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혈 만화가 (3) >
심호흡을 하고나서 곧바로 쌓였던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부시와 돈부리, 그리고 카츠라는 이 세 녀석이 서로 물고 물리는 관계라는 설정은 좋습니다만, 후반에 적혀있는 이 설정대로라면······.”
처음엔 가볍게 운을 던지며 시작했다.
수많은 덕후들의 의견을 반영해 나중에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미리 체크해 주는 정도로 시작한 대화로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모르게 이 키도라는 양반의 분위기에 휩쓸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꽤나 재미있는 아이디어가 막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진심의 남자’를 단번에 읽어가며 미치도록 답답했던 부분, 그리고 주인공이 결국 저지른 일을 후반에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이야기가 안드로메다까지
날아가 버리던 그 안타까움을 절규하듯 그에게 역설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진행은 곤란하다고!”
“무슨 소리냐. 아직 그렇게 진행하지 않았는데.”
“당신이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아!”
“······과연.”
“그렇게 쉽게 납득하지 말란 말이야!”
“아.”
우리들은 어느새 서로 높임말을 생략한 채 오랜 앙숙마냥 열을 올리며 피터지게 논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느낌 묘하게 즐겁다.
예전에 만화 커뮤니티에서 자칭 대구의 덕후왕이라던 남자와 신나게 키보드 배틀하던 때가 떠오른다. 그땐 얼마나 열을 올렸는지 장장 4시간이나 슬
램덩크에 대해 갑론을박했었다.
이 시대로 오고 나서 그런 즐거움이 없었는데, 엉뚱하게 일본에서 이러고 있으니 이것도 묘한 경험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제발 적당히들 하세요!”
나와 키도의 대화가 격렬해지자, 곁에서 구경하던 지로가 우리를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선희는 널찍한 소파에 앉아 일본 떡을 먹으며 키도의 작품인 ‘불타라 마구’를 읽고 있다.
그렇게 한참동안 우리가 옥신각신하며 다투는 사이, 지로는 포기했는지 축 늘어진 채 소파에 널브러져 있고, 여전히 선희는 각종 일본 떡을 쩝쩝 거리
며 만화책을 보고 있다.
그리고 2시간 정도의 열혈대화를 끝내고 나자 키도가 갑자기 내 어깨를 꽉 붙들더니 웃으며 큰 소리로 말한다.
“유난!”
“윤환이라니까!”
“나를 아니키(형)로 불러라!”
뭔 소리야?
“존칭어 따윈 필요 없다!”
“······아니키.”
“좋아!”
미친 듯 격렬하게 대화하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뭐, 그래도 상관없나.
이렇게 친분을 쌓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지.
“좋아, 유난. 네 의견을 받아들이겠다. 안 그래도 뭔가 항상 부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너와의 대화로 시원해진 기분이다. 좋아. 다음 작품은 이걸
로 정하고 곧바로 연재에 들어가겠다.”
“잘 생각했어. 형.”
“그리고 이 자리에서 바로 계약서를 쓰지.”
“계약서라니?”
“넌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냐?”
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대산데.
천원돌파 그렌라간?!
“형이지.”
“그래. 형이다. 이 형은 동생의 노력을 공짜로 주워 먹을 정도로 썩지 않았단 말이다!”
그렇게 말하며 그 자리에서 직접 계약서를 써 준다.
이거 생각보다 화끈한 인간이네.
인생 자체가 근성, 의리, 열혈이구만.
내용은 뭐 단순하지만, 스토리 권리 30%를 준다는 약속과 함께 도장까지 찍어버린다.
“어? 너무 과하잖아. 겨우 두 시간 떠들고 스토리의 30%라니.”
“오히려 이 형은 더 주고 싶다만, 출판사의 기본 룰이라 이 정도밖에 해줄 수 없구나.”
“······이런 미친. 그렇게 다 퍼주다 거지꼴 나.”
“그래도 이 형을 그렇게까지 생각해주니 고맙구나. 하지만, 이 결정에 후회는 없다!”
“어휴, 마음대로 하셔.”
그래도 인간적으로 2차 판권까지 요구하고 싶지는 않다. 어쨌든 저 양반이 다 만든 거나 다름없는 이야기에 숟가락만 살짝 얹은 거나 다름없으니.
