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위 쟁탈전 (3) >
모처럼 맛있는 음식과 함께 웃고 떠들다보니 화실 분위기가 무척 밝아진다.
사실, 최근 삼사라의 성적이 생각보다 저조하다는 얘기에 모두 은근히 신경들을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파시엔시아가 새롭게 연재를 시작한다고 하니, 그것에 모두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곳 본진이라고 할 수 있는 화실이 아닌 외주
를 통해 완성되는 원고라는 게 어시들에겐 껄끄럽게 만들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들어 어시들이 그림을 대하는 태도는 예전 같지 않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림을 완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덕분에 삼사라의 퀄리티는 예전에 비해 더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아무튼 팽팽한 활시위처럼 긴장감이 흐르던 화실이 미령이와 맛있는 떡으로 인해 많이 부드러워졌다.
그때 화실 문이 열리며 전상길 화실 문하생이 들어온다.
“안녕하세요.”
“네. 어서 오세요.”
“여기 오셔서 떡 좀 드세요.”
“아, 네. 고맙습니다.”
박소미가 내민 떡을 받아 우물거리며 내게 노란색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완성된 원고는 여기 있습니다. 혹시 데생원고 작업은 준비되었습니까?”
“네.”
내가 대답하고는 곧바로 선희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미령이와 놀고 있던 선희가 곧바로 자신의 서랍에서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그것을 들고 다가
와 남자에게 건넨다.
봉투를 열어 선희가 꼼꼼하게 적어놓은 메모지까지 다 확인하고 나더니 다시 인사를 하고 나갔다.
나는 곧장 완성된 원고를 확인했다.
그때 정미자가 내게 다가왔다.
정미자도 파시엔시아의 첫 번째 완성 원고를 보았을 때 충격이 좀 심했던지, 요즘엔 인물터치에 대한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하고 있다.
충분히 괜찮은 실력임에도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더 나은 그림으로 만들려는 노력을 하는데 내가 모른 척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원고가 오면 곧
바로 나와 함께 그 원고를 살피게 되었다.
물론 우리가 원고를 다 보고나면 곧바로 선희가 검토를 한다.
혹시 잘못된 장면묘사가 있을 경우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원고라는 것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보면 알게 모르게 엉뚱한 장면이 있게 마련이다.
옷 무늬가 바뀌었거나, 배경이 장면과 장면으로 이어지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이 그런 경우다.
물론 선희야 그런 건 단번에 잡아내긴 하지만.
하여튼 내가 보는 동안 정미자도 같이 원고를 보며 인물 터치를 확인한다.
확실히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추양구의 펜터치 실력은 발군이었다.
괜히 전상길 화실에서 최고 실력자라는 소리가 나오는 게 아니다싶다.
이름값만 아니면 전상길보다 실력에서는 월등히 우위에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스스로 만화가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며 전상길의 곁에 붙어있
다는데, 내 생각엔 충분히 실력은 있어 보인다.
그렇게 원고를 확인하는데 그때 전화가 울린다.
“네, 안녕하세요. 잠시만요. 윤환아, 아카기 씨.”
성준희에게 수화기를 건네받았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 선생님. 얼마 전에 시작한 파시엔시아 앙케이트 결과가 나왔습니다.
어째 지로의 음성이 흥분된 느낌인데.
“아, 네. 어떻게 되었습니까?”
- 네. 3위입니다.
“네? 3위요?”
- 네.
순간 나는 멍한 느낌과 동시에 전기에 감전 된 것 같은 짜릿함을 느꼈다.
3위?
정말 3위라고?
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지나간다.
그동안 기대하며 썼던 삼사라의 인기가 생각보다 오르지 않아 스스로에 대한 반성을 하고 있었다.
내가 미래에서 많은 작품을 경험했다는 사실과 어쭙잖은 덕력을 너무 과신한 결과가 바로 삼사라의 순위에서 나타난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너무 교
만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파시엔시아는 처음부터 그냥 편안하게 접근했다.
애초에 일본연재가 목적도 아니었고, 그저 상황이 어려워졌다는 이유 때문에 대본소용으로 시작한 이야기다.
그런 작품이 선희의 손을 거치고, 전상길 화실의 도움을 받아 완성되었다.
그래서 내심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저 적당하게 연재할 수 있고, 그게 단행본으로 출시되면 그럭저럭 수입으로 이어질 테니 더 그로 인해 더 나은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기반이 되지 않을
까하는 정도의 기대감이었다.
