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75화 (75/425)
  • < 설상가상 천원돌파 (2) <3권 끝> >

    경희의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님?”

    “몰라. 어떤 아줌마가 공항에서 큰 은혜를 입었다고······.”

    “아.”

    그 순간 찾아왔다는 사람이 누구일지는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래서?”

    “그래서는, 그냥 여기로 같이 왔지. 왜 무슨 일이야? 혹시 술집 같은데서 외상 그어놓은 거 있어?”

    혀를 날름거리며 손가락을 찍고 옆으로 슥 긋는 시늉을 한다.

    “뭔 소리야? 내가 언제 그딴 짓을 했어?”

    “예전엔 많이 했잖아.”

    “······아, 그래?”

    아, 본체 녀석이라면 그랬을 지도 모르겠네. 잠시 깜빡했다.

    “그럼 지금 밖에 있다는 거지?”

    “어.”

    “알았어. 선희야 너도 나랑 같이 나가자.”

    그 말에 선희가 작업을 멈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난?”

    “넌 그냥 여기에 있어.”

    “알았어.”

    또 알밤을 맞을까봐 걱정하는지 대번에 얌전하게 머리를 끄덕인다.

    선희와 내가 같이 화실 밖으로 나가자 누군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 안녕하세요.”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내게 다가오더니 인사를 한다. 그런데 여자의 곁엔 그때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아이가 같이 있다.

    “미령아, 어서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여자아이가 예쁘게 배꼽인사를 한다.

    여자와 아이를 보니 공항에서 봤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 이 아이군요.”

    “네. 덕분에 아이를 찾을 수 있었어요.”

    곁에 있던 선희가 아이에게 다가가더니 그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아이와 눈을 맞춘다. 그리고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선희가 입가에 미소를 그리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렇게 환하게 웃는 건 처음 봤다. 이 광경을 식구들이 보면 또 난리법석을 떨 텐데.

    “그때 그림을 그려주셨던 여학생이군요.”

    “네.”

    “너무 감사해요. 두 분이 아니었다면 어쩔 뻔했을지.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잊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다시 한 번 인사를 한다.

    그나저나 죽을 때까지라니,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이러지 마세요. 덕분에 공항에서 편하게 돌아왔고, 가지고 오던 물건들도 안 뺏겼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래도 감사하다는 인사정도는 아이와 직접 찾아와서 하고 싶었어요.”

    더불어 여자는 혹시 필요한 것은 없느냐, 도와줄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말을 여러 번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딱 봐도 부자에 힘 꽤나 쓰는 집안사람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 충분히 내 힘으로 살 수 있는데 굳이 남의 도움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아이와 함께 가끔 놀러와도 될까요?”

    “그럼요. 그 정도라면 저희도 환영이죠.”

    그래도 여자아이가 선희를 꽤나 따르는 덕분에 가끔 놀러오겠다는 말은 거절하지 않았다.

    선희도 친구는 필요하니까.

    그리고 선희에게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드는 아이라면 더욱더.

    ***

    “8위요?”

    “네.”

    “총 20편이 실리는 잡지에서 8위면 잘한 거잖아.”

    박상식이 웃으며 말하자 지로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난 그 표정을 뜻을 잘 알고 있다.

    “좋아할 일이 아니야.”

    내 말에 박상식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주변에 있던 어시들 시선도 내 말에 이쪽으로 쏠린다.

    “엽서 투표 인기는 첫 화가 가장 중요해.”

    “뭐?”

    “보통은 첫 화 이후로 떨어지기만 할 뿐이거든. 거기다 홍보도 많이 했는데, 이런 성적이면······.”

    내 말에 표정이 좋지 않던 지로가 내말에 동의한다며 머리를 끄덕였다.

    “네, 이 선생님 말씀대로입니다. 사실, 저는 솔직히 4위 이내정도를 기대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결과가 이렇게 나오는 바람에 편집부에서도 의외라

    는 반응입니다.”

    “역시 잡지의 특색도 영향을 미쳤겠군요.”

    “네. 그런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소년 잡지라는 것 이외에 저희가 주력을 펼치는 분야가 바로 개그와 명랑만화, 스포츠정도라. 물론 그동안 SF에서도

    인기작이 나온 건 사실이지만. 삼사라의 경우엔 SF와 호러가 결합된 터라. 그 영향이 조금 큰 것 같습니다.”

    사실, 주간소년 히어로의 특징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84년에 주력을 하던 분야에 대해선 정확히 몰랐던 게 실책이었다. 거기다 선희의 그림체에 대

    해 미리 확정을 했던 것도 문제였고.

    “그래도 이제 겨우 1화가 연재되었을 뿐이니까, 좀 더 기다려봐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니까, 두 분 선생님은 원래 계획하셨던 스토리를 그대로 밀

    고 나가주세요.”

    “현재로서는 어차피 그럴 수밖에 없어요. 이야기의 전체적인 방향과 구상이 끝나있는 상태라서.”

