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끌국(國) 녀석들 (2) [무료 마지막]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난 후, 화면이 밝아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에도 선희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그리고 그 엔딩 크레딧조차 완전히 끝났는데도 가만히 앉아있다.
극장 관객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고, 모두 나가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얘 도대체 빈 화면을 왜 보고 있는 걸까.
극장 안에 남아 있는 사람이 얼마 없는데도 계속 저러고 있으니.
“선희야.”
“······.”
“선희야.”
내가 몇 번 더 어깨를 두드리고 나서야 머리를 돌려 날 올려다본다.
마치 금방 잠에서 깨어난 듯한 표정이다.
“가자. 다 끝났어.”
내가 웃으며 말하자 눈알을 데굴거리더니 그제야 꾹 다물었던 입을 뗀다.
“······어.”
머리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녀석, 만화에 어지간히도 충격을 받은 모양이네.
그나저나 한순간이라도 정신줄 놓고 한눈팔면 이 녀석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정신 바짝 차려야지.
그렇게 아직 꿈에서 덜 깬 듯한 선희를 데리고 극장을 나왔다. 그리고 극장의 복도를 걸어가며 물었다.
“뭘 그렇게 멍하게 보고 있었냐?”
“······나도 몰라.”
“몰라? 그냥 멍 때린 거야?”
멍 때린다는 말이 이상한지 잠시 갸웃거렸지만, 곧 다시 눈알을 굴리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냥 머릿속에 계속 장면들이 떠올라서.”
“······.”
컬쳐쇼크는 확실해 보이는데, 감동을 했다는 건지, 아니면 혼란이 왔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뭐, 애초에 선희의 생각을 이해한다는 게 무리겠지만.
그래도 이런 반응은 처음이라 재밌기는 하다.
“그래, 다보고 나서의 감상은? 재미는 있었어?”
“······응. 무척.”
선희가 만족했다는 듯 입 꼬리를 살짝 끌어올리며 웃는다.
요즘 들어 느끼는 거지만 이 녀석, 표정이 조금씩 풍부해지고 있다. 엄마가 또 이 모습 보시면 우시겠지.
그런데 그때였다.
복도를 빠져나와 넓은 홀에 들어서자 여러 명이 뭉친 한 무리가 우리 쪽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그들을 슬금슬금 피하는 눈치다.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그런 그들의 수다가 점점 크게 들린다.
“와, 소문대로 잘 만들었다.”
“그러게, 아니메쥬 연재만화를 극장판으로 잘 옮겼네.”
“느긋하게 시작하는 영상이 좋았어.”
하지만 불만의 목소리도 들린다.
“그래도, 좀 마무리는 아닌 것 같더라. 나우시카의 희생으로 얼렁뚱땅 마무리 한 것 같잖아.”
“아마도 연재만화가 아직 끝나지 않아서 그렇겠지. 엔딩에 대한 구체적인 생각이 없는 상태였을지도 몰라.”
“역시, 그렇겠지. 하기야, 애초에 스즈키 토시오의 권유로 시작했으니까.”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괜찮았어. 파멸적인 미래에 대한 느낌도 좋고.”
“그래도 난 코난처럼 밝은 이미지도 있었으면 했는데.”
“야, 애초에 코난은 원작이 있는 거잖아.”
“그래도 원작내용과는 상당히 다르지.”
“맞아.”
과연 오타쿠들이구나.
대화 자체가 많은 정보 없이는 불가능한 내용들이니까.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 시절의 오타쿠, 어쩌면 초창기 세대 쯤 되는 이들에 대해 궁금하다는 생각에 본능적으로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그런데 선희 역시도 그 사람들의 대화에 관심을 가지는지 귀를 쫑긋 세우는 느낌이다. 만약 만화로 이 모습을 표현했다면, 아마 저 작은 머리 위에 고양이 귀가 쫑긋하며 까딱까딱 거릴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나저나 코미케에서 동인지를 150권이나 팔아서 그런지 제법 인지도가 올라간 모양이더라. 엊그제 카페 행사에 갔더니 사람들이 꽤나 알아보는 것 같았어.”
“오, 그래?”
“그리고 카페 행사에 누가 왔는지 아냐?”
남자의 말에 무리 속,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몰린다.
“누구?”
“듣고 놀라지 마라.”
“누군데 그렇게 분위기를 띄워?”
“빨리 말해. 미친놈아.”
“그래. 빨리!”
사람들이 소리치자 주변 사람들이 인상을 찌푸리며 주변에서 더욱 멀어진다.