그런데 연재 시작과 동시에 앙케이트 3위라니.
나름 미래적인 스타일긴 하지만 실제로 한국의 이름있는 만화가조차 거부했던 스토리였음에도 일본잡지에 연재가 되자마자 일본 독자는 내 작품에 열
광해 주었다.
어쨌건 내 작품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데 흥분되지 않을 리 없다.
하지만 그 순간 또 다른 내 분신.
“삼사라는 어떻습니까?”
- 아, 네. 이번엔 9위입니다. 그래도 굉장히 선전한 것 같습니다. 신작들이 대거 상위권으로 올라가면서 순위변동이 많았는데도 말입니다.
이건 또 이거대로 놀라운 소식이다.
순위들이 이렇게 뒤집히며 변동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그 자리를 거의 지키고 있다니.
이건 그냥 고정 팬이 있다고 판단하기 어렵다.
역시 오타쿠들이 붙은 걸까?
아니면 그냥 이런 장르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일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아직 대중성 있는 장르는 아니다.
- 아, 그리고 다른 소식도 있습니다.
“다른 소식요? 또 뭐가 남았습니까?”
- 네.
이상하다.
파시엔시아와 삼사라 말고 뭔 소식이 또 있지?
- 이번에 1위가 바뀌었습니다.
“그래요? 제목이 뭔데요?”
- 키도 선생님의 진심의 남자입니다.
“네? 정말요?”
- 네.
이럴 수가 진심의 남자가 1위라고?
최근에 연재를 시작했다는 건 알고 있었고, 순위가 계속 치고 올라간다는 것도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키도가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스토리를 수정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 때문에 솔직히 조금 걱정하기 했었다.
어차피 잘 나갈 작품인데 내가 망친 건 아닐까하는 그런 생각.
그런데 생각보다 인기가 가파르게 오르고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단기간에 1위를 차지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 이것 때문에 편집부에서도 난리입니다. 신작 파시엔시아와 진심의 남자 투톱체제가 된 게 아닌가 하며 조심스럽게 예상하는 분위기고요.
“파시엔시아야 첫 화라서 운이 좋아 3위한 거겠죠. 이번엔 편집부에서 권두컬러까지 해서 적극적으로 밀어주셨잖아요.”
- 아뇨. 편집부에선 그렇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편집자들이 이번 파시엔시아를 보고 충격에 빠졌어요. 특히 스포츠 전문인 편집자 몇 명은 앞으
로 스포츠만화에 변화를 일으킬 거라는 얘기까지 할 정도예요.
“에이, 이제 1화인데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닙니까?”
- 저와 편집장님은 이미 여러 편의 네임까지 본 상황이라, 더 확신하고 있습니다.
“······.”
- 그동안 삼사라가 제대로 인기를 얻지 못해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텐데. 이제야 축하드린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겠군요.
그의 말에 내가 피식 웃었다.
“네. 고맙습니다.”
***
“키도 선생니임!”
키도의 화실을 찾아온 담당이 키도를 보며 감격의 눈물을 뿌린다. 그 모습을 본 키도가 중앙 책상에 앉아 머리를 슬쩍 들어 올리더니 담당을 보며 혀를
찼다.
“무슨 일이기에 편집자가 왜 그렇게 주책없게 그러는 건가?”
그 말에 화들짝 놀란 담당이 흐르던 눈물을 닦는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감격한 표정으로 키도에게 말했다.
“선생님. 드디어, 해냈습니다!”
“갑자기 뭔 소린가? 해내다니.”
“앙케이트요! 앙케이트에서 진심의 남자가 1위를 달성했습니다!”
그의 말에 키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뭣! 그게 정말인가?!”
“네에.”
그렇게 말하며 담당이 소매로 눈물을 다시 한 번 더 닦아낸다.
그 순간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그림을 그리던 어시들이 놀란 표정으로 머리를 들어올린다.
그리고는 곧 모두 환호했다.
“와아!”
“아싸아아!”
어시 중 누군가는 휘파람까지 불며 소리를 지른다.
그때 담당자의 문을 열어주고 따라 들어오던 키도의 부인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보. 드디어 달성하셨네요.”
“하하핫, 내가 말하지 않았소! 이번엔 확실하다고.”
“네. 모두 수고하셨어요.”
“자자, 이렇게 좋은 날 이럴 수는 없지. 자, 모두 작업 중지!”
