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79화 (79/425)

< 설상가상 천원돌파 (6) >

놀란 마음에 데생원고를 끝까지 자세히 훑었다.

콘티를 기반으로 그린 원고라고는 하지만, 콘티를 그대로 옮기는 것만이 아닌 나름의 생각을 더해 새롭게 묘사한 건 삼사라와 다르지 않다.

스포츠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인 스피디한 묘사도 괜찮다.

사람들 간에 벌어지는 몸싸움도.

관련책자와 그동안 본 만화들에, 삼사라를 그려오며 쌓인 경험까지 더해져 선희만의 독특한 느낌으로 묘사된 장면까지 있는데. 이게 또 느낌이 나쁘지

가 않다.

거기다 가장 좋은 건······, 강렬한 열혈의 느낌.

어? 그러고 보니 이거······ 키도의 느낌도 있네.

그때 키도의 화실에서 그림을 보며 이것저것 그림을 그리더니 이런 느낌까지 배운 건가?

키도의 묘한 광기랄까, 똘끼 스러움이 몇 군데 섞여있으니 주인공의 강렬함이 배가된다. 리얼함에 중심을 두고 있다 해도 이런 만화적인 느낌이 더 해

지니,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된다.

이게 스포츠 물이지.

이게 만화지.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한다.

그렇게 정신없이 보다보니 어느새 20페이지가 끝나있다.

“······.”

잠시 멍한 상태로 원고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이거······, 그냥 썩히기 너무 아깝다.

이대로 그냥 연재만화를 시작해도 될 것 같은데······.

하지만 콘티를 작업해줄 스텝이 없다.

지금 어시들은 삼사라만으로도 빡빡하게 굴러가고 있으니까.

아 속 쓰려, 이대로 포기해야 하나.

어떡하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갑자기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선희가 생각 이상으로 잘 그린다고 해도 깔끔하게 포기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압도적으로 잘 만들어버리면 미련이 생겨서 포기도 못

한다.

아, 어떻게 해야 하나.

“이상해? 다시 그릴까?”

선희가 조금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는다.

이 녀석도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알았나?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아니. 좋아. 마음에 들어.”

“그런데 왜 그래?”

“그, 그러게.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내가 어색하게 웃음을 흘 리자 선희가 머리를 갸웃거린다.

아 생각을 해보자.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한다.

빨리 머리통을 데굴데굴 굴리며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장 떠오르는 건 없다.

그러다 달력을 봤다.

내일이······ 지로가 오는 날이다.

일단 저쪽부터 해결해 두는 게 먼저다. 어시문제는 그 다음 고민해 보자.

*

다음날 화실을 찾아온 지로에게 파시엔시아의 원고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가 꽤나 놀라는 눈치다.

“삼사라가 아니네요?”

“일단 신작이긴 한데, 한번 봐 주세요.”

지로의 표정이 확 밝아진다.

“어? 이거······. 축구만화군요.”

“네.”

“저야 뭐, 이런 건 대환영이죠. 그리고 제가 또 축구를 엄청 좋아해서.”

아, 그래서 저런 표정을 지었군.

아무튼 지로가 데생원고를 한 장씩 살펴보더니 곧 20페이지를 다 읽어보고는 밝은 표정으로 말한다.

“시작이 흥미롭군요. 축구의 선진국인 스페인으로 건너가는 이야기. 그런데 스페인으로 건너가서 어떻게 흘러가나요?”

“아, 여기 콘티가 있는데 이것도 한번 보시겠어요?”

내가 콘티노트를 건네자 그것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란다.

“많이 만드셨네요.”

“읽어보실래요?”

“네. 당연하죠.”

그렇게 말하더니 콘티에 푹 빠져 읽어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분량이 있어서인지 30분 이상을 말없이 읽어가기만 한다.

그리고 다 읽었는지 노트를 덮고 난 그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날 보며 말했다.

“이거, 정말 재미있어요. 유소년 축구에 스페인리그를 꿈꾸는 이야기라니. 완전 제가 꿈꾸던 내용인데.”

“네? 아카기 씨가요?”

