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80화 (80/425)

< 설상가상 천원돌파 (7) >

- 텐겐(천원)이요? 무슨 뜻이라도 있나요?

“바둑의 가장 가운데 있는 화점을 천원이라 불러요.”

- 아, 바둑이었군요. 요즘 바둑이 인기이긴 한데, 저는 잘 몰라서. 아무튼 중심이군요. 뭔가 좋은 뜻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조치훈 명인이 작년에 대

삼관(大三冠)을 달성했다는 뉴스는 본 것 같습니다만, 혹시 그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요?

“아뇨. 그건 아닙니다.”

그냥 천원돌파 그렌라간이 떠올라서 즉흥적으로 쓴 이름일 뿐이지만. 그리고 사실, 난 바둑  이라고 해봐야 ‘히카루의 바둑’만화 정도만 알 뿐 조치훈이

누군지는 잘 모른다.

“그래도 가명까지 생각해서 연재하려 하다니, 위험한 거 아니에요?”

“위험이라뇨?”

“분명히 미쯔다쇼텐의 계열잡지가 몇 개 더 있는 걸로 아는데, 굳이 한 잡지에 몰아넣는 거요. 만화가들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좋아하지 않을 거고.”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굳이······?”

“뭐, 편집장님께서 결정한 일이라서요.”

“편집장님이요? 왜요?”

“아, 뭐. 제 생각이긴 합니다만, 아마도 한국말로 표현하자면 죽 쒀서 개 준다는······. 그런 짓은 하기 싫다, 뭐 그런 거겠죠.”

그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하지만, 그 만큼 파시엔시아가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니 기분 좋은 일이다.

“필요한 건 완성된 1회분의 원고와 데생원고 5화까지입니다.”

“네. 알겠어요.”

일단 주간소년 히어로에서 OK 사인은 떨어졌다.

확정이라고 딱 말할 수는 없지만 뭐, 대충 9부 능선은 넘었다고 보고, 이제는 1회분의 원고를 완성시키면 된다.

사실 1회분의 원고를 완성시키는 거야 큰 일이 아니다. 급한 대로 선희가 해버려도 되니까.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 다음의 원고까지 계속 완성할 것이냐 하는 점이다.

지금 어시들은 삼사라 때문에 바쁘니까,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한다.

그 문제에 대해선 오늘 낮에 생각해 둔 것이 있다.

*

오랜만에 다방에서 전상길을 만났다.

얼마 전까진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던 사람이었는데, 액운이 몇 번 겹치고 났더니 10년은 폭삭 늙어버린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완전히 딴 사람 같아 보

인다.

노숙자랄까, 인생의 패배자 같은 모습이다.

모처럼 만나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난 뒤 본론을 꺼냈다.

“선생님, 화실 문하생들 남은 인원이 얼마나 됩니까?”

“뭐, 배경맨 몇이랑 터치, 뒤처리해서 13명.”

“데생맨이나 인물터치는요?”

“양구 한 명 빼고 다 튀어버렸어.”

쯧, 하며 혀를 차더니 얼굴을 찌푸린다.

생각하기도 싫은 표정이다.

“왜 그런 겁니까?”

“뭐, 이번에 제대로 한방 먹었잖아. 그러니까, 뭐 미래가 안 보인다는 둥, 앞으로 꼬였다는 둥 하며 자기들끼리 이런 저런 얘기가 있었던 모양이지. 인기

작을 날린 건 뼈아픈 일이지만 그래도 충분히 재기할 수 있는데 말이지.”

그렇게 말하며 목뒤를 몇 번 문지른다. 목이 뻐근한 모양이다.

“그래도 어떻게든 유지해보려고 했는데, 할 수 없는 일이지.”

“남은 사람들은요?”

“지금 있는 녀석들은 어디 갈 데도 없어서 그냥 있는 거야. 실력이라도 좋으면 다른 화실에서 데려갈 텐데 말이지. 그렇다고 고향에 돌아갈 수도 없는

녀석들이라.”

전상길의 덥수룩한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웃는다.

“그런데 철호 형에게 갔었다며. 어떻게 됐어?”

“가긴 했는데.”

“그런데?”

“뭐? 스토리가 너무 진짜 같아서 어렵겠다고 하시더군요. 평발 스트라이커 같은 스토리가 좋다고.”

그 말에 전상길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그 형, 평발 스트라이크 엄청 좋아했거든. 만날 부럽다고 그렇게 떠들더니. 그나저나 진짜 같다니, 이번엔 다른 스토리를 만들었던 거냐?”

“네.”

“오, 그래? 궁금하네. 혹시 그거 지금 있어?”

“네. 가지고 왔어요.”

“잘됐네. 한 번 보여줘.”

그 말에 박상식이 콘티노트를 꺼내 전상길에게 내밀었다.

“아, 이거구나. 읽어봐도 되지?”

“그럼요.”

그가 콘티노트를 펼치더니 곧바로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참동안 읽더니 곧 머리를 들어서는 날 보며 피식 웃는다.

