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혈 만화가 (1) >
지로가 아침 일찍 찾아왔다.
“오늘 모처럼 휴일이니까, 직접 도쿄 주변을 안내하겠습니다.”
“괜히 저희들 때문에 아카기 씨가 쉬는 날을 방해받는 것 같은데.”
내 말에 지로가 손을 내저으며 사람 좋은 미소로 말했다.
“아닙니다. 담당으로서 당연한 일이죠. 그리고 저도 이게 즐겁구요.”
그렇게 선희와 나는 외출준비를 끝내고 지로를 따라 맨션을 나섰다.
그런데 그때 맨션 앞으로 지나갈 줄 알았던 차가 갑자기 우리 앞에서 멈춰 섰다.
검은 색과 흰색이 조화된 차.
“······어?”
어째 익숙한 승용차다.
“저거, 86 아닌가요?”
“86이요?”
지로가 묘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마도 지로는 눈앞에 있는 이 차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모양이다.
물론 나야 당연히 알 수밖에 없는 자동차다.
그 유명한 후지와라 두부점의 아들 타쿠미가 몰던 세계적인 차가 아닌가.
차의 이름은 토레노.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유명하지는 않겠지.
이 자동차가 유명하게 만든 만화 ‘이니셜 D’가 연재를 시작하는 시기가 1995년이니까, 아직 11년 후의 미래다. 그래서 지금 시절에는 그저 차를 좋아
하는 덕후들이나 알아보는 차일 것이다.
일각에서는 86을 86년에 나온 차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AE86은 섀시코드이고, 정확히 생산은 83년이다.
물론 내가 차의 전문가인건 아니고, 단지 이니셜D의 팬이어서 알고 있는 정보일 뿐이다.
아무튼 만화로는 수없이 봐온 친근한 모델임에도 직접 본건 처음이라 그 느낌이 남다르다.
이 시절 일본은 돈이 많던 시절이라 그런지 젊은 사람들도 고가의 자동차들을 많이 몰고 다닌다. 듣기로는 시계와 자동차가 일본 젊은이들의 로망이란
다.
만약 지금 이 사람들에게 미래의 젊은이들은 경차도 구입하길 꺼려하게 된다고 말한다면 믿어줄까?
지금처럼 미국마저 경제로 위협하던 시절의 일본인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 치부될 것이다. 하다못해 지금 세계최고라 부르는 전자제품마저 한
국에게 따라잡혔다는 얘기까지 듣는다면 졸도하는 사람들도 나올지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그런데 앞에 멈춰 섰던 차 운전석에서 사람이 내린다.
커다란 선글라스에 멋들어지게 넘긴 올백머리가 인상적인 마른 체형의 남자다.
수염이 조금 지저분하지만, 저것도 나름 멋스럽다.
그런 그가 우리를 스윽 보더니 선글라스를 벗는다.
얼굴을 보니, 30대 초중반쯤 될 것 같다.
그런데 곁에 있던 지로가 깜짝 놀라고 있다.
아는 사람인가?
“키, 키도 선생님!”
키도? 누구지?
남자가 오른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폼 나게 웃는다.
“여어, 신입 편집자 씨. 반갑네.”
그렇게 말하더니 나를 슬쩍 돌아보며 피식 웃는다.
뭐지 이사람?
이 기괴한 몸놀림과 몸에서 풍기는 아우라는?
“오호, 그 쪽이 그러니까. 요즘 출판사내에서 시끌벅적한 그 신인 씨?!”
그렇게 말하더니 내 쪽으로 다가온다.
“반갑소! 나, 키도 죠타로라고 하오!”
키도 죠타로?
설마 80년대 황당하면서도 제법 인기 있던 열혈물을 그렸던 작가?
그래도 나름 80년대엔 꽤나 인상적인 만화를 많이 그렸던 걸로 기억한다.
90년대 중반까지 제법 인기를 끌었지만, 그 이후 작품 활동이 뜸해져 잊혀졌던 만화가들 중 한명이다.
물론 그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다.
