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77화 (77/425)
  • < 설상가상 천원돌파 (4) >

    “화형식이 벌어지자마자, 한꺼번에 화실에 나오지 않았다더라. 그 때문에 화실이 완전 엉망이 되어버렸어. 핵심 멤버들이 빠진 상태라 작업이 제대로

    될 수가 없잖아. 선생님이 급한 대로 잠도 줄여가며 데생이랑 펜 터치까지 해보고 있는 모양인데······. 너도 알다시피 화실의 규모 상 해야 할 분량이 적

    지 않으니, 솔직히 한사람 힘만으로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면 혹시 그 추양구라는 사람이 주축이 된 거야?”

    “아니, 그 사람은 전 선생님 오른팔 같은 사람이라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사람이야. 나머지 사람들이 그 양반 몰래 작당을 한 모양이더라.”

    역시 추양구는 의리가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 사정에 그런 의리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리 없다.

    “······할 말이 없네. 어떻게 그런 황당한 일이 벌어지지?”

    “아예 없는 일은 아니야. 간혹 이런 일이 있기는 한데. 보통은 작은 화실에서 벌어지는 일이긴 하지만.”

    “이런 일이 가끔 있다고?”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온다.

    이런 식으로 야반도주 하듯이 문하생들이 갑자기 단체로 빠져버리면 화실의 타격은 엄청날 수밖에 없다.

    물론 화실의 주인인 만화가들이 또라이라면 그런 대로 이해를 하겠지만, 이게 만약 누군가의 농간이라면, 정말 억울한 일인 것이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야?”

    “모르지. 선생님도 일단, 이리저리 숙련자들을 알아보고는 있는 모양인데. 너도 알다시피 다른 화실에서 핵심 인물들을 빼오지 않는 이상 유지하기 어

    려울 거야. 그리고 빼온다고 끝날 문제도 아니라서.”

    “그야 그렇겠지. 그림체가 다를 테니 당장 일에 투입하기도 힘들 테고.”

    “······그래.”

    결국 화실은 축소가 되거나 아니면 해체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나마 그만둔 사람들이 단순직 사람들이라면 어떻게든 사람을 충원시키면 되겠지만, 데생을 비롯해, 인물터치와 몇 명의 배경맨까지, 중요 핵심인물

    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상황이라 감당하기 어려울 게 분명하다.

    “그럼, 이번에 월간지에 연재한다던 평발 스트라이크 외전인 신작은 물 건너갔겠군.”

    “그게 문제냐, 지금 화실이 풍비박산 났게 생겼는데.”

    나름 고심해서 준비 중이었지만, 박상식의 말대로 지금은 평발 스트라이커 외전이 중요한 게 아니다. 가장 큰 돈줄이었던 전상길의 화실에 문제가 생

    긴 거니까.

    골치가 슬슬 아파온다.

    “아 참, 그런데 대봉이 형은?”

    “아, 그 형도 화실에서 나간 모양이야.”

    “그 인간이 설마 다른 인간들이랑 같이 야반도주 한 거야?”

    “그럴 리가 있겠냐? 화실 사람들이랑 별로 친하지도 않는데. 그리고 그럴 배짱도 없어, 그 형은.”

    하긴 내 생각도 그렇기는 하다.

    “그럼 왜 그만 뒀는데?”

    “몰라, 화실에 있어봐야 할 일도 없어서 민폐라고 생각했나보지. 으이그, 진짜 그 인간 오지랖은 정말.”

    하기야 이런 와중에 스토리 작가가 할 일이 있을 리 없겠지.

    “연락처는 알아?”

    “그 형은 나도 연락처를 몰라. 한 번도 그 형네 집에 가본적도 없어서, 따로 연락할 방법이 없어.”

    그러고 보니, 이대봉이 항상 연락을 해오거나 직접 찾아오긴 했어도 우리가 따로 연락을 해본 적은 없다.

    “화실에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뭐, 그렇겠지. 그건 뭐 나중에 따로 전 선생님 만나서 물어보기로 하자.”

    “그나저나 대봉이 형은 어디 갈 곳이 있어?”

    내 질문에 박상식이 피식 웃는다.

    “그런 건 걱정마라. 그 형이야 평소 모습이랑 달라서 인생이 잡초 같다고 들었거든. 거기다 실력도 있으니까, 어떻게든 자리를 잡을 거다.”

    “그런가?”

    “그래. 믿어도 될 거다.”

