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상가상 천원돌파 (5) >
그나저나 리얼한 걸로 정해두긴 했는데, 어떤 이야기로 할까.
무작정 긴 장편을 염두에 두고 만들기도 그렇고.
일단 원하는 양은 10권이라니까, 거기에 맞게 가볼 생각이다.
먼저 서점에 들러, 축구에 관한 책을 찾아봤다. 하지만, 이 시절 그다지 전문적인 수준의 책은 별로 없다. 아무래도 대중성이 떨어져서 일까.
시립도서관에 가서 찾아가 몇 권을 찾을 수 있었다.
일단 빌려가는 건 안 된다니까, 매일 들러봐야 할 것 같다.
하루정도 머릿속을 정리한 뒤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스토리를 만들어갔다.
그 상태에서 대략적인 컨셉을 박상식에게 알려주었다.
“이번엔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하자.”
“고등학생?”
“어. 이젠 전과 달리 고난을 겪으며 성장하는 타입이 아니라, 처음부터 천재인 녀석으로 주인공을 해야겠어.”
내 말에 박상식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인다.
“역시 천재가 재밌지.”
“그래. 그런데 훈련방식이나 경기운영은 최대한 실감나는 느낌으로 할 생각이야.”
“너무 실제 같으면 만화의 과장적 표현이 줄어들어서 밋밋하지 않을까?”
“그건 어쩔 수 없어. 실제 같은 느낌으로 정했으면 그렇게 밀고 나가야지.”
“전체적인 내용은 어떻게 할 생각인데?”
“축구천재가 부모 따라 스페인으로 건너가는 이야기.”
“스페인?”
“응. 스페인 유소년 축구팀 입단테스트 받는 이야기부터.”
그 말에 박상식이 눈을 크게 뜬다.
“내가 축구 쪽은 잘 몰라서 그러는데, 스페인 축구에 대해 알고 있냐?”
“조금.”
그래봐야. 결국 만화를 통해서다.
그것도 대부분 일본축구만화였지만.
“나라이름도 생소한 곳에서 온 동양인 남자아이의 분투기 정도라면 되겠지.”
“와,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어쩐지 막 한국인으로서의 애국심 같은 게 느껴지는 만화 같다.”
뭐 국뽕이야, 내가 살던 시절에도 먹히는 거였지만, 이 시절엔 그야말로 애국심이 극에 달하던 시절이니까.
무슨 국가대표 경기만 열리면 난리도 아니니까.
“일단 대략적인 스토리는 이정도야. 이제 이야기를 이어갈 플롯을 준비해야지.”
“그래. 나도 콘티 작업을 준비할게.”
*
다음날,
박상식을 따라 박철호의 화실로 향했다.
일반적인 단독주택 내에 만들어진 화실이라 좀 평범하기도 하고 크기도 그럭저럭 이다.
화실 식구는 대충 10여명정도로 조촐했지만, 나름 대본소만화를 꾸준히 발행 중이고, 보물성을 비롯해 다른 월간잡지에도 연재중이라고 한다.
그 많은 작업량을 소화하면서도 따로 B팀을 두거나 하고 있지는 않았다.
날림그림 같은 독특한 그림체 덕분인지 아니면 작가정신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내 기억으로도 박철호는 2010년 이후에도 활동한 걸로 기억하고 있을 만큼 나름 오랫동안 작가생활을 해갈 정도로 생명력이 강한 만화가다.
지금의 그는 30대 후반의 나이, 일단 외모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처럼 검고 순박해 보인다.
“어서 오게. 반가워.”
“안녕하세요.”
그와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파시엔시아 스토리에 대해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금방 묘하게 변한다.
“실제 같은 축구?”
“네. 이번엔 리얼함에 초점을 맞춰서 작업했습니다. 현장감 위주라 진짜 축구를 보는 듯한 재미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째 박철호의 반응이 신통치 않다.
내 설명을 들으면서도 머리를 저렇게 계속 갸웃거리는 걸 보면.
“흐음, 그래도 난 평발 스트라이커 같은 이야기가 좋던데.”
그가 만드는 만화도 평발 스트라이커 같이 만화 특유의 과장성이 강조되는 만화다보니 그쪽에 더 관심을 가지는 모양이다.
“만화를 굳이 그렇게 실제 같은 이야기로 만들면 오히려 심심하지 않을까? 그래도 만화만의 장점이 있는데. 극적인 순간을 표현하기도 더 좋고, 독자들
도 그런 걸 원할 테고.”
그런 마음은 이해한다. 만화도 만화만의 장점이 있으니까.
