 알만하군. 알았어, 수고했네.”

그렇게 말한 부장이 자리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가 곧바로 주간소년 히어로 편집부로 향했다.

편집부로 들어서자 직원들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어. 그래.”

인사를 대충 받던 그가 편집장 자리로 다가갔다. 한참 복사원고를 살피며 머리를 처박고 있는 편집장을 내려다보던 출판부장이 책상 위를 톡톡 두드린

다.

“······응? 뭐야 자넨가? 무슨 일인데?”

“잠시만 나 좀 보자.”

“······?”

얼떨결에 출판부장을 따라 휴게실로 들어갔다.

우롱차 두 개를 자판기에서 뺀 출판부장이 편집부장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요즘 소년 히어로에 새로 연재를 시작한 만화가 있나?”

“최근 연재를 시작한 게 몇 되긴 하지. 그런데 그건 왜 묻는데?”

“그럼 혹시 고등학생 이상의 독자들이 주목할 만 한 건 뭐 없어?”

“고등학생 이상? 진심의 남자는 중학생들에게도 인기가 있고, 파시엔시아는······ 뭐 스포츠니까 전 연령층이라고 해야 하나? 그것 말고는······.”

편집부장이 말하다말고 멈칫하자 출판부장이 눈을 반짝인다.

“있구나. 뭐냐? 어서 말해봐.”

“아, 있긴 있는데. 말이지. 그보다 뭣 때문에 그걸 물어보는 지나 설명해봐.”

편집장의 질문에 출판부장이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는 불을 붙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알겠지만, 최근 2주간 갑자기 소년 히어로 판매부수가 확 늘었잖아.”

“그랬지.”

“그래서 우리가 조사를 좀 해봤어.”

“그래? 결과는 어땠는데?”

내용이 궁금한지 편집장이 머리를 쭉 내밀며 물었다.

“고등학생 이상, 특히 20대 이상의 독자가 늘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20대?”

“그래. 너희들 이제까지 소학교, 중학교 독자가 주 타깃 아니었냐? 예전에도 판매부수 늘리려면 독자층을 더 높여야 한다고 그렇게 주장하며 변화를 시

도했다가 결국 원래대로 돌아간 거잖아. 그런데 이번엔 진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모양이다.”

“······.”

“자, 이제 말해봐. 어떤 만화야?”

“넌, 말이야. 출판부장이라는 놈이 자기 출판사 만화잡지도 제대로 안 읽냐?”

“야, 미쯔다쇼텐에서 출판하는 만화가 어디 하나 둘이야? 거기다 소설, 패션잡지까지. 그 많은 책을 어떻게 다 봐? 그리고 난 만화보다는 소설파야. 몰

랐냐?”

“그래, 알고 있지. 네 녀석이 만화를 은근히 무시한다는 것 정도는.”

“말은 똑바로 해. 소설을 좀 더 좋아할 뿐이야. 그나저나 어서 말해봐.”

그런데 편집부장은 출판부장의 재촉에도 대답하지 않고 휴게실 의자에서 일어나더니 다 마신 우롱차 빈 깡통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밖으로 나간다.

“우롱차, 잘 마셨다.”

“야, 임마!”

***

- 진심의 남자, 이번에도 앙케이트에서 1위입니다.

“훗, 당연한 결과지.”

그렇게 말하며 수화기를 막고는 키도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리고는 자만심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파시엔시아는?”

- 파시엔시아요?

“그래. 그 만화는 어때?”

뭔가 잠시 머뭇거리는 느낌이다.

- 아······. 2위입니다.

“역시, 그런가. 그래, 표차는 어느 정도지.”

- 좀, 아슬아슬했습니다. 5표 차이니까요.

순간 키도가 흠칫했다.

1위를 놓치지 않은 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파시엔시아가 턱밑까지 쫓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이 삼켜졌다.

키도가 어색하게 웃으며 마른입술을 핥고는 말했다.

“다, 다섯 표 차이면 충분이 크, 크지. 중간에 다섯 명이나 더 있다는 거라고. 다섯 명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렇게 말하며 시선이 자신의 책상 위로 향한다.

그 위에 놓여있는 주간소년 히어로 최신호. 그런데 똑같은 책이 세권이다. 그리고 모두 펼쳐진 상태였다.

펼쳐진 부위는 앙케이트 엽서가 있는 부분으로 모두 엽서가 찢어져 나갔다. 그리고 그 엽서들은 바로 옆에 나란히 놓여있었다.

< 1위 쟁탈전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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