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72화 (72/425)

< 열혈 만화가 (2) >

잠시 후, 한산한 마을에 들어서고, 제법 커다란 2층 주택 앞에 멈춰 선다.

“이곳이 내가 기거하는 곳이라오.”

깔끔하지만, 적당한 크기의 단독주택이 즐비한 동네. 이곳에서도 유독 튀는 크기의 건물이다.

담 너머로 보이는 주택의 모양은 다른 주택과 달리 세련된 현대식이다. 아니, 지금 시절에서 보자면 미래적이라고 해야 할까.

과연 이름 있는 작가라서 그런지 이런 번듯한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구나.

사실, 만화가들의 전성기는 80년대라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그 시절 제법 이름 좀 있다는 만화가들의 집은 많은 잡지에 소개될 정도로 엄청난 곳이 많았으니까.

특히나 70년대 후반 소년점프에 연재되었던 ‘서킷의 늑대’를 그린 이케자와 사토시의 집에는 각종 슈퍼카가 즐비했다거나, 80년대 성인만화로 유명

했던 ‘유진’의 호화로운 집과 수영장에 대한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는 이야기다.

그 만큼 80년대는 거품시대였고, 만화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90년대로 접어들면서 만화가들도 수입이 줄어듦과 동시에 세금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사정이 나빠지긴 했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그 거품이 절정에 이른 시기니 인기 작가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알려진 만화가의 집이 이 정도라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자, 그럼 주차를 하겠소.”

주택 옆의 있는 커다란 창고 같은 곳에 차를 밀어 넣어 주차를 한다. 차 옆에는 멋들어진 신형 세단이 자리 잡고 있다.

주차가 끝나고 모두 차에서 내리자 키도가 정문으로 걸어가며 말한다.

“자자, 이쪽으로.”

문 앞에 다가간 키도가 초인종을 누른다.

- 누구세요?

여자의 목소리.

“나요. 부인.”

- 아, 네.

철컹.

문이 열린다.

안으로 들어가자 일본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정원이 나온다.

정원사가 따로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경에 상당히 신경을 쓴 것이 느껴진다. 물론 일본스럽다고 할 수 있는 정원이었다.

조그마한 연못엔 잉어도 있고, 일본 애니를 보면 정원 장면에서 꼭 등장하는 시시오도시도 보인다.

대나무 통이 물이 차면 기울어졌다 다시 본래대로 돌아가며 통통 하며 소리를 낸다.

그런 정원을 보며 키도를 따라 가는데, 건물에서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온다.

“어서 오세요. 어머, 손님이군요.”

수수하지만 단정한 차림의 30대로 보이는 여성이 키도에게 인사를 하다 우리를 발견하고 밝게 웃는다.

평소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모양인지 별달리 당황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는다.

그나저나, 웃는 인상이 푸근해 보이는 사모님이네.

“그렇소. 한국에서 온 굉장히 귀한 손님들이오.”

“한국인이신가요?”

“맞소.”

“안녕하세요. 남편이 신세를 늘 지고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지로의 말에 손사래를 치며 웃는 키도의 부인.

“부인, 화실로 차라도 내어 오시오.”

“네에.”

웃으며 대답한 키도의 아내가 가벼운 걸음으로 다시 안으로 들어간다.

뭐랄까, 상당히 상반된 느낌의 부부다. 하지만 어쩐지 서로 잘 어울린다는 느낌도 든다.

“화실은 저쪽이오.”

키도가 한쪽을 가리켰다.

문이 또 있다.

집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두 개가 있는데, 화실로 쓰는 공간은 아예 문을 따로 달아둔 모양이다.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거실, 그리고 중앙에 모여 있는 책상들이 눈에 들어온다. 자리는 중앙에 자리 잡은 메인책상이 아마도 키도의 책상인 모양이다.

아무튼 책상은 모두 7개다.

그렇다는 건 여섯 명의 어시가 있다는 뜻일까?

중앙에 있는 의자 주변에는 장식장이 벽면을 타고 길게 놓여있고, 그곳엔 각종 프라모델이나 개라지 킷이 잔뜩 놓여있다.

나는 장식장을 돌며 그것들을 구경하고, 선희는 책상위에 놓인 미완성 원고들을 구경하고 있다.