키도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는 곧바로 아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음식을 준비해 주시오. 필요하면 사람을 몇 명 불러도 좋으니까.”
“아뇨.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먼저 간단한 요깃거리부터 준비할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부엌으로 간다.
“선생님! 전, 믿고 있었습니다. 불타라 마구 이상의 작품을 반드시 만들어내실 거라는 걸요.”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늘 하는 말이지만 의지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법이지.”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선생님. 이번 앙케이트 결과표입니다. 사실, 이거 가지고 나오면 야단맞는데. 편집장님이 특별히 허락하셨습니다.”
“하하, 그런가? 이리 줘보게.”
담당에게서 앙케이트 결과표를 받아본 키도가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표를 내려다본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끄덕이다 뭔가를 발견하고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이거. 3위에 있는 작품. 파시엔시아? 이게 뭐지? 이런 만화가 연재하고 있었나?”
“아, 네. 이거 이번에 처음 연재를 시작한 축구만화입니다.”
“처음 연재를 시작해? 그런데 3위?”
“네. 신작인데 첫 화가 나가자마자 단번에 3위에 등극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편집부에서도 상당히 놀라고 있습니다.”
“호오. 그래?”
그렇게 말하며 만화가 이름을 확인한다.
“텐겐? 누구지?”
“신인 작가로 알고 있습니다.”
“오, 신인이라니. 놀라운 재능이야. 그나저나 재미있는 이름다운 결과군.”
“혹시 아직 안 보셨습니까?”
“난 내 작품이랑 삼사라 말고는 안 본다네. 몰랐나?”
몰랐다.
하지만 티를 낼 필요는 없다.
그냥 잠시 잊었다는 듯 자신의 이마를 찰싹 때리며 말한다.
“아 참. 그렇지요.”
“그래도 이런 만화는 한번 봐야겠지.”
그렇게 말하더니 어시 중 가장 막내를 보며 말했다.
“이보게, 사다오. 거기 있는 소년 히어로 줘 보겠나?”
“네.”
막내어시가 서둘러 책은 가져다준다.
그것을 받아 곧바로 펼치자마자 파시엔시아를 발견했다.
“오, 권두 컬러. 시작하면서 꽤나 힘을 주고 시작했군. 편집부에서도 굉장히 기대하던 작품이었던 건가?”
“아뇨. 이건 편집장님이 결정하신 겁니다.”
“편집장 그 양반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괜찮은 작품이라 판단하면 강하게 밀어붙이는 타입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한 장, 한 장 넘겨간다.
그런데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다.
그림체만 따지고 보면 익숙한 느낌이긴 하지만, 그것과는 다른 뭔가 친숙함이 느껴지는 것이 이상하다.
마치 자신과 관련이 있는 듯한 묘한 느낌.
딱 부러지게 말하긴 힘들지만 본능적으로 자신의 그림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하는 그런 종류, 하지만 역시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왜 그러십니까?”
그림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자 담당이 물었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착각일지 모른다.
어차피 비슷한 느낌의 그림은 많이 있으니까.
“그나저나······, 시작장면부터 굉장히 인상적이군. 그냥 축구경기일 뿐인데, 뭐랄까······, 진짜 축구경기를 곁에서 보는 듯한 느낌. 거기다 주인공뿐만이
아니라 주변 인물들이 다 살아있는 것 같은 느낌이야.”
“네. 편집부에서도 시작부터 이렇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만화가 처음이라며 이런 분위기를 끌고 가면 앞으로 선생님과 선두를 다툴 거라고 생각하고 있
습니다.”
“······그래. 잠시라도 정신 줄을 놓치면 단숨에 1위를 빼앗길지도 모르겠어. 이런 괴물 같은 신인이 또 있었다니. 과연 세상은 넓고 천재는 많군.”
그렇게 말하며 이를 드러내며 웃더니 곧바로 눈을 반짝였다.
“이미 1위를 얻은 이상 누구에게도 왕좌의 자리를 내어줄 수는 없지.”
그때 부엌 쪽에서 키도의 부인이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어서들 오세요! 준비 됐어요!”
그 순간 어시들이 우르르 부엌 쪽으로 달려간다. 곁에 있던 담당도 어느새 부엌으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키도가 어색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더니 뒷짐을 지고는 부엌으로 천천히 걸어간다.
“크음. 나도 부인이 만든 간식 맛이나 좀 볼까?”
< 1위 쟁탈전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