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루랄라 일본을~ (1)
지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삼사라의 두 번째 원고를 살피고 난 팀장이 머리를 번쩍 들었다.
“사니(サニー)?”
“네. 표기는 영문으로 하고요.”
“그러니까, 따로 이름을 하는 게 아니라 팀명이라는 거군.”
“네.”
“뭐, 팀명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니까. 거기다 가족이면 뭐.”
머리를 끄덕인 팀장이 다시 원고를 다시 살펴나간다.
“그런데 이번 2화······, 뭔가 전편인 1화 원고와는 조금 달라진 것 같군.”
“팀장님도 눈치 채셨군요.”
“그래. 퀄리티를 살짝 떨어뜨렸네. 그런데······, 전체적인 느낌으로는 이게 더 좋은 것 같은데.”
“네. 저 역시도 첫 원고가 대단하다고는 여겼지만, 너무 퀄리티에 치중한 건 아닌가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 문제를 두 번째 원고에서 고쳤더군요. 사실, 동몽 같은 만화야 만화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관심이 많은 이들에게는 대단한 작품이지만, 일반인에게는 좀 부담스러운 것도 사실이잖아요.”
“그래, 거기다 이쪽이 더 효율적이고.”
“네.”
팀장이 흥미롭다는 듯 턱을 긁적인다. 그리고는 지로를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이것도 혹시 오빠 쪽인가?”
“네. 그림 그릴 때 수시로 만화에 대한 것을 가르치고 있더군요.”
“만화를 가르쳐? 그림엔 재능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네. 하지만, 연출이나 묘사, 그림에 대한 지식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따로 공부를 한 건가?”
“아마 그럴 겁니다.”
“놀라운 팀이군.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참 아쉬워.”
팀장의 말에 지로가 갸우뚱한다.
“네? 왜요?”
“주류 장르가 아니니까.”
그제야 지로도 이해했는지 머리를 끄덕였다.
“네. 저도 그 생각을 했습니다. 소년점프에 연재되는 열혈스포츠, 캡틴 츠바사나 배틀물인 북두의 권, 근육맨 같은 작품이었다면 잡지 판매부수를 이끌 작품이 되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래.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입장일 뿐, 어차피 작가마다 특화된 분야가 있으니.”
팀장이 입맛을 다시며 말하다 곧 지로를 재촉한다.
“자자, 빨리 식자작업이랑, 연재멘트도 생각해야하니까 서둘러 줘.”
“네. 알겠습니다.”
***
낡은 철문이 열리며 젊은 남자가 실내로 들어온다.
실내는 빛이 들지 않는지 어둡고, 담배 냄새로 찌들어있다.
서둘러 커튼을 걷어내자, 실내로 빛이 쏟아져 들어온다.
덕분에 제대로 치우지 않은 컵라면용기와 각종 만화잡지, 성인잡지. 가샤폰(캡슐토이)들이 널려있는 지저분한 내부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한쪽 구석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매트 위에 네 명의 남자들이 서로 얽혀 잠들어 있는 게 보인다.
그것을 본 토시오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으이그, 청소라도 좀 제대로 할 일이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널려있는 테이블 위를 치워나간다.
이곳은 대학교내에 있는 서클룸 중 가장 구석자리에 있는 만화연구실이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오타쿠라 부르고 있다. 하지만 밖에서는 오타쿠라는 말이 생소해 그냥 ‘기분 나쁜 녀석들’ 정도로 인식되고 있게 현실이다.
매일같이 만화와 애니에 대한 것에만 미쳐 지내는 이들을 보통의 학생들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어제 밤에도 이곳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들은 애니비디오를 보면서 밤새 떠들어 댔을 것이 분명하다.
대충 테이블이랑 바닥을 정리하고 나서 토시오는 의자에 앉아 비디오를 플레이한다.
작년에 구입해서 마르고 닳도록 보던 ‘달로스’다.
일본 최초의 OVA 작품인 이 달로스는 사실 ‘밍키모모(요술공주 밍키)’의 후속작으로 계획된 작품이었지만, 밍키모모가 인기를 끌면서 방영이 미뤄져 갈 곳을 잃었다가 결국 최초의 오리지널 비디오 애니메이션(OVA)이 되었다는 소문이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의외의 작품이 괜찮은 판매를 보인 덕분에 OVA작품이 활성화 되게 되었다는 것은 아이러니 하다.
아무튼 토시오는 간만에 달로스를 보면서 손으로는 가샤폰인 타마고라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때 TV소리 때문인지 하나, 둘 잠들어 있던 녀석들이 몸을 일으켰다.
“아, 목말라. 물 좀 줘.”