확실히 규모도 그렇고 뭔가 이쪽은 제대로 만화가라는 느낌이 드는 화실이다. 이것 과 비교하면 확실히 우리화실은 심하게 조촐한 편이다.

그렇게 감탄하며 화실을 돌아보는데 그때 키도의 부인이 쟁반에 차와 간식거리를 담아 온다.

검은 사각의 곽에 들어있는 것으로 색이 다양하고 하나하나가 모두 예쁘다.

“나마가시라고 화과자의 한 종류입니다. 드셔보세요.”

“오, 적당한 것을 가져왔군. 고맙소, 부인.”

“네.”

웃으며 대답하는 키도의 아내가 테이블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그림에 빠져 있던 선희가 어느새 다가와 화과자를 빤히 바라본다.

“사니 선생도 드셔보시오.”

키도가 그렇게 말하자 선희의 표정이 밝아지며 하나를 집어 입에 덥석 베어 물었다.

“떡 맛나.”

“떡?”

나도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과연 떡처럼 말캉거린다.

입에 넣어보니 찹쌀떡 같은 맛이 난다.

“아, 그러네.”

“나마가시는 한국으로 치면 떡과 같은 겁니다. 한나마가시는 수분이 적은 과자이고요. 제가 한국에 가져갔던 게 한나마가시 종류입니다.”

“오, 과연 편집자.”

키도가 감탄하자 지로도 기분이 좋은지 코를 살짝 세운다.

어쨌거나 생각보다 맛있다는 생각을 하는데, 선희는 어느새 가져온 화과자의 반 이상을 먹어치운다.

“어머나, 잠시 만요. 더 가져올게요.”

“많이 가져오구려.”

“네. 알겠어요.”

키도의 부인이 빠른 발걸음으로 사라지더니 처음 가져왔던 것에 서너 배는 족히 될법한 양을 들고 온다.

“많이 드세요. 모자라면 더 가져다 드릴게요. 그나저나 어린 여자아이가 잘 먹으니까 복스럽고 좋아요.”

“어린 여자아이라니, 만화가 선생이오.”

“어머나, 죄송해요. 제가 실례를.”

“아내를 대신해서 내가 사과하겠소.”

“아니, 뭐 별일도 아닌데요. 사과까지 할 필요는······.”

그렇게 말하며 선희를 돌아보니 얜 떡, 아니 화과자를 입에 밀어 넣느라 정신이 없다. 누가 보면 밥 굶고 다니는 줄 알겠다.

그나저나 이 키도 이사람 진짜 유별나네. 아무리 시대가 80년대라고는 해도 이 사람은 정말 독특한 캐릭터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무튼 그렇게 선희가 일본 떡 삼매경에 빠진 사이 키도의 부인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유난 선생.”

키도가 나를 불렀다. 이름은 좀 이상하지만.

“윤환입니다만.”

“혹시 말인데······, 내 만화 보셨소?”

“불타라 마구 말입니까?”

내 말에 키도가 깜짝 놀라더니 의외라는 표정이다.

“오, 아시는군.”

물론이다.

거기다 몇 년 뒤 미래에 나올 ‘진심의 남자’도 봤다.

하지만 진심의 남자는 좀 많이 아쉬운 만화였지만.

불타라 마구 만큼의 히트는 아니어도 나쁘지 않은 인기를 얻긴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느낌이 많았던 작품이다.

읽으면서도 ‘아, 여기서 이랬으면 어땠을까?’이란 생각을 수없이 했던 작품이었다. 충분히 그 시대에 각인 될 만한 작품이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혹시 감상평을 들을 수 있겠소이까?”

“감상평요?”

아, 지금 묻는 건 불타라 마구였지.

“네. 한국인 출신의 스토리 작가 선생님의 눈에 제 작품이 어떻게 보였을지 궁금해서 그렇다오.”

그가 정말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날 보며 말한다.

그런데 이사람 원래 말투가 이런가? 생각해보니 자신의 만화 ‘불타라 마구’의 도깨비 감독이 저런 말투를 썼던 걸로 기억한다.

진짜로 저런 말투를 실생활에 쓰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는데.

“괜찮은 열혈야구만화였어요.”

적절한 수준의 평가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 양반의 표정엔 불만이 서려있다.