“아하하, 네. 축구를 좋아해서 캡틴츠바사는 연재 때마다 빼먹지 않고 사서보고 있으니까요. 아, 이거 주간소년 히어로에 있으면서 소년점프 애독자라

는 건 좀 우스운 얘기지만요. 어쨌거나 츠바사는 다 좋은데 만화특유의 과장이 너무 심해서 늘 아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건 너무 실감이 나서 진

짜 축구이야기를 보는 것 같아서 너무 마음에 듭니다.”

확실히 일본인, 그것도 편집자라 그런지 한국의 만화가와는 일단 감성에서도 차이가 많이 난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지로의 취향에 까지 맞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사실 지금 일본에서의 캡틴 츠바사 인기가 어마어마하다보니 축구에 대한 관심은 K리그가 이미 출범한 우리나라보다 더 높은 편이다.

오죽하면 캡틴츠바사가 J리그 출범을 앞당겼다는 말이 나왔을까.

아무튼 지로가 축구에 관심이 있다면 이야기는 더욱 쉬워진다.

“이거 혹시 연재 가능할까요?”

“역시 연재계획을 가지고 계셨군요.”

데생원고를 보면 어느 정도 예감했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다.

“일단 저는 찬성합니다만, 확실한 것을 알려면 일단 출판사로 가서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그럼 알아보고 연락 주시겠습니까?”

“그나저나 원고 작업은 가능하겠습니까?”

그도 지금 화실 사정으로 한 작품 더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알 것이다.

“그 문제는 제가 해결하죠. 일단 아카기 씨는 가능한지에 대한 것만 빨리 알아봐 주셨으면 해요.”

“네. 알겠습니다.”

***

“오, 이거 재밌네.”

네임을 읽어보던 야지마가 감탄하며 턱을 긁적인다.

“이것도 써니 작가 작품이라고?”

“네. 일단 연재를 하고 싶어 하는데, 우리 출판사계열에서 연재했으면 하는데 괜찮을까요?”

“주간소년 히어로엔 이미 삼사라를 연재중이니까, 다른 거라면 월간지인 파워 히어로나 주간 청년지인 영 히어로, 그리고 격주간인 스피릿 히어로가 있

으니까. 스피릿 히어로 쪽이 제일 맞기는 하겠는데.”

“그쪽에 부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팀장님에게 여쭤 보려고 해도 휴가 중이시라.”

“할 수 없잖아. 결혼한 지 8년 만에 아이를 얻었으니까.”

야지마의 말대로 팀장은 부인의 출산으로 인해 보름동안 휴가를 받을 상황이었다. 원래라면 이렇게 긴 휴가는 어려운 일이지만, 편집장이 결국 통과시

켰다.

“아, 맞다. 그쪽 편집장님이랑 우리 편집장님이 동기니까······. 아, 마침 편집장님 오시네.”

그렇게 말한 야지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편집장에게 다가갔다.

“편집장님.”

그러자 뭔가 골똘하게 생각 중이던 편집장이 화들짝 놀란다.

“깜짝이야! 야, 내 나이엔 심장에 무리주면 큰일 나.”

“에이, 아직 나이가 있으신데.”

“얌마, 너도 내 나이 먹어봐. 요즘엔 하루하루가 달라.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아 맞다. 편집장님, 잠시 시간 좀 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편집장을 붙들고 회의실 쪽으로 향한다.

“어? 야, 이게 뭐하는 짓이야?”

“잠시 만요.”

그러면서 지로 쪽으로 윙크를 하며 턱을 까닥거린다. 빨리 따라오라는 신호다.

지로가 서둘러 네임복사본과 데생 복사본을 챙겨 들고 회의실 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편집장이 화들짝 놀랐다.

“뭐? 이걸 스피릿 히어로에 가져가고 싶다고?”

“네. 편집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

편집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최근 있었던 임원회의 때의 일이 떠올라서다.

전무가 첫 번째 단행본의 결과에 따라 써니를 쳐낼지 아니면 계속 계약을 연장할지 결정하겠다는 얘기를 했었다.

하지만, 편집장은 그런 사실에 대해 아무에게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꺼내면 결국 담당인 지로가 부담을 가질 것이고, 결국 그것이 작가에게도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운 작품을 들고 왔다.

그런데 이번 작품은 스포츠다. 그것도 요즘 캡틴츠바사로 축구만화의 인기가 상승중인 상황에서 말이다.

그런데 내용은 그것과 달리  상당히 리얼한 느낌의 축구만화다.