누군가는 수군거리는 소리로 “진짜 싫다. 저 사람들.” 이라고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또 저런 인간들이 모였어.’라며 중얼거리기도 한다.
아직은 ‘오타쿠’라는 말이 일반인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시절이라, 주변에서 오타쿠라는 말이 들리지는 않는다.
사실, 오타쿠라는 말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건 1983년 (만화브릿코)라는 잡지에 기고한 글에서 일반인에게 처음 알려졌으니까.
몰론 그 글에서 오타쿠들이 서로를 지칭하던 말이라고 했으니 그 이전부터 이들은 사용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직은 일반인에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사실, 오타쿠가 일반인에게 유명해지게 된 사건은 따로 있었다.
유아연쇄살인 사건으로 88-89년 일본을 충격에 빠트렸던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인 미야자키 츠토무의 집을 수색한 결과 각종 만화책, 비디오들이 무더기로 나왔고, 그가 오타쿠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오타쿠라는 것이 세상이 알려진 것이다.
이 사건 이후로 일본사회엔 오타쿠라는 단어에 혐오감을 가졌으며 당시 오타쿠들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장소에선 자신이 애니, 만화를 좋아한다는 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나마 그런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건 95년 에반게리온의 등장 때문이었다고 한다.
뭐, 어쨌건 지금 기준에선 미래의 일이고, 아직은 그저 이상한 사람정도로만 취급받던 시절이니까.
이 오타쿠들도 주변사람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관계없다는 듯 자기들만의 이야기에 빠져있다.
“붉은 혜성 성우님이 오셨다는 거 아니냐.”
“꺄악! 진짜!”
“정말이야!”
“정말, 샤아의 성우인 이케다 님이 직접 오셨다고?”
“그래.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우리 연구회에선 난리 났더라고.”
“젠장, 회사고 뭐고 무조건 하루 쉬고 갔어야 하는 건데.”
더벅머리의 남자가 머리를 쥐어뜯는 시늉을 리얼하게 했다.
‘붉은 혜성’은 ‘기동전사 건담’의 인기 캐릭터인 ‘샤아 아즈나블’의 닉네임이다.
이 시절 건담의 인기라는 게 상상초월이었는데 특히나 주인공 아므로 레이나 맞수인 적 샤아 아즈나블의 인기는 최고였다.
물론 내년에 방영을 시작하게 될 ‘기동전사 Z건담’에서는 샤아의 인기가 그야말로 폭발하게 된다. 뭐 어느 정도냐면, 방영 마지막 편에 그가 우주미아가 되었을 땐 여학생들의 대규모 자살소동까지 벌어졌을 정도였다.
물론 그 부분을 감독인 토미노 요시우키가 죽지 않았다고 다시 설명하며 대충 마무리가 되었고, 실제 몇 년 후에 극장판 ‘기동전사 건담 역습의 샤아’ 편에선 아예 다시 악당으로 만든 뒤 주인공 아무로 레이와 장렬하게 전사하며 마무리 시켜버렸지만.
화가 난 감독이 팬들의 극성 때문에 샤아의 이미지를 일부러 파괴시켰다는 것도 유명한 얘기다.
그러고 보면 토미노 감독의 별명이 괜히 ‘몰살의 토미노’인 게 아니다.
“토요일엔 마크로스 비디오 상영회도 있어. 특히 이타노 서커스 장면을 주로 보여줄 거래.”
“와, 진성 오타쿠들 엄청 몰려들겠네.”
“설마 이타노 이치로가 직접 오지는 않겠지?”
“온다면 전국에서 오타쿠들 다 모여들걸?”
“극장판 나온다는 얘기 있지 않았어?”
“7월쯤에 나올 거래. 카와모리 쇼지가 감독.”
“와, 이번 극장판 엄청 기대하고 있어. 그런데 스토리는 TV판과 다르다고 하던데.”
“다른 건 필요 없어. 이타노 서커스면 되는 거야.”
“난, 민메이 노래가 기대가 되는데.”
일반인이 듣는다면 뭔 소리야 하는 대화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나야 뭐, 시대가 다를 뿐이지 이시대의 오타쿠나 다름없는 인간이니까. 거기다 이 시대에 대한 것에도 관심이 많고.
하지만 선희는 이내 지루함을 느꼈는지 곧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러고 보니 극장 안에 있는 매점, 그곳에 있는 팝콘 같은 것에 눈길을 돌리고 있다.
“또 먹고 싶니?”
그 말에 머리를 끄덕인다.
