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63화 (63/425)

써니 (1)

화실의 문이 열리며 얼굴이 둥글둥글하며 거무튀튀한 피부의 중년 사내가 들어온다. 그는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싱글거리며 한쪽 자리에 앉아 있는 사내 쪽으로 다가가며 반갑다는 듯 소리친다.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전 선생님.”

중년 사내가 소리치자 작업 중이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그를 확인하고는 놀라는 듯 하더니 곧 어색하게 웃는다.

“아유, 박 사장님이 여기엔 어쩐 일로 직접.”

“어쩐 일은요? 요즘 전 선생님 작업 때문에 바쁘신데 직접 찾아오는 게 예의지요.”

그렇게 말하며 박 사장이 넉살좋게 웃었다.

“그렇습니까. 아 참, 커피?”

“아, 네. 주시면 감사히 마셔야죠.”

“김양아, 여기 커피 좀 줘.”

“네.”

전상길의 화실을 찾은 사람은 대본소용 만화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우주출판사 사장 박광태였다.

우주출판사는 과거 전상길이 만화가로 데뷔하던 시절 두 작품을 출간한 곳이었다. 물론 두 작품이라고 해봐야 한권짜리 두 번이라, 결국 두 권이 전부이긴 하지만.

“요즘 선생님의 작품 ‘경영의 왕’이랑 ‘평발 스트라이커’ 잘 읽고 있습니다.”

“아, 네.”

“요즘 두 작품 기세가 장난이 아니던데. 이대로 가면 재벌21세, 지옥의 외인구단보다 더 인기가 있겠던데요?”

“아이고 참, 그럴 리가요. 지옥의 외인구단 같은 작품이 그렇게 쉽게 나오나.”

“아하하, 왜요. 특히나 지금 ‘평발 스트라이커’ 인기가 중고생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폭발적이라고 하던데. 제 아들 녀석도 맨날 평발 스트라이커 새로 나오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더라고요.”

“그렇습니까?”

전상길이 멋쩍게 웃었다.

“아, 그런 그렇고······.”

드디어 박광태가 찾아온 진짜 본론을 꺼낼 모양이었다.

“혹시 다른······ 신작 준비하시는 거 없으십니까?”

“신작요?”

박광태의 입 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네. 다른 스포츠만화라거나 경영만화 같은 거······.”

결국 그거였군.

전상길이 대충은 예상했다는 듯 실소를 머금었다.

데뷔시절, 모시던 선생의 밑에서 데생을 한참 배우고 있던 자신을 그렇게 꼬드겨 독립하게 만들었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박광태였다.

그런 그가 단 두 작품 만에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다며 자신을 걷어차지 않았던가.

그때의 박광태 주둥이에서 나온 말은 아직 잊지 않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건 아니지. 다른 인기 만화들 확인해 보면 그쪽 문제점이 뭔지 답이 나오잖아.]

[이야기가 밋밋해. 이래서야 사람들이 돈 내고 볼 마음이 생기겠냐고.]

[그림이 문제라니까, 그림이. 눈에 팍팍 들어와야 되는데 말이지.]

[아, 역시 재능이 문제네. 아쉽지만 어쩌겠어.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봐.]

칼로 심장을 사정없이 난도질당하는 기분이었다.

그 일이 있은 뒤, 화실에선 배신자로 찍혀 다시 돌아가지도 못했다.

나름 멋지게 살아보겠다며 독립한 뒤 1년 반 동안 그렇게 지옥을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 만화에 매달렸다. 그리고 그럭저럭 자리를 잡았고, 얼마 전부터 박상식과 이윤환 덕분에 이젠 제법 이름도 알려진 만화가가 되었다.

그랬더니, 다시 저 인간이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처음 그가 화실에 들어올 때의 껄끄럽던 느낌의 정체도 이젠 확실히 알았고.

아무튼 과거는 잊었는지 넉살좋게 잘도 저런 소리를 쳐 내뱉고 있다.

하지만, 그런 마음과 달리 전상길은 그저 그의 모습을 평온한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다.

“어떻게, 준비 중이신 신작이 있으시면, 저희랑······.”

“흐음, 신작이라······.”

있을 리 없다.

이미 두 작품만으로도 지금 화실은 충분히 바쁠 정도다.