    삼사라는 처음부터 중간진행, 결과까지 미리 이야기를 정해둔 상태다. 전체적으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기 위해선 중간 중간에 나온 복선도 나

    중에 다 회수해야 하니까.

    지로와 대화를 나누다 선희 쪽을 돌아보았다.

    역시나 선희는 우리 대화엔 별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저 그림을 그리는 현실에만 집중할 뿐이다.

    멘탈이 좋은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일단 지금은 콘티를 읽어보시고 의견을 주세요.”

    “그럴까요?”

    담당이 반가운 얼굴로 콘티를 읽어나간다.

    “아, 전에 봤을 때보다 콘티가 좀 더 매끄러워졌군요.”

    “네. 아무래도 몇 번 더 손을 봤으니까요.”

    “그렇군요.”

    그가 머리를 끄덕이는데, 그때 화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성준희가 나가서 문을 열어준다.

    “이대봉 씨······.”

    “에이, 제임스라니깐요.”

    “아, 죄송해요. 제임스 씨 오셨어.”

    “형, 왔어?”

    “으응. 나 왔어.”

    그렇게 손을 들어 인사한 이대봉이 지로를 보더니 움찔한다. 그리고는 씨익 웃는다.

    “아, 일본출판사, 담당이시구나.”

    “아, 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 제임스에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자 지로가 마주잡았다.

    그러자 이대봉이 잡은 지로의 손등을 어루만지며 웃었다.

    “와아, 일본분이라 그런지 피부가 참 좋네.”

    그 순간 지로의 몸에 경련이 일더니 서둘러 손을 잡아 뺀다.

    그러자 이대봉이 싱긋 웃었다.

    “부끄러워하긴.”

    그 말에 지로가 소름 돋는 표정을 짓자 박상식이 버럭 소리쳤다.

    “형은 좀, 그런 이상한 걸로 장난 치지 마.”

    “뭐? 장난 아닌데?”

    순간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는 금방 박상식이 그 정적을 깨며 짜증을 냈다.

    “아씨. 진짜.”

    “그리고 제임스로 부르라니까 그러네.”

    “말 돌리지 말고.”

    “왜 사람들은 내 맘을 몰라주는지 몰라.”

    “하지 말라니까!”

    그 순간 여자 어시들이 재미있는지 킥킥거리며 웃는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내 말에 이대봉이 돌아보더니 살짝 찌푸리며 대답한다.

    “넌, 내가 여기 무슨 일이 있어야만 올 수 있는 거니?”

    “얼굴에 용무가 있다고 써 있구만.”

    “으이그, 눈치는 빨라 가지구.”

    그렇게 눈웃음을 짓던 이대봉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새로운 스토리를 시작했는데, 한번 봐줄 수 있어?”

    “형, 학원폭력물 스토리 썼었다며.”

    “아, 그거? 상길이 형이 말했나보구나.”

    “그래.”

    “흐응, 그거 생각하면 지금도 아까워 죽겠어. 정말 재밌는 이야긴데. 사나이의 의리가 넘실거리는 멋진 이야기거든.”

    “형, 그 아이디어는 좋은데. 지금 이런 세상에 그런 만화 그리면 전상길 선생님, 불량만화 그린다고 잡혀갈지도 몰라.”

    내 말에 이대봉이 시무룩한 표정이 된다.

    “알아. 그래서 형도 말리더라. 어쩔 수 없이 관뒀지만 그래도 좀 아쉽기는 해.”

    “그래도 버리지는 말고 잘 나둬 봐. 기회가 올지도 모르니까.”

    “알았어.”

    “그럼 이번에 쓴 이야기는 결국 음식스토리야?”

    “그것도 들었니? 그 형은 왜 그렇게 입이 싸니?”

    “그만 투덜거리고 그거나 줘.”

    대략적인 이야기의 줄거리를 적어둔 노트를 내게 내밀었다.

    단순하게 쓰인 것처럼 보이지만 나름 플롯도 잘 정리되어 이야기의 흐름과 느낌은 파악이 될 정도다.

    나쁘지 않은 이야기의 흐름.

    확실히 조용한 느낌의 힐링물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가 지금 시대의 한국에 통할지는 미지수다.

    그나저나 이 인간 정말 미래의 유행을 예측하는 초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어때?”

    놀란 내 표정에 만족했는지 흐뭇한 미소로 날 보며 묻는다.

    “이야기가 잔잔하네.”

    “응. 한국 향토음식을 찾아다니며 음식에 얽힌 사연들에 관한 이야기야. 그러다보니까 아무래도 이야기가 소소하고 조용해.”

    “이런 이야기는 어떻게 구상을 시작했어?”

    “오, 반응을 보니까 나쁘지는 않다는 거군. 내 말이 맞지?”

    “빨리 대답하기나 해.”

    “알았어, 알았어. 남자가 참을성 없게.”