그런데 그때 발밑에 뭔가가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느껴진다.
“어?”
황당하게도 발밑에 있는 건 고양이였다. 공교롭게도 흰색의 고양이.
그런데, 이놈 어쩐지 너무 닮았다. 설마 아니겠지.
“설기야.”
황당하게도 선희가 설기라고 부른다.
“야, 설기는 무슨.”
그런데 녀석의 눈빛.
맞다.
이놈, 백설기가 틀림없다.
냐아아앙.
“얘, 도대체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야?”
어이가 없어 멍한 얼굴로 녀석을 바라봤다.
설마 녀석이 티켓을 끊어 비행기를 타고 왔을 리도 없고.
이놈이 보통의 고양이가 아니라는 걸 가끔 잊고 지내지만, 확실히 이런 걸 보면 뭔가 요물이구나 싶기는 하다.
진짜 이놈 정체는 뭘까?
선희가 백설기를 안고는 극장 안 슈퍼를 다시 바라본다. 그런데 백설기 이놈도 같은 방향으로 시선이 가 있다.
둘이서 아주 압박을 제대로 하는구나.
“알았어. 사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
그렇게 말하고는 슈퍼로 들어가 팝콘과 따듯한 음료를 같이 사들고 나왔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선희가 보이지 않는다.
“이 녀석, 어디를 간 거야?”
순간 당황해 주변을 이리저리 두리번 거려보았다. 하지만 덩치가 작은 탓에 찾기가 쉽지 않다.
타지에서 갑자기 선희를 잃어버리자 나도 모르게 당황하고 있었다.
뭔가 호기심이 발동한 것일까?
주변을 살피다 사람이 웅성거리는 곳에 시선이 갔다.
아까 시끌벅적하던 오타쿠무리였다. 그런데 그 속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관심을 끌었다.
“얘 정말 대단하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가가서 살폈더니 그 무리 속에 선희가 보인다.
그런데 쟤는 거기서 뭘 하는 거야?
무리 속을 뚫고 들어가 봤더니 사람들 사이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아까, 극장에서 본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등장하는 거대 벌레 오무를 그리고 있다.
“와, 대단해. 정말 잘 그린다.”
“미야자키 선생님의 따님이 아닐까?”
그 말에 사람들이 웃는다.
“귀엽게 생겼는데 그림까지 잘 그려. 엄청나구나.”
선희가 그림을 다 그렸는지 그것을 어떤 젊은 여자에게 건네준다.
그림을 받은 여자가 감동한 얼굴이 되었다.
“고마워. 자, 이건 약속대로.”
약속? 무슨 소리지?
여자가 건넨 물건은 나우시카에 등장하는 여우다람쥐 테토, 모형의 개러지 킷이었다.
개러지 킷은 실리콘에 레진을 부어 만드는 일종의 피규어와 비슷한 레진 캐릭터인형이다.
당시 일본 동호회 중심으로 많이 만들어졌다는 얘기는 들었었다.
아무튼 테토 모형을 받아든 선희가 마음에 드는 지 가슴에 푹 껴안고 그곳에서 물러나며 내게 다가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 쪽으로 몰린다.
“네 이름이 뭔지 알려줄 수 있니?”
그림을 받은 여자가 묻자 선희가 작게 대답했다.
“······써니.”
“꺄악, 발음이 너무 귀여워.”
“진짜 이름이 사니야?”
“써니.”
야야, 선희야 무리한 건 바라지 마라. 쟤들 무리하다가 혀 돌아갈라.
아무튼 사람들이 선희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고 다시 우르르 몰려가 버린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친화력이라니.
선희의 또 다른 면을 본 것 같아 신기하다.
그나저나······.
“이 하얀 고양이 녀석, 어디로 갔어?”
“친구 만나러.”
“친구? 일본에 친구가 있대?”
“그런가 봐.”
암튼 신기한 고양이다.
저녁이 다 될 때까지 도시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맨션에 들어왔더니, 집안에 좋은 냄새가 가득 차 있다.
선희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집안에 서둘러 들어가자 지로가 부엌에 있다.
“식사거리를 사왔습니다. 아무래도 밖에서만 드셨을 테니까 저녁은 직접 해드리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그 순간 선희의 눈이 반짝거린다.
“야, 침 떨어지겠다.”
쓰읍. 하고 입 주위를 닦는 선희.
내가 킥킥거리며 웃었다.
“농담인데.”
“······.”
그렇게 일본에서의 둘째 날이 저물어 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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