“파시엔시아도 만화 특유의 과장도 조금은 있을 겁니다. 물론 주류는 현장감이죠. 현장에 뛰는 축구선수들의 묘사에도 열심히······.”
“······일단, 읽어보고 판단해도 되겠나?”
“아, 네.”
곧바로 박상식이 대답하며 콘티를 박철호에게 건넸다.
그가 콘티를 읽어나가는 동안 우리는 그의 만화를 읽기 시작했다. 박철호의 스타일이야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 기회에 한번 읽어두는 것도 괜찮다.
물론, 그가 우리 콘티를 읽는 동안 할 일이 없다는 것도 한 몫 한 거겠지만.
잠시 후, 그가 콘티를 읽다가 곧 머리를 들어 우리를 쳐다본다.
물론 파시엔시아의 콘티를 모두 끝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두 권 이상의 분량인데.
그 사이 다 읽은 건가?
아니면 문제라도.
뭔가 묘한 이질감이 그의 표정에서 느껴진다.
“확실히, 재미는 있어.”
재미는 있어?
문제가 있다는 거구나.
“그런데 말이지······.”
어쩐지 말을 뒷말을 줄이며 뭔가 생각하는 듯 보인다. 그리고는 곧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게 너무 진짜 축구 같다는 거야.”
“그게 문제인가요?”
“그래. 이게 문제지. 만화는 그래도 만화 같아야지. 이건 너무 진짜 같아서 보기에 좀 불편해. 주인공이 천재라고 했는데, 시원하게 골 넣는 맛도 별로 없
고.”
“주인공이 스트라이커가 아니라서 그렇습니다.”
“그래. 읽어보니까, 미드필더더군. 그래서 좀 답답한 느낌도 있어. 아무리 스페인으로 갔다지만 유소년 팀인데 확 휘어잡아버리지도 못하고.”
그것도 만화니까 천재라며 그 정도로 묘사한 거다. 실제였다면 그 정도 활약도 힘들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금 말하는 건 원맨 팀이 아니라는 게 문제라는 말이다.
“물론 주인공 성격은 괜찮아. 시원시원한 스타일이라 마음에 들기도 하고. 그런데 역시 가장 걸리는 건······ 스페인리그라는 거지. 이런 걸 과연 독자들
이 좋아하게 될 것인가 하는 점이야.”
결국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얘기다.
나름 괜찮은 스토리라고 생각해서 만들었는데, 먹히지 않았다.
“네. 알겠습니다.”
“그래. 다음엔 좀 더 괜찮은 스토리로 부탁해.”
*
결국 박철호에게 스토리를 파는 건 관두기로 했다.
나름 자신 있다고 생각했는데, 박철호에겐 너무 리얼한 거랑, 우리나라 프로리그도 아닌 스페인리그 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이 시절 축구만화의 대부분이 프로보다는 국가 대표 팀 간의 이야기가 주류라, 애초에 우리나라 팀이 아닌 곳에서 활약하는 선수에 대한 관심이
부족하긴 하다.
그런 시대적 분위기에서 외국 리그에서 활약하는 주인공에 대한 관심은 적을 수도 있다. 거기다가 스페인리그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될까.
물론 차범근처럼 독일 분데스리가에 대한 이야기는 간혹 돌고 있지만, 그것도 차범근이라는 한국인에 대한 관심일 뿐 유럽리그에 대한 건 전혀 관심 밖
인 것 같긴 하다.
애초에 타깃 설정을 잘못 한 걸까?
“난 재밌던데, 역시 한국에서는 무리였나?”
박상식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콘티를 다시 확인한다.
하기야 인기작이라는 것도 어느 정도는 시대를 타고나야 하는 거니까.
“오빠.”
갑자기 화실 한쪽 구석에서 작업 중이던 선희가 갑자기 내게 다가왔다.
난 멀뚱거리는 눈으로 선희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무슨 일인데? 이해 안 되는 장면이 있어?”
“아니, 그게 아니고.”
“그럼?”
박상식이 들여다보는 콘티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그거, 내가 그려볼까?”
“뭐? 이걸 네가?”
“응. 축구는 잘 모르지만·······, 가르쳐 주면 해보고 싶어.”
순간 얘가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 잠시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으로 날 같이 바라본다.
“저기, 스포츠만화는 네가 그리던 삼사라와는 전혀 다른 만화야.”
“알고 있어. 축구규칙 배울게.”
“아니, 단순히 규칙을 안다고 해결될 게 아니라, 뭐랄까. 경기의 숨 막히는 느낌, 열정, 감동······, 에 그러니까 각본 없는 드라마랄까.”
