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상가상 천원돌파 (8) >
다음날 약속대로 박상식과 함께 전상길의 화실로 찾아갔다.
“어, 왔어?”
전상길이 우리를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하며 웃는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 면도도 깔끔하게 하고 머리도 단정하다.
이제야 예전의 스마트한 모습을 찾은 것 같다.
하지만 화실을 둘러보니 휑하다.
이젠 B팀도 없는 마당이니 A팀이라는 것도 의미가 없다.
실내야 뭐 그대로지만, 책상은 몇 곳이 비어있어 을씨년스럽다.
추양구는 한쪽에서 한참 작업 중이다.
그나저나 일거리가 없다고 들었는데. 뭐지?
아무튼 그도 우리를 보더니 슬쩍 머리를 숙여 인사한다.
박상식과 내가 마주 목 인사를 하고는 곧바로 전상길에게 다가가 데생원고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본 전상길이 머리를 끄덕인다.
“내 말대로 조금 단순화 시켰네. 그림자 부분은 자세하게 표현하지 않고 그냥 먹칠로 묘사한 것도 좋고. 이 정도면 작업시간이 많이 단축될 것 같군.”
전상길의 의견을 받아들여 배경데생을 그림자 기법으로 처리했다.
이 기법을 위해 어제 이태원에 들러 이 기법을 사용한 일본만화 단행본들을 구해 선희에게 보여주고 이 방식으로 그려달라고 주문했더니 금방 배경을
이 방식으로 고쳐버렸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건 아니라지만 그래도 단번에 적용할 줄은 정말 몰랐다.
아무튼 그 덕분에 전상길이 배경을 확인하며 놀라고 있다.
“그나저나 다시 봐도 대단한 그림이네. 나도 배우고 싶을 정도라니까.”
그렇게 말하더니 곧바로 추양구를 부른다.
그러자 작업을 멈춘 추양구가 우리가 있는 자리 쪽으로 다가왔다.
“양구야, 내가 말한 데생원고가 이거야. 네가 보기엔 어때?”
추양구가 데생 그림을 살펴보더니 눈이 가늘어진다.
그리고는 곧 입을 열었다.
“괜찮네요. 이정도면 해볼 만하겠어요.”
“그렇지?”
“네.”
“그럼, 저희가 이정도의 데생을 넘기면 작업이 가능하다는 겁니까?”
내 질문에 추양구가 큰 문제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네. 이미 꼼꼼하게 데생이 되어 있으니까 그리 어렵지는 않습니다. 인물 쪽은 제가 커버가능하고, 자를 사용하지 않는 배경도 제가 좀 담당하면 나머지
는 저 친구들이 마무리 할 겁니다.”
한쪽자리에 앉아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몇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들도 일하는 중이네?
그림 연습하는 걸로 보이지는 않는데. 다시 일을 시작한 건가?
“원고료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
“네. 일단 원고료는 페이지 당 완성하는 걸로 계산해서 7천원 드릴게요.”
“완성 페이지 당 7천원?”
“네.”
일본에서 받는 페이가 대충 2만천 원 정도니까, 1/3이다.
이정도면 우리 쪽에서 봐도 이익이다.
우리 화실 어시비용은 훨씬 더 드니까.
거기다 전상길의 입장에서도 괜찮은 조건이 될 것이다.
주당 20페이지.
한 달이면 80페이지 이상이다.
적어도 56만 원 이상의 추가 수익이 발생하는 거니까.
“너무 팍팍 쓰는 거 아니냐? 우리야 좋긴 하지만.”
역시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박상식과 내게 엄청난 현금을 팍팍 건네던 그가 조금 초라해진 것 같아서 마음이 짠하다.
“원고 잘 부탁드릴게요.”
“알았어. 나와 양구가 책임지고 관리할 테니까.”
“고맙습니다. 그건 그렇고, 다시 일 시작하신 겁니까? 어째 화실 분위기가······.”
내 말에 전상길이 입 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허리를 끊는다.
“바빠 보인다고?”
“······네.”
내 대답에 전상길이 팔짱을 끼며 소파에 등을 푹 파묻었다.
“오늘부터 시작했지.”
“네? 지금 선생님 불량 작가로 낙인 찍혀서 활동 못한다고 하시 않으셨어요?”
“그랬지.”
“그런데 갑자기······.”
“그게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어떤 정치인의 개입이 있었던 모양이야.”
“정치인의 개입이요?”
무슨 소리지? 정치인의 개입이라니.
막후 권력자들의 암투, 뭐 이런 건가?
“그래. 나도 어제저녁에 알았는데, 운 좋게 불량만화 리스트에서 빠졌다는 모양이야. 그래서 다시 작업 중단되었던 원고 시작하고 있어. 물론 사람이 부
족해서 많이는 못 그리지만, 뭐. 네 덕분에 부수입도 올릴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조금만 더 버티면 어찌어찌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다.”
