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상가상 천원돌파 (1) >
승용차가 집 앞에 도착하고 우리가 내리자 운전기사가 내려서는 우리에게 인사를 꾸벅한다. 나와 선희도 마주 인사했지만 기사는 계속 웃기만 할뿐 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안가는 건가?
은근 부담스럽네.
할 수없이 돌아서서 초인종을 누른다.
- 누구세요?
“나야. 오라버니다.”
- 악! 오빠다! 엄마, 오빠 왔어, 오빠!
윽! 돌고래 소리. 스피커 찢어지겠다.
잠시 후 후다닥 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덜컹 열린다.
역시 경희다.
그런데 이 녀석 문이 열리자마자 내게 덥석 안긴다.
“오빠아아아!”
“야야, 떨어져! 갑자기 왜 이래?”
“히잉. 얼마나 기다렸는데.”
착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한다.
“그래그래 알았다.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 좀 떨어져!”
머리를 밀며 억지로 떨쳐내니 이번엔 선희에게 찰싹 매달린다.
“선희야아아! 언니 안보고 싶었쪄?”
“······내가 언니야.”
“이참에 그냥 내가 언니하자.”
“싫어.”
“얘들아, 적당히 하고 일단 들어가자.”
그렇게 말하며 뒤를 힐끔 돌아봤다. 하지만, 운전기사는 여전히 우리를 그냥 볼뿐 꼼짝도 하지 않는다.
한숨을 쉬고는 곧바로 선희와 함께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그때서야 차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부웅하며 차가 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가장먼저 엄마가 우리를 반긴다.
“둘 다 잘 다녀왔니? 별일은 없었고?”
누나도 뒤늦게 따라 나온다.
“······엄마, 언니, 나 다녀왔어.”
그렇게 말하며 선희가 집안으로 들어가자, 가족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선희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상태로 모두 얼어붙은 듯 꼼짝하지 않
는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굳은 상태로 대화를 한다.
“서, 선희가 좀 변한 거 같은데?”
“그러게.”
“맞아. 선희 변했어.”
그리고는 세 여자가 곧장 나를 향해 홱 돌아본다.
“······?”
누나가 나에게 물었다.
“······일본에 가서 무슨 일 있었니?”
“일은 무슨 일, 재미있게 놀다왔지. 그나저나 뭐가 변했다는 거야?”
내 입장에선 선희의 행동에서 특별함을 찾지는 못했다.
예전에도 저런 인사는 가끔 했었으니까.
“뭐가 변했다는 건지 모르겠네.”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자 경희가 나를 찰싹 때린다.
“방금, 선희 표정 말이야. 표정.”
“표정이 왜?”
“웃었잖아. 웃었어. 쟤가 어디 다녀와서 웃는 거 처음 봐.”
“뭐? 웃었다고? 아닌 거 같은데.”
“웃었어. 그치 언니.”
경희의 말에 누나도 머리를 여러 번 끄덕인다.
“그래. 분명히 웃었어.”
“내가 보기에도 웃던 표정이던데.”
이번엔 엄마까지 거들고 나선다.
도대체 그 미세한 차이를 어떻게 구분하는 건지. 과연 가족이라는 건가?
나도 선희의 표정을 제법 잘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멀었구나.
그렇게 쌍둥이 방 쪽으로 모두가 시선을 향한 채 잠시 있다가 곧 경희가 나를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왜?”
“오빠, 선물.”
“일단 짐부터 풀기라도 하자. 이 녀석.”
그렇게 말하며 경희의 머리를 꽁하고 쥐어박았다.
“아얏!”
“여튼, 넌 매를 벌어.”
엄마도 경희를 보며 혀를 찬다.
*
누나가 박스를 열어 안에 있는 물건을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이거 전기밥솥 아니니?”
“어. 코끼리밥솥이라고 이게 일본에서 유행하는 거래.”
“코끼리 밥솥?”
최근 일본에 간 한국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사온다는 물건이란다. 그래서 나도 집에 뭘 사다줄까 고민하다가 고른 게 바로 이 밥솥이었다.
오늘 공항에서 압수당했다고 하던 물건들도 들어보니 대부분 이것인 모양이었다.
물론 미래엔 한국산 유명회사가 몇 곳 생기지만, 지금이야 뭐, 일본의 전자제품이 세계최고니까.
기존과 모양이 다른 밥통을 신기하게 바라보던 경희가 나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는다.
“난?”
“넌 이거.”
카세트테이프다.
“어? 이거 듀란듀란이네?”
“인기 많다고 해서.”
“와, 나 이 노래 좋아해.”
“그럼 됐네.”
“응. 고마워.”
그런데 카세트테이프를 이리저리 웃으며 돌려보던 경희가 곧 머리를 갸웃거린다.
“어? 그런데 한글이 써져 있어. 이거 국산 아니야?”
“맞아. 공항에서 오는 길에 시내에 들러서 샀다. 그래도 노래를 부른 사람은 외국인이잖아.”