물론, 이 두 작품이 언제까지 연재가 진행될지는 알 수 없고, 차기작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인간에게 차기작을 넘기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신작 있으십니까?”

묘하게 짜증나는 눈빛으로 묻는 박광태의 얼굴.

“저도 신작 준비는 하고 있는데······.”

그 말에 박광태의 얼굴이 확 밝아진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그렇기는 한데, 우주출판사에 넘길 생각은 없어서요.”

“······네?”

“뭐, 그렇잖아요. 차기작 달라고 찾아오는 큰 출판사가 그렇게 많은데 굳이 넘겨야할 필요가 있을지. 총판에서도 요즘 우주는 별로 좋은 취급 못 받는 것 같던데.”

그 말에 박광태가 적잖이 당황한다.

“······그 문제는 곧 해결을······.”

“해결하시면 그때 다시 따로 이야기하면 되겠군요.”

“전 선생님. 그래도 저희가 인연이 있는데.”

“저한텐 그리 좋은 기억이 아니군요.”

“······.”

박광태의 얼굴이 점점 썩어 들어갔다.

설마 자신을 이렇게 홀대할거라고는 미처 예상을 못한 탓에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전상길.

이 사람은 더 이상 예전에 자신에게 빌빌거리며 매달리던 그런 어쭙잖은 만화가가 아니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가볍게 생각하고 찾아온 자신의 실수였다.

“자, 그럼. 전 바빠서요. 배웅은 안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전상길이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그러자 박광태는 머리를 숙인 채 눈을 부릅뜨고 부르르 떨었다.

굴욕, 패배감.

아무튼 온갖 짜증나는 감정이 자신을 쥐고 흔든다.

곧 그는 분노를 억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바깥으로 나간다.

문 앞에 다가선 박광태가 고개를 홱 돌려 전상길 쪽으로 바라봤다.

전상길은 다시 작업에 몰두하는지 책상 위 원고에 열중해 있다.

으드득.

박광태가 이를 갈며 전상길을 노려본다. 그리고는 중얼거리듯 말한다.

“날 개망신 주고도 멀쩡하게 될 줄 알아? 도와주는 건 힘들어도 똥물을 뒤집어씌우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지.”

그리고는 문을 거칠게 열더니 쾅 닫고 나가버린다.

그런데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있던 화실 막내의 눈이 커져있었다. 박광태가 나가며 중얼거린 말을 들은 것이다.

순간 전상길에게 가서 얘기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화실의 분위기가 착 가라앉아 있어서 감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니 화실 사람들 모두가 전상길을 힐끔거리고 있다.

역시 이런 분위기에서 꺼낼 얘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머리를 처박고 지우개질을 시작했다.

뭐, 그냥 화가 나서 지껄인 얘기일 수도 있으니까.

어쨌거나 오늘 같은 날 정말 몸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A팀 작업실 문이 열렸다.

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문 쪽으로 쏠렸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타난 사람은, 스토리작가인 박상식이었다.

“안녕하세요.”

그가 인사를 하며 들어서자 모두의 시선이 다시 전상길 쪽으로 향했다.

그런데 방금까지만 해도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던 전상길의 표정은 어느새 밝게 변해 있었다.

“어, 그래. 어서와! 그런데 윤환이는?”

“아, 네. 요즘 개인적인 사정으로 조금 바빠서.”

“인기 스토리작가니까 그렇겠지. 아무튼 어서 앉아.”

“네.”

“김양아, 커피 좀 줄래?”

“네. 선생님.”

갑자기 밝게 행동하는 전상길의 모습을 보며 화실 사람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새로운 직장의 주간소년 히어로 편집부.

지로가 사무실로 들어오며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어, 그래. 원고는 완성했어?”

“네. 완성했습니다.”

“그래, 한번 보자고.”

직속상관인 팀장에게 지로가 원고가 든 서류봉투를 내밀었다.

그때 담당 만화가와 회의를 끝낸 야지마가 다가온다.

“아, 그거 완성된 원고구나. 팀장님, 그거 저도 같이 봐요.”

“그래, 빨리 와.”

팀장이 그렇게 말하며 서류봉투에서 원고를 꺼낸다.

서둘러 다가온 야지마가 팀장 곁에서 그것을 지켜보다 순간 깜짝 놀란다.