“안녕하세요. 이윤환입니다.”
“응? 당신, 일본인이 아니었던 거요?”
그나저나 이 사람 말투가 왜 이래? 컨셉이야, 아니면 장난?
“네.”
“그럼, 어디? 중국? 대만? 홍콩?”
가장 가까운 한국을 빼먹고 말하니까 짜증이 나려한다.
그런데 이 시절 일본에게 한국은 그야말로 투명국가 취급을 받았으니, 아예 한국이 어디있는지도 모르는 사람들도 많고.
그래도 눈앞에서 이런 취급을 받는 건 기분 나쁘다.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말이다.
“한국입니다. 한국.”
“한국? 정말이오?”
꽤나 놀란 표정으로 곁에 있는 지로를 바라본다. 그러자 지로가 어색하게 웃는다.
그 모습을 본 키도가 곧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다.
“오호라, 그래서 만나는 게 쉽지 않다고 내게 얘기했구만.”
하지만 내가 한국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깔본다거나 하는 느낌은 아니다.
그나저나 이 사람이 왜 날 만나고 싶어 한 거지? 단순한 호기심?
“그런데 여긴 어떻게 알고······.”
지로의 질문에 키도가 시선을 살짝 피하더니 크게 웃었다.
“아하하, 뭐 그건 알거 없고.”
“담당이 뭔가 엿들었나보군요.”
“이거, 눈치가······. 크음.”
대화를 들어보니, 출판사 내에서도 우리에 대한 소문을 통제하는 모양이다.
굳이 비밀로 할 필요는 없지만, 알려줘서 좋을 것도 없지. 나도 귀찮은 건 싫으니까.
“그나저나 젊어 보이는데, 대단하지 않소이까, 그만한 그림에 흥미진진한 내용의 스토리까지. 본인은 정말 놀랐소.”
“아, 죄송한데. 저는 스토리 담당이고. 이쪽 제 여동생이 그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뭐요? 여동생?”
이 인간 계속 우리랑 대화하고 있었으면서도 곁에 있던 선희의 존재감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선희를 보고는 정말 제대로 놀라고 있
는 걸 보면.
“이, 이 아이. 아니, 이 어린 선생이 삼사라를 그렸다고?”
그 말에 지로가 머리를 끄덕였다.
“배경은 설마 직접······?”
“데생만 그리고, 펜선과 톤 작업은 어시가 했습니다.”
“어쨌건 데생은 본인이 직접 했다는 거잖소!”
“네.”
내가 머리를 끄덕이자 새삼 놀랐다는 듯 선희를 바라본다.
선희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키도를 올려다 볼 뿐이다. 그런 선희를 보던 키도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더니 날 보며 물었다.
“아, 혹시 이 소녀······ 선생은 일본어를 모르는 거요?”
“······알아요. 이름은 써니.”
선희의 대답에 다시 화들짝 놀란다.
“사, 사니?”
“써니!”
“소니?”
“써니!”
안되겠다 싶어서 내가 끼어들었다.
“그냥. 여기선 사니로 하자. 응?”
“······알았어.”
“······.”
금방 수긍해 버리니 이것도 뭔가 김빠진다.
그런데 방금 벌어진 공방전은 기억 못하는지 키도는 놀란 표정으로 나와 선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대단하군, 대단해! 정말 놀라운 남매요! 만화에다 일본어까지!”
그가 감탄하는 사이 지로가 다시 끼어들어 그를 가로막는다.
“저기, 키도 선생님 저희는 이만 바빠서.”
“어디로 갈 지는 모르겠지만, 내 차를 타고 가는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하는데.”
“네? 선생님 안 바쁘세요?”
“바쁠 게 뭐가 있나. 알다시피 연재도 끝냈으니, 요즘은 한가하다네.”
“신작 준비 안하세요?”
“일단 어시들 급여 절반 정도 주기로 하고 모두 쉬게 했다네. 아마도 각자 다른 만화가 어시를 임시로 하겠지만 말이지. 그나저나 자네는 내 담당도 아
니면서 왜 간섭하고 그러는 건가?”
