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위 쟁탈전 (1) >
파시엔시아의 원고를 살피던 편집장이 머리를 끄덕인다.
“삼사라와는 상당히 느낌이 다르네.”
“네. 화실인력으로는 어렵다고 친분이 있는 화실의 도움을 받았다고 합니다.”
“역시 그런 방법으로 해결했군. 전에도 느낀 거지만, 이 사람들 인맥이 상당하군.”
그렇게 말하며 원고를 모두 살핀 후 다시 지로에게 돌려주었다.
“그림은 솔직히 삼사라에 비해 좀 부족해 보이긴 하지만, 스타일이 완전히 다른데다가 축구경기의 현장감이 좋아서 그런 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을 정
도야.”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파시엔시아의 첫 번째 완성원고를 지로가 가져왔을 때, 솔직히 편집장은 걱정하고 있었다.
데생은 분명 대단하긴 했는데, 화실의 사정을 이미 들은 상황이라 갑자기 주간연재를 한편 더 한다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괜한 욕심으로 삼사라의 퀄리티를 떨어뜨린다면 그나마 유지되고 있는 인기순위가 떨어질 것이고, 그것이 다시 빌미가 되어 전무 라인의 임원들에게 또
공격을 당할 테니까.
아니, 그보다 더 문제는 삼사라가 단행본에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된다면 차라리 연재를 말렸어야 하
는 게 맞을 테니까.
그런데 막상 완성된 원고를 보니 그런 걱정이 기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물론 세세한 완성도는 솔직히 써니의 화실만큼의 디테일은 없지만, 스포츠 만화답게 시원시원한 펜선으로 인해 더 느낌이 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배경도 그림자 방식이 노련하게 표현되어 완성도는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집중선 같은 경우엔 강렬함이 커서인지 인상에 남을 정도다.
세밀함을 잃고 시원스러움을 얻었다고나 할까.
그 다음은 데생의 복사본을 확인한다.
데생의 완성도는 일정해서 그림에 대한 불만은 없다. 스토리도 이미 네임 때 확인했으니 이정도면 계획대로 하면 될 것 같다.
“연재는요?”
역시 지로도 그 문제가 가장 시급한 지 편집장에 묻는다.
편집장이 웃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해야지. 자리는 생겼으니까 다음 주부터 바로 들어가면 되겠다. 그리고 이거 첫 편은 아예 권두 컬러로 들어가자.”
“권두 컬러요?”
“그래. 화끈하게 첫 연재를 컬러로 장식하며 출발시켜보자. 느낌이 나쁘지 않으니까. 그나저나 원래 처음부터 일본인은 아니었겠지?”
“네. 원래 주인공은 강성철로 한국인이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 연재하기 위해 치바 켄토라는 이름의 일본인으로 바꾼 겁니다.”
안 그래도 그 문제로 지로는 이윤환과 이미 논의를 한 상태였다.
그렇게 최종 결정된 이름이 치바 켄토다.
켄토라는 이름이 굳건하다는 느낌이 있어 그것으로 결정한 것이다.
“그건 잘 한 일이야. 안 그러면 독자들이 주인공에게 몰입하지 못할 테니까.”
“네.”
“그나저나 필명이 텐겐이라니. 꽤 재밌네. 뭔가 사람들의 관심도 많이 받겠어. 아무튼 텐겐에 대해서는 자네도 입조심하고. 팀장에게는 내가 미리 일러
둘 테니까. 주변 직원들한테도 쓸데없이 말하지 말고. 임원들과 연결된 직원들이 몇 있으니까, 잘못하면 그쪽으로 이야기가 새어 들어갈지도 모르니까.”
“알겠습니다.”
“가뜩이나 한국인을 뽑았다고 불만이 많은 양반들인데, 같은 작가가 작품을 두 개나 잡지사에 올리게 될 걸 알게 되면 미쳐 날뛸 거야. 그나저나 그 인
간들 평소엔 관심도 없더니, 이번엔 왜 이렇게 사사건건 시빈지······.”
편집장이 더 중얼거리다 지로가 옆에 있는 걸 보고는 곧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손을 휘적거린다.
“자자, 이젠 돌아가서 일 하라고.”
“네.”
완성된 원고는 곧바로 컬러 전문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의뢰가 들어갔다.
동시에 주간소년 히어로에선 ‘파시엔시아’에 대한 홍보를 시작했다.
편집부 내에선 파시엔시아를 지로가 맡은 또 다른 신인작가의 작품정도로만 알려져 있었다. 그 덕분에 이미 삼사라로 바쁠 텐데도 또 실력 있는 신인을
잡았다며 부러워하는 동료직원들도 제법 보였다.