“어? 뭐야? 저번 데생이랑 다른 그림 같은데?”

“그게, 이미 새로운 데생으로 완성을 시켰더라고요.”

“그럼 처음부터 전부 새로 그렸다고?”

“네.”

“하.”

야지마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신입답지 않은 노련한 느낌의 데생이었는데, 그것을 과감하게 갈아엎고 새롭게 그려 완성을 해버렸다니. 이미 완성된 데생이라 해도 디테일이 높아 신인으로서 완성시키기에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는 않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것을 보란 듯이 이렇게 새롭게 완성시켜버렸으니.

그보다 신인인 주제에 겁도 없나?

이미 회의에 통과된 데생을 무시하고 새롭게 그리다니.

뭐, 일본과 한국은 편집자와 만화가의 관계가 다른 모양이긴 할 테지만.

그건 그렇다 치고, 첫 장부터 느껴지는 그림의 장면들이 상당하다.

아까부터 말없이 원고를 쳐다보던 팀장이 입을 열었다.

“새롭게 그렸는데 이쪽이 월등하네. 그 사이 믿기 힘들 정도로 성장했어. 아무리 초짜가 성장을 빨리 한다지만, 이건 해도 너무하는군.”

“그러게요.”

야지마도 팀장의 말에 머리를 끄덕이며 동조한다.

그러면서 두 사람이 다시 원고를 내려다본다.

아파트와 주택이 뒤섞여 있는 도시.

한국인이 그린 만화라 그런지 배경이 일본사람이 보기에 생소한 것도 제법 보인다. 하지만 반대로 그 이국적인 느낌이 주는 매력 또한 상당하다.

아니, 그것을 떠나 배경의 느낌이 좋다.

디테일도 좋지만, 산뜻하게 마무리된 배경이 주는 시원함이 마음에 들었다.

인물도 마찬가지다.

캐릭터가 전에 비해 상당히 안정적으로 변해있다.

그것을 보완해주는 펜선도 느낌이 좋다.

그런데 저번작품에 비해 좀 더 발전한 느낌이 든다. 겨우 며칠이 흘렀을 뿐인데 이렇게 눈에 띄게 발전하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본인이 그린 거 맞지?”

팀장이 물었다.

“네. 맞습니다.”

“혹시 노련한 스텝이 새롭게 포함된 건가?”

“아 맞다, 안 그래도 이번에 가니까 화실을 새롭게 구했더라구요. 그리고 더불어 어시 몇 명도 뽑았고요.”

“그럼 그 새로운 스텝 중에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낸 주인공이 포함되었다는 건가?”

“스텝들도 젊은 여자들인데 상당히 노련해서 내심 좀 놀랐습니다.”

“만화가도 그렇지만, 그 사이 실력 있는 어시를 끌어 모았다니, 인맥도 상당한 모양이군.”

“그런 것 같습니다.”

사실, 출판사 입장에서도 만화가를 도와줄 스텝을 갑자기 구성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갑자기 신인작가가 데뷔를 할 경우, 그 스텝을 보통은 출판사 쪽에서 책임지고 모으지만, 실력 있는 사람은 대부분 바쁘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은 곳에 연락을 해야 두세 명 정도를 겨우 모을 정도다.

그런데 일주일 만에 완성해 달라는 요구도 버거웠을 텐데, 그 사이 작업실을 만들고 어시까지 모두 구했으니 대단한 건 사실이다. 특히나 일본처럼 체계적이지도 않은 한국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아마, 그 오빠 쪽의 영향이 가장 컸을 겁니다. 대화를 해보면 만화 쪽에 대한 지식이 상당해요. 들어보니까, 일본에도 지인이 제법 있는 모양이던데. 아마도 한국 만화계 쪽에선 제법 발이 넓은 모양입니다.”

“그래······? 흐음.”

팀장이 턱을 긁으며 생각에 잠긴다.

“그런 사람이 왜 굳이 직접 출판사로 접근하지 않았던 거지?”

“저도 그 부분을 좀 생각해봤는데요, 아마 동생분이 아직 어려서 좀 더 공부를 시킨 후에 일본으로 오려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런 부분에 대해 걱정이 많더군요.”

팀장이 납득하며 끄덕인다.

“하긴, 이제 고등학교 1학년에 진학할 나이면 그런 걱정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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