    그렇게 말하더니 조금 뜸을 들이고는 곧바로 웃으며 이야기를 한다.

    “우리 윤환이도 잘 알겠지만.”

    “우리 윤환이는 빼지, 이참에 형이고 뭐고······.”

    내 이마에 핏대가 서는 모습을 봤는지 이대봉이 흠칫 놀란다.

    “아, 알았어, 알았어. 이럴 땐 터프하다니까, 뭐 그게 우리 윤환······, 크음. 아무튼, 이태원에서 구한 일본만화잡지에 재미난 만화가 있더라고. 그림은

    뭐, 밍숭맹숭하고 별거 없던데. 소재가 음식이더라 이 말이지.”

    “맛의 달인이군.”

    “어? 그거 제목이 맛의 달인이야?”

    이거야 원, 일본어를 모르고 봤으면서 그런 게 눈에 들어오더란 말이지. 그림도 그다지 볼품없었을 텐데.

    “그래. 형이 본 잡지는 빅 코믹 스피리츠. 1980년에 창간된 월간만화잡지, 81년부터는 격주간이지.”

    물론 86년엔 다시 주간으로 변하게 된다. 지금의 기준에선 미래니까, 이 이야기는 뺐다.

    아무튼, 맛의 달인은 1983년부터 연재를 시작, 무려 2015년까지 연재, 111권짜리 초장편 연재만화다. 그야말로 음식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죄다한 전설적인 만화다.

    그런 만화를 이대봉이 우연히 봤다는 거다.

    우연히 봤다고 그게 눈에 들어왔다는 게 좀 신기한 일이다.

    “이야, 역시 우리······, 크음. 아무튼 그 만화의 내용이 너무 궁금해서 친구들에게 물어서, 봤는데. 너무 재밌더라고. 음식으로 가지고도 만화를 만들 생

    각을 하다니, 역시 쪽발이 놈들은······.”

    그렇게 말했다가 지로를 힐끔 보더니 움찔한다.

    “아차, 이놈의 주둥아리.”

    자신의 입을 툭툭 치던 이대봉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일본 애들 상상력은 대단하더라니까.”

    “그래서 차기작을 음식만화로 정했던 거야?”

    “그래. 그런데 상길이 형은 이거 심심하고 재미없겠다며 다른 걸 하래. 너도 같은 생각이니?”

    “이거도 괜찮아.”

    내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대번에 밝은 표정이 된다.

    “그렇지?”

    “그런데 지금 대본소만화엔 좀 안 맞을 것 같은데.”

    “어? 왜?”

    “대본소는 가볍게 소비되는 만화가 주류야. 그런 곳에 이런 음식에 대한 감성적인 이야기가 통하기는 어려울 거야.”

    “그럴까?”

    “뭐, 아닐 수도 있어. 몇 년 전만 해도 기업경영 만화가 통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테니까. 아무래도 트렌드라는 건 예측하기 힘들고.”

    “트렌드라니, 역시 뭔가 멋진 말을 잘하네.”

    “내용을 들어, 내용을.”

    “알았어. 그리고?”

    “아무튼 요즘은 대본소 만화들을 보는 독자들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으니까. 어쩌면 잘 될지도 모르기는 하지. 경영만화들이 이렇게 인기가 많은 걸

    보면 말이지.”

    물론 경영의 왕은 얼마 전에 연재를 끝냈지만.

    아무래도 기업만화 붐이 생기니까, 이래저래 경쟁이 생겨서, 인기가 떨어진 탓이다.

    “그럼 윤환이 말로는 음식의 만화도 해볼만하다는 거네?”

    “재미만 있다면 뭐.”

    “역시 재미가 중요한 거구나.”

    “그보다 중요한 걸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뭔데?”

    “전 선생님을 설득하는 거. 그게 안 되면 어차피 만들어봐야 소용없잖아.”

    “아, 뭐. 그건 내가 상길이 형 잘 설득해 볼 테니까. 넌 신경 쓰지 말고 의견이나 말해 줘.”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에피소드를 잘 만들어봐. 음식에 얽힌 사연들, 감동적일수록 좋지.”

    “역시 음식은 감동이 필요할려나?”

    “아련한 추억과 음식은 환상의 궁합이지.”

    “오, 그거 좋다. 아련한 추억이라.”

    그렇게 말하며 수첩을 꺼내선 열심히 메모를 한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지로와 화실식구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간다.

    “와, 열정이 대단하신 분이군요.”

    “네. 좀 심하게요.”

    “그나저나, 음식만화라니. 저도 그 맛의 달인이라는 만화를 봤는데 꽤 재미있었어요.”

    “앞으로는 음식만화 붐이 일어날지도 모르죠.”

    내 말에 지로가 묘한 표정이 되었다가 곧 웃었다.

    “에이, 설마요.”

    < 설상가상 천원돌파 (2) <3권 끝>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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