그러나 이번 신인도 한국인 만화가 써니처럼 얼굴을 보기 힘들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편집부 내에선 직원들이 지로를 보면 인사처럼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아카기 씨는 얼굴 없는 만화가가 전문이야?”
그럼 지로는 그저 웃고 넘길 뿐이었다.
아무튼 파시엔시아로 바쁜 와중이긴 하지만 여전히 성적이 10위에 머물러 있는 삼사라로 인해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편집부에선 누구나 인정하고, 알고 있는 만화가들은 죄다 삼사라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기 바쁜데도 어째선지 성적이 계속 지지부진했으니 당연한 일이
었다.
그나마, 완전 하위권으로 추락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보통은 이런 성적의 작품들이라면 한권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서 슬슬 연재를 그
만두라는 분위기를 띄우고 곧 연재를 끝내라는 요구를 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중간 순위에 계속 버티고 있으면 애매해 결정을 미루게 된다.
더 신기한건 신작이 연재를 시작하고, 고정된 1위 작품이 없다보니, 수시로 순위변동이 있음에도 항상 비슷한 자리에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상위권에서 하위권으로 밀려나 사라지는 작품이 하나둘 나오고 있음에도 그 현장은 변함이 없었으니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자리에 앉아 일러스트레이터들의 전화번호를 확인하는데 그때 한쪽에선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3위요?”
“그래. 이번에도 순위가 4계단이나 뛰어올랐어.”
“아하하, 역시 키도 선생님이 이번엔 자신 있다고 그렇게 큰소리치시더니.”
키도 죠타로의 담당이었다.
얼마 전부터 연재를 시작한 키도죠타로의 신작 ‘진심의 남자’가 요즘 엄청난 기세로 상승 중에 있었다.
키도의 기존 작품이 열혈에다 알 수 없는 전개로 인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번 작품은 놀라울 정도로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썼
다는 게 느껴질 정도로 성장했다.
분명 스토리의 방식이 키도의 것이라 여겨지지만 대부분, 실력 있는 작가가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
물론 담당은 절대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튼, 그 덕에 편집부에서도 이번 작품에 거는 기대가 커졌다.
아직은 확고부동한 1위 작품이 없는 상황이라 조만간 1위를 차지하고 특별한 이변이 없는 한 독주할거라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그나저나 어떻게 키도 선생님을 구슬린 거야? 그동안 그렇게 널 괴롭히더니. 역시······. 긴자에서 한잔 한 게 효과가 있었던 거냐?”
“키도 선생님은 역시 술이랑 여자 아닌가?”
“아, 부럽네. 우리 모리모토 선생님도 이번엔 대작 한편 내실 때도 됐는데. 어때? 좀 가르쳐 줘봐.”
“하하하.”
담당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본 지로도 웃으며 다시 일러스트레이터의 전화번호를 확인하고는 다이얼을 돌렸다.
“아, 마미야 씨? 안녕하세요. 주간소년 히어로 편집부 아카기입니다. 실은 이번 신작 권두 컬러 문제로 전화 드렸는데요······.”
***
키도 죠타로의 화실에 찾아온 담당편집자가 호들갑을 떨었다.
“키도 선생님! 이번 신작 ‘진심의 남자’ 반응이 엄청 좋은데요. 편집부에서도 난리입니다.”
편집자의 말에 키도가 껄껄 웃었다.
“당연하지! 내 동생 유난이 자신을 불살라가며 이 형을 도왔으니까.”
“유난? 전에 말씀하신 천군만마 같은 조력자, 그 분 인가요?”
“그래. 맞네. 바로 그 친구지.”
“혹시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실 수 없으십니까?”
“그래, 담당인 자네에게까지 굳이 입 다물고 있을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더니 눈앞에 있는 차의 향기를 한번 음미한 후 살짝 맛을 보고는 곧 입을 열었다.
“자네 삼사라 알고 있지?”
“당연하죠. 소년 히어로에 연재중인데 모를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삼사라가 왜요?”
“삼사라 어때?”
“어떻긴요. 대단한 작품이죠. 물론 아직 잡지 성향이랑 맞지 않은데다가 조금 마이너 한 소재라 인기가 크게 없다는 게 아쉬운 그런 작품이죠.”
“잘 아는군. 바로 그 삼사라의 스토리를 쓴 친구가 바로 나와 의형제를 맺은 유난이지. 당연히 그림을 그린 써니도 마찬가지고.”
“아, 스토리 작가가 유난이라는 분이군요. 그런데 의형제요? 설마 도원결의 같은 거 말씀이십니까?”