“하여튼, 귀찮게.”
물 주전자를 내밀자 일어난 사람들이 돌아가며 벌컥벌컥 들이킨다.
“아휴, 살 것 같네. 근데 너 오늘 어째 이렇게 일찍 온 거야? 오늘 수업 없어?”
“헛소리 마, 벌써 수업 마치고 온 거니까.”
“뭐?”
그리고는 손목시계를 확인하더니 화들짝 놀란다.
“아 씨. 망했다. 오늘 수업 빠지면 안 되는데.”
머리를 벅벅 긁으며 괴로워한다.
그런데 그때였다.
철문이 벌컥 열리더니 만화연구회 홍일점인 노조미가 허겁지겁 들어온다.
“어, 왜 그렇게 허둥대?”
토시오가 묻자 노조미가 대답도 하지 않고 서둘러 품에 안고 있던 비닐봉투에서 만화잡지 하나를 꺼내 내민다.
“이거!”
“그게 뭐야?”
“주간소년 히어로.”
노조미의 말에 토시오가 이맛살을 찌푸린다.
“엥? 뭐 하러 그걸 사. 요즘 용돈도 부족하다며. 오늘 영매거진 나오는 날인데, 그거나 사오지.”
“시끄럽고 이거나 좀 봐.”
노조미가 서둘러 잡지를 뒤적거리며 넘기기 시작한다.
그걸 보는 토시오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오늘은 또 뭘 봤길래 저러나 하고 생각했다.
평소 노조미는 별일이 아닌 걸로도 호들갑을 떠는 경우가 종종 있었으니까.
잠시 후 노조미가 원하는 페이지를 찾았는지 책을 펼친 채로 토시오 눈앞에 불쑥 내밀었다.
“자, 봐. 이 만화야. 편의점에서 읽다가 깜짝 놀랐다니까. 소년 히어로에 이런 작품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
토시오는 여전히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녀가 내민 책을 받아 자세히 살펴본다.
표지 그림에 등장하는 압도적인 배경그림에 눈이 간다.
“신인이야?”
“처음 보는 이름이긴 하던데, 신인 아닐까? 딱히 비슷한 그림을 찾기는 어렵던데. 이것저것 섞인 느낌이기도 해서.”
“오, 배경그림이 제법이네.”
확실히 대단한 배경그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충격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제목은 삼사라.
작가 이름은······ 영어로 SUNNY로 적혀있다.
“사니? 여자 작가인가?”
“아무래도 그림만으로 보면 남자가 아닐까?”
“타카하시 루미코도 여자지만 남자느낌의 명랑만화를 그리잖아.”
“그런가?”
“요즘엔 그림만으로 쉽게 판단하면 안 돼.”
그렇게 말한 토시오가 천천히 페이지를 넘겨가며 읽기 시작했다.
배경이 조금 낯설기는 하다. 이 부분은 작가적인 특성일수도 있으니까 특별한 건 아니다. 그리고 캐릭터는 노조미의 말대로 딱히 누군가를 떠올리기 어려운 형태다.
하지만 남자의 강한 느낌과 여자의 섬세함이 골고루 느껴지는 독특한 분위기다.
만화연구회의 일원답게 그림을 하나하나 정밀하게 살펴가며 읽어나간다. 그러면서 나름 평을 해간다.
“첫 연재분이라고 힘 좀 줬나보네. 이정도 퀄리티로 그리려면 시간이 제법 걸렸을 텐데. 뭐 연출도 나쁘지 않고. 하지만, 이런 수준으로 연재를 하는 건 어렵지.”
그때 노조미가 테이블을 팡팡 두드리며 재촉했다.
“야, 품평은 그만하고, 쭉 읽어보기나 해.”
“그림 때문에 보라는 거 아니었냐?”
“헛소리 말고. 얼른.”
노조미의 재촉에 토시오가 혀를 차며 이번엔 가벼운 마음을 종이를 한 장씩 넘겨간다.
그리고 금방 20페이지가 끝이 났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이 눈길을 끈다.
“어? 마지막에 등장한 좀비들은 뭐야?”
“어때? 이거 꽤 흥미롭지?”
“······이런 식의 느닷없는 전개라니.”
“그래도 뭔가 다음 편을 기대하게 만들잖아.”
“그건 그러네.”
묘하게 가슴 두근거리게 만드는 마무리였다.
평화로운 작은 도시에 갑자기 등장한 좀비로 인해 어떤 지옥이 펼쳐질지 내심 궁금해진다.
곧 토시오가 노조미를 돌아보며 놀랍다는 듯 말한다.