이동 중에 검은 차 기사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시내로 들러 사온 거다.
하지만 기대하던 일제가 아니라는 것에 실망했는지 경희가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야 그게. 히잉.”
경희가 울상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보며 킥킥거리다 안 되겠다 싶어서 가방을 뒤적거려 박스 하나를 꺼냈다.
“자, 그럼 이거.”
“······?”
“선물.”
“뜯어봐도 돼?”
“네 마음대로.”
포장지를 조심스럽게 뜯어내던 경희가 박스를 보며 화들짝 놀랐다.
“이거, 뭐야?”
“샤프.”
박스 안에는 작은 박스 두 개가 들어있다.
박스를 까 보니 평범한 모양의 샤프가 모습을 드러낸다.
검은색과 붉은색 이렇게 두 개다.
“이거, 나 본적 있어.”
경희가 눈을 반짝거리며 좋아한다.
혹시나 하고 사긴 했는데, 이렇게나 좋아하다니.
평소에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해서 떠올린 선물이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익숙해서 산 물건이다.
내가 살던 시절엔 문방구에 가면 흔히 보던 1,000원짜리로, 일명 제도샤프라 불리던 물건이 바로 이거다.
평범하지만 내게 익숙한 샤프.
하지만 오래 살아남았다는 건 그만큼 인기도 있었고, 내구성도 좋았다는 의미라 생각돼서 샀는데 경희도 이 샤프를 아는 모양이다.
“고마워, 오빠. 이거 가지고 있는 애들 보면 엄청 부러웠었는데.”
“그래?”
“응. 잘 쓸게.”
그런데 그때 전화가 울렸다.
경희가 깡총거리며 전화기 쪽으로 달려가더니 곧 나를 부른다.
“오빠, 용철이 오빠 전화.”
“여보세요?”
- 어, 일본은 잘 다녀왔냐?
“어떻게 시간 딱 맞춰 전화했네. 방금 도착했는데. 그런데 무슨 일이야?”
- 아, 이번에 보물성에서 연재 요청이 들어왔거든. 그래서 의논 때문에 그러는데. 혹시 시간 되는가 해서.
“지금 우리 화실이야?”
- 어.
“그럼 지금 화실로 갈게.”
- 그래.
곧바로 화실로 가려니까, 선희도 따라나선다.
“오늘은 좀 쉬어도 돼.”
“그래. 방금 돌아왔는데. 좀 쉬어.”
엄마의 만류에도 머리를 내저었다.
“아니 괜찮아. 그림 그리고 싶어.”
“알았다. 그럼 같이 가자.”
“나도 같이 가.”
경희도 우리를 따라 나섰다.
집 근처라 금방 화실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반가워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잘 다녀오셨어요?”
“어서 오세요.”
“네. 모두 잘 지냈어요?”
“네.”
내가 인사를 하고는 어시들에게 일본에서 산 만화 캐릭터 피규어들을 선물했다.
“어마, 동짜몽이네?”
“이거······, 내 사랑 지니 인형 아니에요?”
“네.”
“와, 나 이 외화 엄청 좋아했었는데. 고마워요. 옛날 생각나네.”
“전, 이겨라 승리호 맞죠? 정말 감사합니다.”
각자 자리에 있는 그림들이나, 그동안 했던 말들을 조합해 적당히 골랐는데 취향엔 맞았던 모양이다.
“자, 준모는 그랜다이저.”
4살짜리 준모가 그랜다이저 장난감을 받더니 좋아한다.
“고맙습니다. 해야지.”
“고마스미다.”
“그래. 짜식.”
인사하는 준모를 보니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84년인 요즘은 로봇만화를 TV에서 거의 방영하지 않는다. 그래서 4년 전에 끝난 그랜다이저나 마징가Z 정도가 애들에겐 익숙한 로봇이라서다.
TV로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내가 본 책에 의하면 이 시절의 정부는 로봇만화가 아이들을 폭력적으로 만든다며 로봇만화 방영을 금지했다고 알
고 있다. 덕분에 지금 TV에 방영중인 애니 중 로봇 물은 거의 씨가 말라버렸다.
거기다 방송에서는 툭하면 만화가 폭력성을 키우네, 오락실의 게임 때문에 아이들이 폭력에 노출되었네 하는 뉴스가 곧잘 나오고 있다.
개인적으로 오락실을 박상식이랑 몇 번 간적이 있지만, 너무 게임 영상이 심심해서 유치할 정도였는데.
그래도 지금이 전자오락의 전성기긴 하지.
“고마워, 일부러 신경써줘서.”
성준희가 좋아하는 것 같다.
“네 건 이거.”
“뭐? 내건 필요 없는······, 어? 요술공주 세리네.”
평소에 하도 흥얼거리던 노래라 혹시나 하고 샀었는데, 역시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러자 박상식도 은근히 눈치를 보고 있다.
“자, 형 좋아하는 독수리 오형제. 다 사려니까 짐이 많아서 형이 가장 좋아하는 3호 백조걸 하나만 사왔어.”