“아, 죄송합니다. 어쨌건 선생님께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습니다.”
“폐라니 우리사이에.”
그렇게 말하며 껄껄 웃더니 우리 쪽을 돌아본다.
“두 분 선생님들은 어떻습니까?”
그 말에 내가 피식 웃었다.
“저희야, 뭐 그렇게까지 해주시겠다면 감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저 두부가게 차는 꼭 타보고 싶었다.
선희도 언제 꺼냈는지 막대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차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다. 선희의 눈에도 차의 모양이 좀 신기해 보이나보다.
아무튼 내 말에 키도가 손뼉을 짝하고 친다.
“잘 되었군! 그럼 내가 직접 이 친구 대신 도쿄구경을 시켜주겠소. 자네는 모처럼 쉬는 날이지 않은가, 그냥 집에서 쉬는 게 어떻겠나?”
“아닙니다. 아무래도 키도 선생님께만 두 분을 맡겨두는 건 마음이 놓이지 않으니까, 저도 따라 나서겠습니다.”
“하핫, 그래 그럼 자네도 함께 가지. 그런가.”
키도가 웃으며 말하더니 조수석 의자를 뒤로 젖혔다.
“자, 얼른 타시오.”
기본적으로 86은 쿠페다보니 뒷좌석 문은 없어서 젖혀진 의자 뒤로 뒷좌석에 선희와 함께 탔다.
그런데 막상 차를 타보니 특별한 건 없다.
오히려 자리도 좁고 의자도 불편하다.
나 같은 마니아에겐 이것도 색다른 경험이라 좋긴 하지만, 역시 내가 살던 시절의 일반 세단이 훨씬 편한 것 같다.
같이 탄 선희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차의 내부를 이리 기웃, 저리 기웃거린다.
“일본관광은 처음이시오?”
“네.”
일본에 온건 처음이 아니지만, 80년대는 처음이지.
아무튼 내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다.
“자 그럼, 출발하겠소.”
그렇게 말하고는 곧장 차를 출발시킨다.
차는 생각보다 시원하게 달려 나간다.
마음 같아선 아키나의 시원한 내리막길을 드리프트로 달려보라고 말하고 싶지만, 키도의 운전 실력을 제대로 모르는 이상 그런 목숨 건 주문을 할 수
는 없는 일이다.
아무튼 차는 그렇게 시내를 이리저리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일본 거리를 보며 생각에 잠겨있는데 어느새 차는 하라주쿠에 진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리 곳곳 한적한 장소엔 옛날 만화책에서 보던 기괴한 폭주족 머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저걸 리젠트파마라고 하던가. 아무튼
만화로만 보던 개조 교복에 특공복까지 입은 모습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왜 웃소이까?”
키도가 내 웃음소리를 들었는지 룸미러를 통해 날 보며 물었다.
“아뇨. 실제 일본 폭주족들을 보니까, 어째 신기해서.”
내 말에 키도도 동의하는지 피식 웃었다.
“본인도 저런 모습으로 생활한 적이 있지요.”
“네? 키도 선생님 폭주족 출신이세요?”
“뭐, 그래봐야 눈에 띄지도 않던 한심한 놈이었지만 말이오.”
그렇게 말하며 다시 웃는다.
역시 저런 독특한 경험을 만화에 녹여냈던 거구만. 하긴 키도의 만화는 뭔가 과한 열정과 자아도취 같은 게 많긴 했지.
아무튼 인근 주차장에 차를 주차해두고 하라주쿠 보행자도로를 걸어보기도 했다.
내가 살던 시대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어쨌건 아이돌이 한참 유행하는 시기여서 그런지 주변엔 굿즈가게라든가 옷가게가 상당히 많다.
하라주쿠에서 점심으로 유명한 라면집에서 식사를 한 후, 곧바로 신주쿠로 이동했다. 그 다음은 도쿄타워까지.
이미 가본 곳임에도 시대적 차이 때문인지 상당히 새로운 느낌도 있다.