“이런 만화를 발견하다니 ‘당신 아름다운 눈을 가졌군요.’(기동전사 건담의 라라아 슨의 대사)”
토시오의 말에 노조미가 웃었다.
“난 아무로가 아니야.”
“좋아, 다음 만화회의는 이 작품 ‘삼사라’로 해보자.”
“나는 찬성.”
그때 둘의 대화를 듣던 남자들이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만화가 어떻기에 그래?”
“나도 좀 보자.”
하나둘 일어난 남자들이 토시오 곁으로 다가온다.
그러자 노조미가 코를 감싸 쥐며 뒤로 물러난다.
“으엑, 술 냄새. 이리 내.”
그렇게 말하며 책을 빼앗아 나가버린다.
“야, 그거 주고 가!”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이게 무슨 짓이야!”
남자들이 닫힌 문을 향해 꽥꽥 소리를 질렀다.
***
화실로 들어온 지로가 주간소년 히어로를 내게 내밀었다.
“이번에 삼사라가 실린 최신호입니다.”
그가 내민 책을 받아들자 묘하게 감정이 격해지는 기분이다.
평소 이런 것에 관심이 없을 줄 알았던 선희도 어느새 내 곁으로 다가와 책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자. 먼저 봐라.”
내가 선희에게 책을 내밀자 동그란 눈을 뜬 채로 날 바라본다.
“······나 먼저 봐도 돼?”
“그럼.”
선희가 책을 조심스럽게 펼친다.
어시들도 궁금했는지 선희 곁으로 다가와 같이 책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정작 선희가 펼친 건 가장 마지막 페이지다.
이상하다는 생각에 가까이서 보니, 잡지마지막에 있는 작가 코멘트를 읽기 위함이다.
그리고 써니라 적혀있는 부분에 오캐(오너 캐릭터)로 만들어진 고양이가 있다. 이건 선희가 백설기를 생각해 만든 게 아닌가 싶다.
아무튼 그곳에 적힌 글자를 읽는다.
“어머, 작은 선생님. 일본어도 읽을 줄 알아요?”
정미자의 질문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네.”
“와아, 대단하다. 작은 선생님 진짜 천잰가 봐.”
뭐, 일본어 정도야 며칠 동안 단어장이랑 회화 집을 통째로 외워버린 모양이다.
물론 그걸 생각하면 정미자의 말대로 천재가 맞긴 하지. 하지만 회화실력은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나도 모른다.
카세트도 사서 직접 듣기도 몇 번 하던 모양이지만, 확실히 눈으로 보는 것보다는 익히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다. 뭐, 책에도 발음은 다 나오니까 상관없지 않을까.
“뭐라고 적혀있는데요?”
“알려주세요. 작은 선생님.”
어시들의 재촉에 선희가 조용한 음성으로 말했다.
“좀비에게 쫓기는 꿈을 꾸고 있어요.”
“네?”
“······?”
선희가 손가락으로 직접 가리키며 다시 말한다.
“여기에 적혀 있는 거요.”
“아.”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정미자나 어시들은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하기야 황당하겠지.
일반적인 만화가들이라면, 나름 이런저런 얘기들을 쓰는데, 밑도 끝도 없이 좀비에게 쫓기는 꿈을 꾼다고 써 놨으니.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성준희는 그저 웃을 뿐이다.
평소 선희를 자주 봐온 탓에 녀석 답다고 생각한 거겠지.
사실, 첫 번째 원고를 가져갈 때 지로가 코멘트를 부탁하긴 했는데, 선희에게 하고 싶은 글을 써보라고 했더니 정말로 저렇게 썼다.
황당하긴 했는데, 지로는 나름 재밌다 며 그대로 가져가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잡지에 실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곧 다시 페이지를 넘겨 삼사라가 실려 있는 페이지를 찾아 펼친다.
한 장씩 페이지를 넘겨 가는데, 어시들의 표정이 사뭇 감격스럽다는 모습이다.
자신들의 작품이 만화왕국이자 지금의 한국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넘사벽의 일본만화잡지에 실려서 그렇게 느껴질 것이다.
이시대의 일본은 내가 살던 시대의 일본과 전혀 다른 느낌이니까 지금의 내가 이해하긴 어려운 감정일 것이다.
아무튼 잡지에 실려 있는 그림을 보니 나도 기분이 묘해진다.
동네 대본소에 내가 쓴 스토리의 만화가 있을 때랑은 차원이 다르니까.
잠시 그렇게 감상에 젖어 있을 때 지로가 내게 다가왔다.
“아참, 그리고 서류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서류요?”
“네. 방문에 관한 모든 서류는 제가 입국관리국을 들락거리며 다 준비해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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