원래는 ‘백조 쥰’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이시대 한국이름까지는 잘 모른다.
“백조걸이 아니라, 유미야 유미.”
“그런 이름 따위, 내가 알게 뭐야.”
“만화 백과사전인 네가 그런 말하면 안 되지. 이 정도는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선입견이야. 선입견.”
역시 이 인간은 독수리오형제를 좋아한다는 걸 평소 잘 알고 있어서 뭘 살까, 고민하다가 유일한 여자인 3호를 샀다.
사실 일본판 제목은 ‘과학닌자대 캇차맨’이었지만, 역시 한국에서는 이 제목이 익숙하지.
“난 없냐?”
“자, 형 거.”
손바닥만 한 단검형태의 장난감을 건네다 강용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트리톤 검?”
“우연히 가게에서 발견한 건데. 형 생각나서 샀어. 모형도 잘 만들어진 것 같고.”
“고맙다. 나, 트리톤 정말 좋아하거든.”
“알고 있어. 화실에 트리톤 책받침이랑, 데즈카 오사무의 원작 만화책도 있는 걸 봤으니까.”
“그, 그런 것도 알고 있었냐? 어쨌건 감동이다. 이런 걸 받을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강용철은 당시 한국에서 방영한 ‘바다소년 트리톤’의 열성 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빨리 말해봐. 신작이라니?”
“아, 참. 깜빡했네.”
강용철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본론을 이야기했다.
“아까 전화에서 말한 것처럼 네가 일본에 있는 동안에 보물성에서 연락이 왔거든. 새 연재 건으로.”
“그래? 그래서 어떻게 말했는데?”
“일단 생각해보겠다고만 했지.”
“왜? 무조건 받았어야지.”
“이제 겨우 오리온의 표범 연재에 적응했는데.”
“뭐라는 거야? 일단, 형도, 문하생을 받아. 그럼 되는 거지.”
“나같이 가난한 만화가에서 문하생이 들어오려고나 하냐? 거기다 생 초짜만 받으면 연재 힘들어.”
하기야, 능숙한 실력을 가진 문하생들이 불분명한 신인 만화가 밑으로 들어 올리는 없지.
하지만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대봉이 형에게 연락하면 되겠네.”
“대봉이 형? 설마, 이대봉 씨랑 아는 사이냐?”
“어? 형도 잘 알아?”
“잘 아는 건 아니고. 몇 번 오며가며 보긴 했지. 거 뭐냐······, 좀 독특한 사람이잖아.”
강용철의 말에 내가 낄낄거렸다. 그 독특하다는 말뜻을 알아들어서다.
“그래도 그 형이랑 친해두면 좋아. 좀 끈적거리기는 하지만.”
그 순간 강용철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뭔가 떠오른 것이 있었던 걸까?
“그런데 왜 이대봉 씨에게 연락을 하려고?”
“왜긴, 마당발이잖아. 여기 우리 화실 식구들 그 형이 모두 소개해 줬는데.”
“그래?”
“혹시 알아? 예쁘고 실력 있는 여자 문하생을 소개시켜줄지.”
내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하자 강용철이 화들짝 놀란다.
“야, 무슨······.”
“어? 그런데 왜 얼굴을 빨개지고 그래?”
“내, 내가 언제!”
“생각했네, 생각했어.”
“아니라니까!”
강용철도 놀려먹는 맛이 있구만.
***
드디어 앙케이트 결과가 나오는 날.
지로는 긴장한 마음으로 동료 직원이 나눠준 A4 용지를 긴장한 표정으로 받았다.
나름 편집부에선 괜찮은 퀄리티의 만화에다 색다른 소재. 그리고 이야기의 흥미로움에 주목하고 있었다.
하지만 첫 화가 나간이후 ‘삼사라’의 반응은 예상 밖으로 뜨뜨미지근 했다.
첫 화에다 나름 야심차게 홍보까지 열심히 했음에도, 독자엽서에선 겨우 8위에 지나지 않았다. 총 20개의 작품에서 8위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첫 화의 성적은 보통 그 작품이 낼 수 있는 최고의 성적에 가깝다. 물론 연재 중에 자리를 완전히 잡는다면 상위권이 되겠지만 그 전까지로 치면
5위 이내가 되어야 상위권에 오래 남아있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8위였으니 담당인 지로의 실망이 큰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은 생소한 작품이라 그럴지도 몰라. 우리 잡지는 아무래도 소년지라는 특성도 있고, 주력이 개그나 명랑이다 보니 이런 무거운 소재의 만화가 단
번에 주목을 받기 힘들 수도 있지.”
“맞아, 좀비물이잖아. 좀비.”
팀장과 야지마가 지로를 위로하며 말했다.
“그래도 편집부에서 그렇게 믿고 있던 작품인데······.”
“아직은 1회가 나갔을 뿐이야. 좀 더 기다려 보자고.”
“네.”
실망스럽지만 지금으로서는 기다려보는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 설상가상 천원돌파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