물론 이런 만화가 아예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이건 그 중에서도 최고의 퀄리티다. 데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에서 확실히 기존에 보여주던 축구

만화와는 다른 수준의 디테일한 내용 때문이다.

스페인에 대한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탓에 정확한 사실이야 알지 못하지만, 뭐 어떤가, 보는 사람이 진짜처럼 느끼면 되는 것이지.

어쨌건 재미도 충분히 있다.

이정도면 뭔가 해줄 것도 같은 느낌이다.

삼사라에 없는 스포츠만의 열정, 가슴 두근거림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작품을 히어로 스피릿에 있는 동기 편집장에게 넘기라니······.

그 밉상 같은 얼굴을 떠올리니 얼굴이 절로 찌푸려진다.

“왜 그러세요? 편집장님이 보기엔 별로입니까?”

야지마의 질문에 정신을 차린 편집장이 한숨을 푹 쉰다.

“아니, 재미있어. 그것도 엄청나게.”

“오, 그럼. 스피릿츠 쪽 편집장님께······.”

“그건 안 돼.”

“네?”

“그 녀석한테 넘길 수는 없어.”

순간 지로와 야지마는 잘 못들은 줄 알았다. 넘길 수 없다니.

“저기, 편집장님. 그럼 연재는 불가능 하다는 겁니까?”

야지마의 질문에 편집장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게 아니야. 이정도 몰입되는 작품을 포기할 수는 없어.”

“그럼······?”

“소년 히어로에 연재하자. 안 그래도 이번에 ‘슈퍼 형사’ 연재가 끝나니까. 거기다 넣으면 돼.”

“아니, 편집장님. 그건 곤란하죠. 한 작가 작품을 두 개나 연재하는 건 이제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잖아요.”

“네. 그런 일이 있게 되면 형평성문제 때문에 다른 선생님들이 반발할 겁니다. 거기다 임원회의에서도······.”

지로가 아차하며 입을 손으로 가린다.

그런 지로를 편집장이 날카로운 눈으로 쏘아본다.

“뭐? 너 그거 어떻게 알았어?”

편집장의 다그침에 눈치를 보던 지로가 입을 열었다.

“편집부 내에선 알게 모르게 다 알려진 일이에요. 삼사라 문제로 편집장님이 임원들에게 깨졌다고.”

“······그리고?”

“네? 또 뭐가 더 있어요?”

“·······아니, 됐다. 그 얘기는 관두자.”

그래도 자세한 얘기가 새어나간 건 아닌 모양이라 편집장이 안도했다.

“하여튼 그 문제라면 다른 방법이 있어.”

“네? 방법이라뇨?”

“어차피 두 사람이잖아. 써니는.”

그 말에 두 사람의 눈이 커진다.

“설마, 써니 말고 다른 이름으로요?”

“그래. 이번엔 오빠 이름으로 계약하고. 가명 하나 만들어서 하면 되겠지.”

“그러다가, 혹시라도.”

“혹시라도 뭐? 걸리면 어쩔 거냐고?”

편집장의 질문에 지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인다.

“네.”

“어차피 벼랑 끝이야.”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크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튼 이건 주간 히어로를 살릴 수 있는 좋은 기회야. 일단 완성된 원고나 받아와. 그 다음 확실한 결정을 내릴 테니까.”

***

“주간소년 히어로에서요?”

- 네. 일단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지만, 역시 완성된 원고를 보고나서 결정을 내리겠다는 게 편집장님 생각이세요. 그리고 완성된 원고는 최소한 5편,

완성원고 1편과 데생원고 5편을 보시고 결정을 내리시겠답니다.

“어? 그런데 괜찮아요? 한 사람이 두 작품을 한 잡지에 싣는 거.”

- 안 그래도 그 문제 때문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이번 작품 계약은 이 선생님께서 해 주시고 작가 이름은 다른 가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어떠세요?”

“가명요?”

“네.

보통 날 유난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그대로 쓰게 되면 한국인이라는 느낌이 들 수 있으니 써니처럼 아예 미국식으로 하거나 일본식 가명이 필요하다는

것이군.

“좋아요. 그럼 텐겐(天元, 천원)으로 하죠.”

< 설상가상 천원돌파 (6)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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