“그뿐이오?”

“냉정하게 말해달라는 건가요?”

“네. 되도록 강하게 해줬으면 좋겠소이다.”

“내 평가가 중요할까요?”

“당신의 평가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오.”

“······.”

뭘 근거로 저런 생각을 하는 건지.

어쨌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뭐 해주도록 하지.

안 그래도 이 작품 역시 하고 싶은 말이 많으니까.

“중반까지는 괜찮은 열혈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름 거인의 별 같은 느낌도 나쁘지 않았고요.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너무 괴상해졌어요. 더 이상

야구가 아닌 무슨 외계인들의 경기인양 초인들이 난무하고.”

그 말에 키도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게 근성물이지. 점점 강한 상대를 상대하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이야기 전개이기도 하고 말이요.”

에스컬레이터 식 배틀물의 문제점이기도 하다. 사실 드래곤볼이나 원피스 또 한 가지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쪽은 원래 말 그대로 배틀

이 주류니까 그렇다 쳐도 이쪽은 야구만화다.

그러나 야구라는 탈을 쓴 배틀물에 가까운 극렬 근성만화였다고는 해도 그 때문에 히트를 쳤으니 그게 문제라고 말라는 건 웃기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후대에도 인기작으로 남기엔 후반이 확실히 아쉬운 건 사실이에요.”

“후대······요? 유난 선생님은 그런 것도 생각하십니까?”

“당연하죠.”

“과연······.”

납득했는지 머리를 크게 끄덕거린다.

“사실 초반 전개에 비해 후반부분이 너무 아쉬웠거든요.”

“흐음······.”

뭔가를 생각하는지 잠시 말이 없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며 붙었던 입술을 뗀다.

“저기, 내가 지금 구상중인 이야기가 있는데······. 좀 읽어봐 주면 안 되겠소이까?”

“그러죠.”

하지만, 속으로는 ‘아싸!’하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신작 스토리라는 말에 예상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키도가 서둘러 자신의 자리에서 노트를 한권 들고 오더니 내게 내밀었다.

“여기 있소이다. 한 번 봐주시오.”

그것을 받아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첫 장을 넘겨보았다.

역시 생각대로였다.

‘진심의 남자’란 제목이 첫 페이지에 떡하니 적혀있다.

일단 제목은 내가 기억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첫 페이지를 넘겨 살펴보니, 내가 기억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시작이었다.

화끈한 사건이 벌어지는 장면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여기서는 스토리가 처음부터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그 때문인지 초반이

야기가 약간 루즈하다.

아직 제대로 이야기가 잡히기 전인 모양이라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

서둘러 콘티를 넘겨갔다.

초반을 넘어가고 부터는 기억과 별로 다른 건 없다. 기억에 없는 장면 몇 개가 있고, 재미있었던 에피소드가 중간에 빠져있는 것만 빼면.

쭉쭉 읽어간 뒤 후반부분에 대해선 대략적인 글로 전개방향을 정해두었고, 내가 기억하던 결론이 후반부분에 적혀있다.

전체적인 맥락이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어떻소이까?”

뭔가 기대하는 듯한 눈빛이다.

“괜찮아요. 이정도면 반응이 좋을 것 같아요.”

“뭔가 팍 터질 것 같지 않소이까?”

“팍, 터질 정도는······. 하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정도의 반응은 올 것 같군요.”

“보기보다 확실히 직설적이시구만.”

“죄송합니다.”

“아니오. 난 아무렇지도 않소. 솔직히 나도 이걸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스스로도 그렇게 여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개인적으로도 ‘진심의 남자’는 나쁘지 않다.

다만, 중후반에 시작되는 끝없는 폭주가 문제일 뿐이다. 만약 그 폭주부분을 어느 정도 절제하고 처음의 느낌을 유지했더라면 충분히 대작의 반열에

들 수 있었을 거라는 것이 많은 오덕들의 평가고, 나 역시 그 점은 동의하고 있다.

“좀 더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될까요?”

“오, 그래. 바로 내가 바라는 거요.”

“좋습니다. 그럼 제대로 독설을 던져보겠습니다.”

“좋아! 그런 기백이지. 해보구려!”

그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모처럼 피가 끓는구만.

한번 제대로 털어주마.

< 열혈 만화가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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