“넌, 진짜. 유별나구나.”

“네?”

“그렇잖아. 평발 스트라이커 같은 히트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굳이 이렇게 다른 스타일의 스포츠이야기를 만들다니 말이야. 누가 봐도 유별난 거

지.”

그렇게 말하며 웃는다.

하기야, 이런 위급한 와중에도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을 시도하고 있으니 미치광이로 보이겠지.

“뭐, 같은 이야기는 한 작품만으로도 족하니까요.”

“야, 어떻게 한 사람이 무작정 다른 스타일의 작품을 계속 만들 수 있냐? 한계가 있지. 상식아 안 그러냐?”

“보통은 그렇죠.”

“뭐야, 그 반응은. 네 말은 윤환이가 보통인간은 아니라는 거냐?”

“솔직히 그렇잖아요.”

그 말에 전상길이 다시 크게 웃는다.

“야, 너희들 완벽한 팀이다. 완벽해.”

“내용은 어떻습니까.”

“아 참. 콘티 이야기 중이었지. 내 정신 좀 봐.”

그렇게 말하며 전상길이 웃음을 멈춘다. 그리고는 곧 헛기침을 하고는 목을 진정시킨다.

“재미있어. 충분히 가능성도 있고. 다만, 익숙지 않은 스페인리그를 배경으로 했다는 건데, 그거야 뭐 재미있으면 어떻게든 해결되는 문제라고 생각하

니까.”

그렇게 말하더니 담배를 꺼내 물며 불을 붙이고는 길게 한 모금 빨아 당기고는 곧 내뱉는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좀 불안하긴 하네요.”

“나도 지금 화실이 정상적이라면 한번 도전해보고 싶은 이야기이긴 한데. 좀 아쉽네.”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의논을 하려고요.”

“의논?”

전상길이 묘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네. 이번 신작, 선생님 화실에 도움을 좀 받을까 해서요.”

그 말에 전상길이 피식 웃더니 담배를 끼운 오른손을 휘적거리며 말했다.

“도움이고 뭐고 인원이 모자라서 안 돼. 거기다 핵심 인원들도 몽땅 빠져나간 상황이라서.”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저희가 데생원고를 넘겨주면 그걸 마무리하는 겁니다.”

“마무리? 아니, 그보다 너희가 무슨 데생원고를 만들어? 설마 만화 그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사실, 전상길은 우리가 콘티를 만든다고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이대봉도 우리화실 사정을 전상길에게 알리지 않았으니까.

“저와 상식이 형은 아니고요. 제 동생이요.”

“동생? 전에 졸업식 때 본 쌍둥이 여동생들 말고 또 다른 동생이 있는 건가?”

“아니요. 그 쌍둥이 중 한명입니다.”

“뭐? 이제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걔들 중 한명?”

“네.”

“그럼 여자애?”

“네.”

내 대답에 전상길의 입에서 헛바람이 푹 하고 튀어 나온다.

“정말 난 집안이네. 난 집안이야. 오빠는 스토리 천재에 여동생은 만화천재라니. 너무 비겁한 거 아닌가?”

그의 푸념 같은 말에 내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대본소 전문 출판사랑 계약한 거야? 아니면 월간지?”

“해주실 수는 있습니까?”

“뭐, 우리 애들 작업비만 챙겨줄 수 있으면 나야 고맙지. 안 그래도 지금은 일감이 없어서 나도 월급을 줄 사정이 안 되거든. 갈 데가 없어서 계속 머물

러 있겠다는데 쫓아낼 수도 없잖아. 그런데 네가 일감을 주면 그럭저럭 버틸 수 있을 테고 시간이 좀 흐르면 나도 기반을 잡아서 시작해야하는데 그때까

지 우리 애들이 곁에 있으면 다시 시작할 때 큰 힘이 될 테고.”

아마도 지금은 블랙리스트에 올라가서 당장 연재는 어려울 것이다.

블랙리스트야 시간이 흐르면 자동으로 풀리겠지만, 문제는 그게 언제냐는 것이다.

말은 안하지만 속으론 얼마나 답답할까.

“그나저나 어디랑 계약했는데?”

“일본 출판사입니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전상길이 입에 물었던 담배를 떨어뜨렸다. 그 순간 화들짝 놀라 다시 담배를 주워 물었다.

“뭐? 일본? 네 동생이?”

“네.”

“제대로 확인한 건 맞아? 혹시 사기꾼들은 아니고?”

“지금 현재 만화를 연재중입니다. 주간소년지인데, 책도 집에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대충 일본 출판사와 계약하게 된 경위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사실, 졸업식에 좀 더 머물다 갔더라면 담당인 지로와 만났을 테지만, 그땐 바쁘다는 이유로 꽃다발이랑 용돈만 주고 돌아가는 서로 어긋나 버렸으니까

서로 만나지는 못했었다.