그런데 이 와중에 선희는 떡을 다 먹고는 뭔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다.
뭘 하나 싶어 슬쩍 봤더니 책상위에 있던 빈 원고용지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키도가 크게 웃었다.
“하하, 괜찮다. 막내 동생이 그림을 그리는 건가?”
아, 이거.
선희는 자동으로 여동생에 등록된 건가?
아무튼 선희가 열중하던 그림을 얼핏 보니, 이제까지 그리던 그림과 전혀 다른 스타일로 보인다.
“······?”
호기심에 다가가 바라보니, 빈칸에 채워진 그림은 바로 키도의 그림체를 모방한 장면이었다.
아까 열심히 그림을 보더니, 그새 비슷한 그림체로 데생을 하고 있었다.
아까 키도의 책상에 있던 콘티를 보고 그것을 그대로 그리는 모양이었다.
“오, 이럴 수가!”
키도가 깜짝 놀라며 그림을 그리는 선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선희가 그리는 데생을 내려다보며 경악했다.
“여, 역시. 내 동생, 사니구나. 대단하다. 이런 열혈의 장면을 멋지게 그려내다니.”
내가 봐도 그동안의 선희와는 다른 스타일의 거친 펜선과 강렬한 느낌을 발산하는 콘티다.
이거, 선희가 섬세한 느낌과 다크스러운 느낌만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내가 처음 선희에게 구해주었던 동몽과 아키
라의 스타일을 따랐을 뿐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아, 그랬구나.
이 아이에게 딱 정해진 스타일이 아직 없는 거구나.
오히려 내가 선희는 이런 어두운 스타일을 그린다고 생각해서 그것에 맞춰 스토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오후에 키도의 화실을 나온 우리들은 다시 그의 86을 타고 아키하바라로 갔다.
차를 인근 주차장에 세워두고 모두 거리로 나갔다.
휴일이라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거리엔 사람들이 북적되고 있었다.
각종 전자제품 가게와 오락실, 그리고 뭔가를 열심히 홍보하는 여자도우미들이 마이크를 들고 열심히 떠들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카세트를 파는 가게 앞에선 요즘 유행중인 음악들이 흘러나오고, 그 앞에 있는 깔끔한 복장의 여자들이 팸플릿을 나눠준다.
비디오 공테이프를 진열해놓고 파는 직원들의 모습도 이색적이다.
그보다 내가 기억하고 있던 아키하바라의 수많은 피규어와 만화관련 가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 때문인지 길거리에 다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
반인들이다.
앞으로 이곳이 오타쿠들의 성지가 된다는 거로군.
뭔가 신기하면서도 재밌다.
나와 선희는 전자제품 가게를 돌면서 한국에 가지고 갈 선물들을 고르며 그렇게 하루를 또 마무리했다.
***
닷새간의 짧은 일정을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가족들에게 선물할 물건들을 잔뜩 사서 입국심사대를 통과하는데 생각하지 못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일본에서 들여오던 선물들을 압수당한 것이다.
“이 물건들은 안 됩니다.”
“밀수품도 아닌데 너무 하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젊은 직원이 버럭 소리친다.
“요즘 분위기 몰라요?! 전에 일본에 갔던 여행자들이 가전제품 잔뜩 사서 들어오다가 모조리 압수당한 거. 정부에서 이런 부분에 대한 걸 예민하게 생
각하고 있다고요!”
“그래도 너무하잖아요. 그냥 선물로 산건데 압수라니.”
“그러니까, 방금 말했잖아요.”
짜증이 밀려온다.
듣기론 작년에 일본에 갔던 여행객들이 전자제품을 무더기로 들여오다 공항에서 적발되어 문제가 된 모양이다.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한 단속이 강화됐
다는데.
그런 거야 어찌되었건, 기껏 산 물건들이 압수되니까 아까워 죽겠다.
그런데 그때 중년의 공항경찰 한명이 지나가다 우리를 빤히 보는가 싶더니 머리를 갸웃거린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다가왔다.
저 사람 어째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긴 하는데.
그 순간 공항경찰이 깜짝 놀라며 내게 물었다.