그렇게 한참 돌고는 그가 다시 내게 물었다.
“이제 마지막으로 가볼 곳이 있소이다만.”
“어딥니까?”
내 질문에 그가 피식 웃었다.
“좋은 곳.”
그러자 조수석에 앉아있던 지로가 실눈을 뜨고 그를 보며 조용히 경고하듯 말했다.
“저기, 아시겠지만. 작은 사니 선생님은 미성년자입니다.”
“어허, 내가 멍청이로 보이나. 설마 사니 선생이 끼어있는데 요정 같은 곳에 갈 거라 생각했나?”
“그럼 어디 가시게요?”
“우리 화실일세.”
“네?”
지로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변한다.
“그럼, 결국 이제까지 도쿄 주변을 관광시켜준 이유가······.”
“뭐, 그렇지.”
“어이가 없군요.”
지로가 그렇게 말하고는 내 쪽으로 돌아본다.
아마도 직접 결정하라는 뜻이겠지.
“전 괜찮아요. 화실 구경해보고 싶습니다.”
난 오히려 환영이다.
특별히 도쿄의 어딘가 꼭 가고 싶다고 할 만한 곳은 없으니까.
그리고 나의 본질이 뭐냐.
바로 덕후가 아닌가.
80년대 활동하던 일본만화가의 화실을 구경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그런데 선희도 나와 생각이 비슷한지 눈을 반짝거린다.
역시 이아이도 키도의 화실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오, 역시.”
키도는 내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웃으며 좋아라한다. 하지만 지로는 반대로 걱정스럽다는 표정이다.
“괜찮으세요?”
“어이 어이, 괜찮냐니 그게 무슨 뜻인가? 우리 화실 그래도 제법 크고 깨끗하다네. 안락하기도 하고. 손님들에게 욕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 문제가 아니죠. 키도 선생님의 꿍꿍이를 알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 그래도 내가 제법 이름이 있는 기성만화가인데, 신입 편집자 주제에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닌가?”
“제 담당이 아니니까, 상관없습니다.”
“이런 발칙한 신입을 봤나.”
그렇게 말하며 키도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지만,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판단하건데, 키도라는 사람은 저 괴상한 말투를 빼면 그럭저
럭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는 모양이다.
하긴, 오늘 내내 같이 도쿄를 돌아다닐 때도 느끼긴 했지만.
“전 괜찮아요. 화실 구경해보고 싶습니다.”
난 오히려 환영이다.
특별히 도쿄의 어딘가 꼭 가고 싶다고 할 만한 곳은 없으니까.
그리고 나의 본질이 뭐냐.
바로 덕후가 아닌가.
80년대 활동하던 일본만화가의 화실을 구경할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그런데 선희도 나와 생각이 비슷한지 눈을 반짝거린다.
역시 이아이도 키도의 화실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오, 역시.”
키도는 내 반응이 만족스러운지 웃으며 좋아라한다. 하지만 지로는 반대로 걱정스럽다는 표정이다.
“괜찮으세요?”
“어이 어이, 괜찮냐니 그게 무슨 뜻인가? 우리 화실 그래도 제법 크고 깨끗하다네. 안락하기도 하고. 손님들에게 욕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 문제가 아니죠. 키도 선생님의 꿍꿍이를 알 수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너, 그래도 내가 제법 이름이 있는 기성만화가인데, 신입 편집자 주제에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닌가?”
“제 담당이 아니니까, 상관없습니다.”
“이런 발칙한 신입을 봤나.”
그렇게 말하며 키도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지만, 이런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판단하건데, 키도라는 사람은 저 괴상한 말투를 빼면 그럭저
럭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는 모양이다.
하긴, 오늘 내내 같이 도쿄를 돌아다닐 때도 느끼긴 했지만.
아무튼 키도가 뒤를 보며 히죽 웃고는 시동을 걸었다.
“자, 그럼 출발하겠소이다.”
그렇게 말하며 차를 출발시켰다.
< 열혈 만화가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