    그렇게까지 확신하니 그래도 안심은 된다.

    “그나저나, 안 좋은 일은 늘 함께 온다더니, 이게 무슨 일인지.”

    박상식도 한숨을 푹 쉰다.

    솔직히 우리야 스토리 넘겨주며 일차적으로 현금을 받았으니 당장은 손해본건 없지만, 평발 스트라이커의 인기를 생각하면 그렇지만도 않다. 이미 만

    화의 인기로 인해 권당 스토리료도 업계에선 거의 최고다 싶을 수준인데, 거기다 소소하게나마 2차 캐릭터 판매로 벌어들이는 돈도 있으니.

    정확한 건 모르겠지만 당장 불량 만화라 찍혔다고 해도 캐릭터를 파는 건 문제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만화가 나오지 않으면 잊혀지는 것도 금방이다. 게다가 완결이 되지 않은 채라면 더더욱 그렇다.

    참나, 이렇게 어이없이 중단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는데.

    갑자기 맥이 확 빠지는 것 같다.

    “나는 그동안 돈 많이 벌어서 괜찮긴 한데, 넌 이렇게 화실까지 시작했는데, 어떡하냐?”

    박상식의 말대로다.

    화실을 시작한 후, 돈이 들어온 건 일본에서 보내온 연재분 원고료가 전부다. 사실상, 일본만화도 연재만으로는 제대로 화실을 끌고 가는 게 빡빡하다.

    지금 현재 삼사라는 페이지 당 6,000엔을 받고 있다.

    기성이라면 1만 엔 이상 받을 수 있겠지만, 뭐 그건 일단 접어두고.

    아무튼 페이지 당 6천 엔이라고 하면 한국 돈으로 대충 6만원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살던 시절의 환율이다. 이 시

    대의 환율은 전혀 다르다.

    대략 3.5배 정도.

    아마도 내년인 1985년에 있을 플라자합의 이후에 많이 오르기 시작하면서 그 이후엔 5배 이상이 되는 걸로 알고 있다.

    아무튼 지금은 대략 페이지 당 한국 돈으로는 21,000원 정도인 셈이다.

    주당 스무 페이지면 42만원, 4주, 대충 한 달이면 170만 원가량 된다.

    자 84년에 170만원이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 화실 운영비가 만만치 않다.

    어시 세 사람의 월급으로 나가는 돈만 60만원.

    성준희의 급여로 나가는 돈이 달 평균 10-20만원 사이.

    거기다 화실을 운영하기 위해 스크린톤부터 각종 재료들에 이런저런 잡비, 식비 생각하면 별로 남는 것도 거의 없다.

    어시들의 보너스 달이 되면 적자가 되는 거고.

    그나마 이곳이 한국이라서 사정이 나은 거지, 만약 일본이었다면 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었다.

    일본도 이래서 연재거지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연재하는 동안은 겨우겨우 버티다가 단행본의 판매로 수익을 내는 구조이니까.

    하지만, 당장은 괜찮다.

    그동안 전상길 화실에서 받은 돈이 은행에 제법 되고, 작지만 매달 ‘오리온의 표범’으로 받는 스토리료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생활이 길어지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지금 화실을 운영하는 비용을 줄일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화실을 운영하는 건 미래를 위한 투자니까. 거기다 선희의 미래까지 걸려있으니.

    하지만 그런 사정을 눈치 챈 모양인지 어시들의 표정이 어둡다.

    그들 입장에서는 좋은 직장인 이곳을 떠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아까 박상식이 했던 말이 다시 머릿속에 떠오른다.

    ‘안 좋은 일은 늘 함께 온다.’

    지금 내 상황도 전상길과 다를 바가 없다.

    만화 일을 시작하고 늘 일이 순탄하게 흘러왔었는데 처음으로 위기다운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어쨌건 지금 당장은 운영비와 생활비를 해결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형은 우리 가족에게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말고.”

    “알았어.”

    “여러분들도 마찬가지고요.”

    “네.”

    “내가 해결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너무 걱정들 마시구요.”

    내 말에도 어시들의 걱정스런 표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분위기인데도 한쪽 구석에선 선희가 여전히 만화에 몰입에 있다.

    이럴 땐 저런 성격이 부럽기도 하다. 오로지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에만 모든 것을 집중하는 힘 말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뚝.

    갑자기 실내등이 모조리 꺼져버렸다.