“아, 며칠 전에 아이 납치범 잡는데 도움을 주셨던 분들 아니시오?”
“네? 아, 네.”
아, 그러고 보니 줄설 때 모른 척 해주던 그 아저씨네.
그래도 우릴 용케 알아보다니 좀 놀라긴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 아저씨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곧 내게 말했다.
“잠시 만요! 여기 기다리고 있어요.”
그러고는 서둘러 어디론가 달려간다.
어어, 저러다 넘어지겠네. 바닥 미끄러운데.
배가 많이 나온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몸이 날쌔다.
그나저나 어딜 간 거지?
잠시 후 다른 공항경찰과 함께 달려온 아저씨가 나와 말다툼을 하던 직원에게 다가가 뭔가 숙덕거린다. 그러자 그가 놀란 눈으로 날 보더니 고개를 끄
덕인다.
“이번은 특별히, 가져오신 물건은 모두 돌려드릴게요.”
“네?”
특별이라니,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갑자기 압수당했던 물건들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 돌려받았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다.
“혹시 시간 되시면 저희랑 같이 가시면 안 될까요?”
경찰이 조심스럽게 묻는다.
“왜, 그러시죠?”
“아, 네. 전에 두 분께서 도와주신 분에게 연락을 넣었더니 꼭 좀 만나 뵀으면 해서요.”
고마운 마음은 이해하지만 오라 가라 하는 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적당히 거절을 하기로 했다.
“죄송한데, 지금은 바빠서 집으로 가봐야 합니다.”
“시간을 좀 내주실순 없을까요.”
“아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건데 별로 나서고 싶지도 않고요.”
“그쪽에서 꼭 사례를 하고 싶어 하는데, 혹시 원하시는 거라도.”
“괜찮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건데요.”
“그래도.”
“괜찮다고 전해주세요. 그럼 저희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아, 잠시만 더 기다려 주세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어디론가 서둘러 달려가더니 금방 돌아온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곧 자동차를 대기 시킬 테니 그걸 타고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자동차요?”
“네. 그래도 큰 은혜를 입었는데 아무것도 원하시지 않으신다니까 이렇게라도 신세를 갚고 싶다하십니다. 이건 거절하지 마시죠. 저희도 참 곤란한 입
장이라.”
“아, 뭐. 그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한 거야 뭐 우리 쪽이지만.
그가 우리를 바깥쪽으로 안내한다.
다시 돌려받은 물건이랑 개인 가방까지 직원 두 명이 다 들어준다.
호텔직원이면 모를까 공무원들이 이러니까 정말 부담스럽다.
바깥으로 나오는데 이런 모습이 신기한지 사람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따갑다.
공항청사 입구를 빠져나왔더니 곧 검은색 세단이 우리 앞에 멈춰 섰다.
“아, 저기 왔군요.”
딱 봐도 엄청 비싸 보이는 차다.
모양이야 뭐 볼품없지만, 얼마나 애지중지 관리하는 지 차 표면의 광이 엄청나다.
“그럼, 일단 이쪽에서 차를 준비했으니까, 그걸 타고 가세요.”
딱 봐도 엄청 부담스럽다.
공항경찰을 따라 세단으로 다가가자 말끔하게 양복으로 차려입은 중년의 운전사가 서둘러 뒷좌석의 문을 열어준다.
“자, 어서 타시죠.”
경찰이 웃으며 말한다.
이시절의 경찰은 내가 살던 시대와는 조금 다르다. 조금은 위엄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다소 강압적인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공항경찰
은 거북할 정도로 살갑게 군다.
아무리 우리가 도운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과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도 공항경찰이 이렇게까지 하는데 거부하기도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승용차에 탔다.
선희와 내가 뒷좌석에 오르자마자 운전기사가 문을 닫더니 경찰과 몇 마디를 나눈 후 곧바로 운전석에 올라탄다.
“가실 방향을 알려주시겠습니까?”
“그런데, 누구시죠? 그때 여자애 부모님이 보내신 겁니까?”
“네. 그렇습니다.”
뭔가 귀티가 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뭔가 예상을 넘어서는 부자인 모양이다.
“주소는요······.”
내 설명을 듣자마자 곧바로 검은 자동차가 출발했다.
< 열혈 만화가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