좀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래요? 그거 다행이네. 그런데 무슨 일이죠? 다른 사람들도 리스트에서 다 빠진 거예요?”
“아니, 나만 빠진 것 같더라.”
“네? 혼자 만요?”
내가 황당해 하며 웃자 전상길이 웃으며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며 불을 붙인다. 그리고는 한 모금 힘껏 빨고는 길게 연기를 뿜으며 피식 거렸다.
“웃기지?”
“혹시 정치인 중 알고 있는 사람 있어요?”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내가 정치인을 알고 있었으면 이 꼴이 났겠냐?”
“하긴.”
“사실, 이번에 당한 것도 인기가 있어서 당한 게 아니야.”
그 부분은 나도 좀 이상하긴 했었다.
인기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불량만화라는 게 언뜻 이해가 되지 않았으니까.
“그럼, 이유가 뭔데요?”
“예전에 나랑 좀 얽힌 게 있는 출판사 사장이 친분 있는 정치인에게 부탁을 한 모양이더라고.”
“네?”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무슨 그런 경우가 있는 건지.
“솔직히 이정도 일이야 큰 권력 필요 없거든. 슬그머니 내 이름이랑 만화, 그리고 적당한 이유 두어 가지 붙여놓으며 되는 거니까. 그 다음은 확! 활활!”
전상길이 불이 타오르는 것을 행동으로 묘사하며 쓴 웃음을 지었다.
“학부모, 뭐 그런 단체라면서요.”
“단순한 학부모단체가 이런 규모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저런 단체도 돈이 있어야 굴러가는 거고, 돈이 모이는 곳에는 이런저런 오만 것들이 꼬이
는 법이지. 어쨌건, 학부모연합이고 지랄이고, 뒷배가 없이는 그렇게 요란한 화형식 못하지. 언론까지 움직일 정도였으니까. 예전에도 합동출판사 놈들 경
쟁출판사 죽일 때 자주 사용하던 수법이야. 뭐, 나도 아는 선배한테 들은 얘기지만. 아무튼 이 바닥이 이렇게 추하고 더럽다.”
난 이런 복잡한 얘기는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아무튼 전상길은 정치나 뭐 이런 사회문제 쪽 관련해서는 아는 게 좀 있는 모양이다.
“어? 그럼 이렇게 그냥 아무런 대비도 없이 작업을 시작해도 되는 거예요? 이러다가 다시 또 그런 일이 반복될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그게 참 공교롭기는 한데, 이번 일에 앞장섰던 그 정치인이란 사람, 이번에 뇌물혐의로 잘린 모양이야. 아무래도 너무 많이 받아쳐먹은 모양이더라고.
거기다 그 출판사 대표도 이번에 한꺼번에 쓸려가 버렸어. 뭐 나한테는 좋은 일이지만 말이지. 그 자식들 꼴좋게 되었어.”
그렇게 말하더니 낄낄 웃는다.
내가 모르는 곳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구나.
누군지는 모르지만 전상길을 도와준 사람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운이 좋았나?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어떻게 아셨어요?”
“야, 그래도 내가 이 바닥에 지낸 게 얼만데. 한 다리만 건너도 아는 언론인들이 꽤 돼.”
“아.”
특별히 친한 사람은 없다는 얘기군.
아무튼 뭔가 다른 세계의 이야기라 현실감이 좀 없긴 하다.
“어제 그 데생원고는 가져왔어?”
“네. 몇 장면 수정해서 작업한 겁니다. 자세한 건 여기.”
원고 작업 시 유의해야 할 점을 세세하게 적어둔 종이 한 장을 건넸다.
평소 화실에서도 작업 중엔 선희가 어시들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요구한다. 그런데 아무래도 대화에 능숙하지 않아서, 이렇게 메모를 넘겨 나눠주는 일
이 많은데, 이번 작업의 경우 데생을 모조리 넘기는 경우라 세세하게 적어둔 것이다.
간단한 화이트나 톤 작업의 경우엔 우리 화실에서 작업할 테지만, 그 전에 생길 수 있는 문제를 미리 방지하기 위함이다.
“와, 꼼꼼하게 잘 썼네. 글씨도 참 좋고.”
그렇게 말한 전상길이 글을 읽어보더니 곧바로 그것을 추양구에게 넘긴다. 그리고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자, 그럼 오더를 받았으니 작업을 시작해야지.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전상길이 웃으며 장난스럽게 인사하자 나도 웃으며 그의 말을 받았다.
“하하, 네. 선생님.”
전상길의 화실을 나서고 나자 박상식이 턱을 긁적이며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나저나 전 선생님 리스트에서 빼준 사람이 누굴까?”