이건 정말.
내가 생각해도 뭔 소린지 잘 모르겠다.
스포츠에 대한 설명을 여자아이인 선희에게 설명하는 것이 이렇게나 어렵다니.
“공부할게. 배울게. 해보고 싶어.”
“아니 그러니까.”
“······.”
“아······.”
타고 있어.
저 녀석 눈동자가 불타고 있는 게 보여.
이글이글, 지글지글. 아 이건 아닌가.
아무튼 선희는 지금 장난이 아니라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하긴 선희는 원래 엄청난 작업속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최근엔 그냥 데생만 하는 터에 시간이 남아도는 편이다.
솔직히 일주일 연재분 데생 20페이지를 4시간 정도 만에 완성시켜버릴 정도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남는 시간은 외국 서적을 구해 와서 그것을 연구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실전이 아닌 연습만 하는 것에 목말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목적일수도 있다.
설마, 이 녀석, 화실이 어렵다는 사실 때문에 이러는 건가?
“혹시, 돈 때문이면······.”
“아니야. 그냥 하고 싶어.”
“정말이냐?”
“어.”
정말로 축구만화가 그리고 싶은 건가?
삼사라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이라 어떻게 표현될지······.
그러나 하고 싶다고 그냥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
“좋아,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그럼 내가 널 테스트 해봐도 되겠지?”
“테스트?”
“그래. 너도 알겠지만. 출판을 목적으로 시작하는 이상 어설픈 실력으로는 내가 용납을 못해. 알겠지?”
내 말에 선희가 눈에 힘을 주며 머리를 끄덕였다.
“알겠어.”
“좋아.”
그나저나 이 녀석 정말 많이 변한 거 같은데.
물론 좋은 쪽으로.
이렇게까지 자기주장에 대해 강하게 밀고 나가는 모습을 보니 오빠로서 뿌듯한 느낌도 든다.
그날 저녁 선희에게 파시엔시아 콘티를 넘겨주며 동시에 이태원에서 구해온 만화책 중 축구만화 몇 가지와 한국축구만화, 그리고 축구관련 책자 몇 권
을 넘겨주고는 20페이지만 데생을 해보라고 시켰다.
그리고는 난 박상식과 파시엔시아 뒷부분 이야기를 작업해 나갔다.
박상식은 나와 콘티작업을 하면서도 선희 쪽을 힐끔거린다.
“괜찮을까? 스포츠는 안 맞을 것 같은데.”
“뭐, 그래도 직접 해봐야 확실히 느낄 테니까.”
“그렇겠지?”
솔직히 내 입장에서의 기대감은 반반이었다.
분명 선희에게는 그림에 대한 재능을 믿고 있었고, 캐릭터 역시 잘 그린다는 건 알고 있지만. 스포츠는 다른 분야와 좀 다르다.
어쨌건 상대팀이 있고, 그들을 단순히 이기는 것만으로는 스포츠만화의 감동을 느낄 수 없다.
축구만화의 경우 많은 팀 동료와의 우정, 팀워크 같은 것들이 함께 어우러지고 강한 상대와 함께 싸워가며 얻는 감동이 있어야 보는 독자도 감동하게 된
다.
그러한 특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단순히 잘 그린 그림만으로 이해하기는 절대로 어려운 것이다.
거기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만약 선희가 축구만화를 잘 표현할 능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받아줄 어시가 부족한 상황이다. 지금 우리 사정에 화실을 더 늘리는 것도 웃기는 일이
고, 이곳에 사람을 더 받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선희더러 혼자 다 그리라고 하는 것도 문제다.
처음 몇 편 정도는 괜찮지만 전에도 이 문제를 걱정했던 대로 그 이후엔 감당하기기 점점 어려워 지게 될 것이다.
아무튼 문제가 겹겹이 쌓여있으니 그냥 마음을 비우는 게 낫다.
그렇게 한참동안 박상식과 함께 파시엔시아 콘티작업에 열중해 있는데 선희가 내게 다가와서는 어깨를 툭툭 건드린다.
“어, 왜?”
“다 했어.”
“뭐? 벌써?”
“응.”
그렇게 대답하더니 데생원고를 불쑥 내민다.
선희가 내민 원고를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고 한 장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거 축구 처음 그리는 거 맞나?
“와, 엄청 괜찮은데?”
맞은편에 앉아있던 박상식이 깜짝 놀라며 감탄했다.
물론 나 역시 박상식과 같은 마음이었다.
이 녀석.
진짜 뭐야.
< 설상가상 천원돌파 (5)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