담당의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다시 크게 웃었다.
“아하하, 맞아. 그래. 도원결의.”
키도의 담당은 순간 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설마 출판사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써니와 의형제를 맺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있었다.
이미 과거 써니와 유난이 편집부에 찾아온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그리 주목하는 사람이 없어 제대로 관심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키도가 좀 별난 사람이기는 해도 그런 사람들과 그 정도로 절친해 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탄스러운 일이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전에 하도 닦달하셔서 들은 이야기를 알려드렸지만, 설마 그분들이랑 의형제까지 맺으셨다니.”
“그럼. 내가 누군가. 하하핫.”
키도가 웃자 담당도 같이 웃었다.
어쨌거나 키도의 말대로 유난이라는 작가의 도움을 받은 탓인지 이번 원고의 스토리도 시작부터 화끈해서 눈에 확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임도 살펴보니 앞으로 나올 몇 화 분 역시 거침없이 이야기가 시원시원해서 딱 봐도 소년 히어로 1위는 조만간 차지할 게 틀림없었다.
현재도 1-2위와도 거의 격차가 나지 않는 상황이라 언제 1위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앞으로 진행될 전체적인 이야기도 대충 잡혀있다네.”
“정말입니까?”
“그렇지. 이번엔 예전처럼 뜬금없는 이야기로 빠지지 않을 것이야. 유난이 그 점을 내게 명심하라 몇 번이고 당부했지. 그래서 그것을 이렇게 적어두었
다네.”
그렇게 말하며 평소 들고 다니는 메모노트를 보여준다.
담당이 슬쩍 보니, 과연 이전의 작품과 달리 제법 세세한 내용까지 꼼꼼하게 적혀있다.
메모만으로 정확한 이야기를 파악하긴 힘들지만, 역시 유난이라는 사람이 대단하긴 대단한 모양이었다.
평소 어지간한 스토리 작가의 글은 쳐다보지도 않던 인간이 이렇게까지 충성하는 걸 보면.
“이대로 1위를 한번 쟁취해 보겠네.”
“힘내십쇼. 작가님. 이참에 1위 하시게 되면 그대로 독주를 해 버리시죠.”
“하하, 당연하지!”
오랜만에 만화가가 이렇게까지 열정을 뿜어대니 담당으로서는 기꺼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 그런데 키도 선생님.”
“왜 그러나?”
“써니 선생님과는 의형제라고 말씀하셔서 생각이 난건데 편집부 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이상한 소문? 뭔데 그러나?”
“임원회의에서 삼사라가 거론되었다고 합니다.”
“역시, 우리 유난, 써니의 재능을 그 멍청이들도 알아본 거구만. 역시 대단한 동생들이야.”
키도의 말에 그게 아니라는 듯 담당이 손을 세운채로 흔들며 말했다.
“그게 아니고요. 전무 쪽에서 삼사라의 인기가 저조하다는 걸 문제 삼았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헛소리냐! 인기가 저조해서 문제 삼아?! 이제 겨우 몇 편이나 나왔다고 그런 망발을 하는 거야!”
“사실, 편집부에도 인기결과에 대해서는 의문점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잡지 성향이랑 맞지 않아서 일거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데 임원 회의실에서 그런 회의가 오갔고 그 때문에 편집장님이 불려가셨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전부 쉬쉬하는 분위기라 정확한 내용은 모릅니다만. 사실,
편집장님도 그 문제에 대해선 전혀 언급을 안 하시는 터라.”
그 말에 키도가 이를 갈았다.
“망할 임원 놈들. 그런 멍청이들이 윗선에 자리 잡고 있으니. 잡지사가 발전을 하지 않는 걸세. 써니의 만화가 대단하다는 건 만화 쪽에 발을 걸치고 있
는 놈이라면 누구라도 인정하고 있는 일이거늘.”
“아무튼 요즘은 그것 때문에 편집부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습니다.”
“능력도 없는 것들이 높은 곳에 처 앉아서 그러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 역시 그 임원 녀석들을 손 좀 봐줘야······.”
키도가 팔을 걷어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서둘러 담당 편집자가 서둘러 그를 말렸다.
“아이고, 선생님. 고정하세요. 그러시면 제가 곤란해집니다.”
“그런 멍청한 놈들은 내가 직접 따끔하게······.”
“그 마음은 제가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요. 제발 제 입장과 편집부를 위해, 아니 써니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크음, 그런가.”
키도의 돌발행동을 겨우 진정시키고 나서야 담당은 이내 한숨을 내쉬며 안심할 수 있었다.
< 1위 쟁탈전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