나라고 해서 아는 게 있을 리 없다.
“선생님이랑 친분이 있는 사람이 일부러 알리지 않고 도와줬나보지. 그게 아니면 말이 안 되잖아. 리스트에서 단번에 빼는 게 쉬울 리도 없을 텐데.”
“선생님 궁지로 몬 정치인이랑 출판사 인간들도 도와준 사람이 해결한 건가?”
“하하, 그건 너무 만화 같은 이야기잖아. 무슨 키다리아저씨 정치인도 아니고.”
내가 웃으며 말하자 박상식도 웃으며 머리를 끄덕인다.
“그렇겠지? 하긴, 그만한 권력을 쥔 사람이랑 전 선생님이랑 친분이 있다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오, 이거 만화 소재로 쓰면 재밌겠다.”
그렇게 말하더니 뒷주머니에서 조그마한 메모용 수첩을 꺼내 볼펜으로 적는다.
박상식도 요즘엔 주로 내가 만드는 이야기를 콘티로 짜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스토리 작가다. 예전에 쓰던 곰탱이 시리즈를 다시 부활시키려
는 생각도 하는 모양이고, 이렇게 틈틈이 아이디어가 생길 때마다 메모도 하고 있다.
아무튼 그렇게 걷고 있는데 길 건너편에 영화 간판이 보인다.
손가락 두 개가 붙어있는 그림.
영화 E.T 다.
“재개봉인가?”
내가 간판을 보며 말하자 박상식이 웃는다.
“재개봉은 무슨, 어제 개봉한 거구만.”
“뭐? 어제? 저거 82년에 나온 영화 아니야? 그리고 애들 사이에선 노래도 엄청 유행하던데.”
“뻔 하잖아. 인기가 많으니까 수입업자들끼리 서로 수입하겠다고 싸우다가 계속 미뤄진 거지. 덕분에 한참 유행이 다 지나가려 하니까 이제야 개봉한
거고. 하여튼, 업자들 때문에 제때 영화보기 힘들다니까.”
하긴, 박상식은 SF영화를 상당히 좋아하니까 개봉을 기다려 왔겠지.
“이번 일요일에 우리 식빵같이 생긴 이티나 보러 갈까나.”
간판을 보며 싱글거리던 박상식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
[화합과 번영의 길 88올림픽 고속도로. 전두환 대통령은 영부인 이순자여사와 함께 새 고속도로의 호남 시발점인 담양군······.]
점심시간.
엄마와 화실 식구들이 식사준비에 여념이 없는 동안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그런 와중에도 선희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열심히 원고 작업에 열중하고 있다. 물론 워크맨과 이어진 헤드폰을 귀에 낀 채로 말이다.
그동안 활력이 떨어져 보이더니 모처럼 열의에 차 있는 모습이다.
나름 선희를 생각해서 여유 있게 한다는 생각에 삼사라 하나만 하라고 충고를 했었다. 그런데 그게 이 아이에게는 제약이 되었던 것일까. 지금 선희의
눈은 이제까지와 전혀 달리 불이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이 보인다.
거기다 이미 삼사라는 다음 연재분이 완성돼 있는 상황이라 오로지 신작 축구만화인 ‘파시엔시아’에만 열중할 수 있는 환경이니 모든 것을 쏟아 붓는 듯
한 느낌이다.
“식사 준비 됐어요.”
“작은 선생님. 식사하세요.”
화실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 음식이 가득 차려졌다.
오늘은 음식이 좀 요란하다.
중국집에서 탕수육이랑 깐풍기도 배달시켜둔 탓에 음식이 넘친다.
늦었지만, 저번 달에 중학교 검정고시에 합격한 누나를 축하하는 겸하는 식사다.
그렇게 모두 테이블에 모여앉아 왁자지껄한 식사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때 전상길 화실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안녕하세요. 저기 완성된 원고입니다.”
“같이 식사하세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지 어색해 한다.
“아, 괜찮은데······.”
“오늘은 축하해줄 사람이 한명이라도 더 있으면 좋은 자리니까, 사양 마시고.”
“아, 네. 고맙습니다.”
테이블 위에 차려진 음식에 눈을 떼지 못하던 전상길 화실의 문하생이 못이기는 척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나는 그 사이 그가 가져온 원고를 살
폈다.
1화 분량의 원고.
작업시간은 대략 3일정도 걸린 것 같다.
대본소 전문 공장만화를 그리던 사람들이라고 해서 조금 걱정하기는 했는데, 퀄리티를 중시하는 원고라는 사실 때문에 공을 들였는지 상당히 퀄리티가
좋다.
이제는 며칠 후 찾아올 지로에게 이것을 넘겨주면 되는 것이다.
< 설상가상 천원돌파 (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