어쨌건 대략적인 내용을 설명해 주자 감탄한 표정이 되었다.

“진짜 대단하네.”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곧 정색하며 물었다.

“그럼 우리가 해야 하는 건 그 연재중이라는 그 만화야?”

“아뇨. 새로 연재할 겁니다.”

“또? 기존 연재물은 끝난 거야?”

“아뇨. 하나 더 연재를 하려고요.”

“하나 더·······라니. 진짜 너무하는구만.”

그렇게 말하며 싱글거리더니 박상식을 돌아본다.

“그런데 너는 이런 놀라운 얘기를 어째서 나한테는 한 번도 이야기 하지 않았냐?”

그 말에 박상식은 뒷머리를 긁으며 웃을 뿐이다.

“대봉이 그놈도 알고 있었어?”

“네.”

전상길의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린다.

“그놈은 평소엔 묻지도 않는 얘기는 잘도 떠들더니, 그런 얘기는 왜 안하고 그래? 하여튼 이놈이나 저놈이나. 아, 배신감 느껴지네.”

불만이라는 듯 투덜대더니 갑자기 내 쪽으로 머리를 쭉 내민다.

“일본 진출하던 이야기 좀 더 자세하게 얘기 해줘봐. 궁금하다. 나도 언제 기회 좀 보게.”

“그런 건 나중에 천천히 얘기하기로 하고요. 일단 이 원고 좀 봐주실래요?”

그렇게 말하며 선희가 그린 파시엔시아 데생원고를 내밀었다.

“거, 자식. 비싸기는.”

그렇게 투덜거리던 전상길이 내가 내민 데생원고를 조심스럽게 받아들고는 페이지를 넘기며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감탄하며 말했다.

“과연, 일본에도 먹힐 만 하네. 굉장히 연출도 좋고 그림도 좋아. 안정감도 있고. 나도 이 바닥 생활 오래했지만, 이만한 데생그림은 거의 본 적이 없다.”

“작업은 가능할까요?”

“일본에 바로 연재할 원고라는 건 확실하지?”

“거의요. 완성 본을 보고 결정을 내릴 거래요.”

“아, 그래? 그럼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면 파토 날수도 있다는 거지?”

별로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일단 콘티가 통과된 상태고 그림의 퀄리티는 이미 데생에서 충분히 받쳐주는 상황이라 펜선으로 깽판만 치지 않는다면 연

재는 가능할 것이다.

“흐음. 데생만큼의 퀄리티를 뽑는 건 가능해. 인물터치야 급한 대로 양구가 하면 되고, 배경도 이미 이렇게 자세하게 그려진 거라면 그대로 자만 사용해

서 그대로 그리기만 하면 되니까 문제는 없어. 그런데 말이지. 개인적으로 의견이 있는데, 말해도 될까?”

“그럼요. 말씀해 보세요.”

“조금 단순화 시켜보는 게 어때?”

“단순화요?”

“그래. 필요 이상으로 그림이 너무 꼼꼼해서 괜찮기는 한데. 이러면 보는 독자가 정신이 없어. 일본만화가 되게 꼼꼼한 건 알겠는데. 이러면 효율이 너

무 떨어져. 우리 애들도 한 장에 매달려야 하는 시간이 너무 길고. 포인트만 잡아서 흑백 명암만 잘 활용하면 그리지 않고도 복잡한 느낌을 표현할 수도 있

고.”

“괜찮군요.”

사실, 전상길 만화의 장점이 바로 단순하게 그려서 복잡하게 보이는 배경방식이다.

일명 그림자기법이라고 하는 것인데, 어두운 부분을 먹칠로 칠하지만 보는 사람은 마치 그 속에 뭔가가 더 있다고 느끼는 방식이다.

88년에 연재를 시작하게 되는 만화인 소년점프의 인기 만화 ‘로쿠데나시 블루스’에 등장하는 교복이 그런 그림의 대표적인 방식중 하나다.

먹칠을 그림자에 집중하고 빛을 받은 부분만 그려 복잡하고 리얼하게 표현하는 방식이다. 사실, 이 시절 일본에서는 이런 음영방식의 배경을 그리는 작

가들이 몇 있었고, 전상길도 한국에서는 드물게 그런 방식으로 배경을 그리는 만화가였다.

물론 배경을 본인이 그리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 그런 배경방식으로 하는 것도 괜찮겠군요. 시간도 단축돼서 좋고.”

“그렇게 하겠다면 우리도 좋지.”

“일단 알겠습니다. 자세한 건 다음에 화실에 들러 이야기를 하죠. 언제 시간이 되십니까?”

“나야 뭐, 내일부터라도 당장 시작하면 좋지.”

“그럼 내일 화실에 들리겠습니다. 화실은 그대로죠?”

“그래. A팀 화실. B팀은 어쩔 수 없이 비웠으니까.”

“네 그럼 내일 그곳으로 찾아갈게요.”

“그래.”

< 설상가상 천원돌파 (7) > 끝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