    “아, 정전이다.”

    “초, 초 꺼내.”

    잠시 후 화실 어시들의 자리에서 촛불들이 켜진다.

    나도 이미 한번 이시대로 넘어와서 겪은 일이긴 하지만, 진짜 이런 건 쉽게 적응이 안 된다.

    무슨 예고도 없이 전기가 끊어져 버리는 것인지.

    그래도 화실 사람들은 별다른 저항감 없이 금방 초를 켜서 실내를 밝힌다.

    하지만 이런 어둠속에서 촛불의 불빛만으로 그림을 그릴 수는 없는 일이다.

    모두 그림을 중단하고 창문을 열고는 밖을 바라본다.

    주변이 온통 어둠이 휩싸여 있다.

    보통 때라면 모두가 촛불 속에서 수다를 떨었을 텐데, 일이 꼬이다보니, 걱정 때문인지 모두 말이 없다.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찾아야겠다.

    *

    한국만화시장이 더럽다고는 해도 일단 이곳은 본진이다. 여기서 기반을 잡아두지 않으면 앞마당인 일본 진출도 쉬운 건 아니다.

    물론 일본에서 연재중인 만화가 단행본으로 성공한다면 모든 문제는 삽시간에 해결되게 된다.

    하지만 일본에 연재중인 삼사라의 분위기도 별로 좋지는 못한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본진인 한국에서 이런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으니.

    일단 일본 연재부분은 계속 선희에게 작업을 맡겨둔 채로 나름대로 고심에 빠져 있었다.

    그런 때에 박상식이 새로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

    박상식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름 뛰어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박철호 화실 갔다 왔어.”

    “박철호?”

    “응. 너도 알지? 축구, 권투 같은 스포츠 만화를 전문으로 작업하시는 분.”

    당연히 알고 있다.

    80년대에서 90년대까지 활발히 활동한 작가로, 박상식의 말대로 축구와 권투 중심의 스포츠만화를 주로 그리는 만화가다.

    그림 스타일은 좀 거칠면서도 단순해서 디테일한 맛은 좀 떨어지지만, 스포츠라는 활동적인 스토리엔 안성맞춤이다.

    내가 알기론 현재 보물성에서도 축구 만화를 연재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 분이 축구 스토리를 하나 원하시는데 우리가 해 줄 수 없겠냐고 하시더라. 확실히 이 바닥이 좁은 게, 전상길 선생님 이야기가 다 퍼진 모양인데다

    가 우리 이야기도 좀 도는 모양이더라.”

    “잡지연재가 목적이래?”

    “아니, 그분도 화실 크게 하시잖아. 그래서 대본소 쪽 만화도 들어가는데 그쪽 만화가 필요하신가 보더라고.”

    “그래?”

    “어떻게 생각해?”

    “그 양반 어떤데?”

    만화는 많이 봤지만 만화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아는 것이 없으니까, 성향도 중요하다. 저번 강형석처럼 뒤통수나 치면 곤란하니까.

    “으음, 기본은 지키는 분이야. 누구처럼 나중에 엉뚱한 소리는 안하는 스타일.”

    “내가 건 조건도 괜찮을까?”

    “그 부분도 혹시 몰라 물어봤는데, 그 정도는 괜찮데. 전상길 선생님과 친해서 그 이야기도 들은 모양이야.”

    “그럼 뭐, 상관없겠네.”

    “스토리 한번 만들어 볼래?”

    “뭐, 어차피 축구만화를 원하겠지?”

    “그렇지 뭐. 그럼 이번에도 평발 스트라이커 같은 스토리를 만들 거야?”

    박상식의 질문에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이번엔 조금 다른 스타일로 해보자.”

    “다른 스타일?”

    “어. 조금 더 리얼한 걸로.”

    “리얼? 실감나는 거?”

    “어. 진짜 축구이야기를 써 보자.”

    “······진짜 이야기라면 사정을 좀 많이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지. 리얼한 이야기니까.”

    그런데 어째 머릿속에선 익숙한 이야기라 쓰는 게 어렵지 않다.

    “언제 시작할까?”

    “일단 기본 골격을 구상해야하니까, 내일 다시 이야기 하자.”

    “알았어. 그럼 이 스토리는 내일부터 짜는 걸로.”

    모처럼 다시 일거리가 생긴 것이 기쁜지 박상식의 표정이 밝아졌다.

    < 설상가상 천원돌파 (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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