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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전생 만화왕-62화 (62/425)
  • 여고생 선생님 (6)

    슥슥

    슥슥슥 스사삭

    선희의 펜이 종이 위를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동안 작업 스킬이 더 늘었는지 책상 위, 약간의 경사를 두고 놓인 나무판 위에서 만화원고가 왼쪽 오른쪽으로 빠르게 회전하고 있다.

    종이의 회전과 펜이 일정하게 움직이며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소름 돋을 만큼 정확하게 그림을 그려 나가는 것도 특징이다.

    언젠가 TV인지, 유튜브에서 본건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기계 팔이 도면을 그리는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신기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계처럼 차가운 성질의 그림도 아니다.

    상황에 맞게 강약까지 줘가며 펜선 그림 특유의 느낌을 잘 살리고 있다.

    그 동안, 그림을 더 빠르고 정확하게 그리는 법까지 스스로 익힌 것일까.

    수없이 많은 만화가들의 작업 모습을 동영상으로 봐왔지만, 이런 움직임은 정말 처음이다.

    내가 살던 시절이었다면 이 영상만으로도 유튜브에서 제법 인기를 끌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 아이, 도대체 어디까지 발전하려는 거지?

    선희는 그냥 그림을 그리기 위해 태어났다고밖에 생각할 수 가 없는 아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대단한 아이가, 미래에서 아무런 빛을 못 봤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바라보다 슬쩍 곁으로 시선을 돌렸다.

    선희의 작업 모습을 지켜보던 세 명의 어시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표정들이 ‘지금 우리가 뭘 보고 있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 같다.

    하기야,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나도 이렇게 놀라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특히나 그림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면 더욱 더.

    그렇게 대략 2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한 페이지의 원고 속 배경이 모두 완성되었다. 배경의 밀도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한 페이지의 배경만 처리하는데 짧게는 10분에서 길게는 1시간정도 작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야말로 만화계의 사기캐다.

    이런 사람은 미래에서도 본 일이 없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서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니 불가능하다고는 할 수 없는 일이고.

    그러고 보니 웃기네.

    애초에 이곳으로 내가 왔다는 사실자체만으로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인데 말이다.

    하지만 성준희는 그런 선희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는 않는다. 전에 이런 선희의 모습을 몇 번 봤으니 당연한 일이겠지. 하지만 애초에 만화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다보니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잘 모르기도 할 거고.

    어느새 시작했던 두 번째 페이지도 완성이 되어간다.

    세 사람의 어시들은 아직 눈뜬 심봉사처럼 눈을 크게 뜬 채로 멍한 모습으로 있을 뿐이다. 아직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저런 것을 실제로 보고 있으니 황당하겠지.

    아마 그 어떤 곳에서도 저런 능력을 본 일은 없을 것이다.

    사실, 주간만화 연재분 정도는 선희 혼자만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능력이 된다고 해서 혼자 언제까지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화라는 것은 상당한 집중력과 체력을 요하는 일이니까. 그리고 만화가라는 직업에 뛰어든 이상,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완결이 될 때까진 제대로 쉴 수도 없다.

    거기다 이런 식의 일이 계속 이어지다보면 아직은 어린 선희의 몸에 무리를 너무 많이 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것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부터 입시지옥에 빠진 헬조선의 아이들은 뭐.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바로 선택적 집중이다. 그래서 차라리 데생에 집중하는 게 훨씬 좋다. 만화가의 가장 중요한 능력은 뭐니 뭐니 해도 데생능력이니까.

    펜선, 배경은 어찌 보면 단순 일에 가까운 일이니 다른 사람이 해도 되는 일이다.

    그리고 실제 선희도 상상을 제대로 펼칠 수 있는 데생을 더 좋아하는 눈치고.

    그렇게 두어 시간 동안 6페이지 분량의 배경을 모두 해치워버렸다.

    미완성의 13페이지 중 거의 절반가량을 선희 혼자서 단숨에 해결한 것이다.

    “이제 그만 해. 충분하니까.”

    내가 다음페이지 작업까지 하려는 선희를 말렸다.

    “괜찮아. 나 할 수 있어.”

    “할 수 있어도, 컨디션 조절을 해. 넌 너무 과하게 집중해서 탈이야. 자제하는 것도 좀 배워라.”

    내 모습을 잠시 올려다보던 선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두 시간동안 선희의 작업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세 사람의 어시들은 완성된 그림을 확인하고 있었다.

    나도 원고 한 장을 들어 확인해 본다.

    잘 보이지 않는 것까지 미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동안 동몽과 아키라를 보면서, 디테일이라는 것에 대해 너무 심취해 있었던 모양이다.

    이정도 디테일이라면 그런 만화들 부럽지 않다.

    그러니까 너무 과한 디테일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그려나가면 본인뿐만 아니라, 배경을 그리는 두 사람에게 가중되는 부담도 엄청나게 커진다. 프로작가가 된다는 건 결국 시간과의 싸움이다.

    효율을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조금 단순하게 그려봐. 무조건 세밀하다고 좋은 게 아니야. 느낌을 살리는 게 더 중요하지. 아······.”

    나는 순간 멈칫했다.

    지금 나는 충분히 놀라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덕후답게 헛소리를 나불거린 탓이다.

    열심히 그린 선희에게 괜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녀석의 눈치를 살폈더니, 별다른 불만 섞인 표정이 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인다.

    이젠 나도 선희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감지할 정도라 기분을 조금은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니까, 지금은 공부라는 차원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거다.

    “알았어. 더 가르쳐 줘.”

    “그래. 알았다.”

    사실, 세밀한 그림에 대한 열망은 이해하고 있다.

    신인 때는 자신의 전부를 갈아 넣어서라도 엄청난 그림을 그리고 싶어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건 바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는 길고긴 만화가의 생활을 버텨낼 수 없다.

    아직 이 시절에는 등장조차 하지 않은 만화 ‘베르세르크’의 미우라 켄타로도 그림에 목숨을 건 부류다.

    독자들은 퀄리티를 낮춰서라도 제때 연재되는 만화를 보고 싶을 뿐이지만, 그와 달리 만화가는 정도의 끝이 없는 그림의 마성에 빠져버렸다.

    그림 하나하나가 놀라운 퀄리티라 대단하긴 하지만, 자신의 건강까지 헤쳐 가며 그린다면 의미가 있을까.

    하지만, 이미 아키라까지 세상에 나온 마당이니, 앞으로 일본만화계에서 퀄리티 전쟁은 어쩔 수 없는 만화가들의 운명이 되어버렸다.

    그림은 갈수록 진화해 갈 테지만, 만화가의 사정은 90년대를 정점으로 꺾이게 될 거다.

    아무튼 선희가 퀄리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든 생각이다.

    어쨌건 지금의 퀄리티는 너무 과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그 모습을 근처에서 지켜보던 세 명의 어시들이 황당하다는 듯 우리를 바라본다.

    어쩌면 ‘이 미친 남매는 뭐지?’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나머지는 내일 그릴까?”

    선희의 말에 곁에 있던 세 명의 어시들이 화들짝 놀라며 말린다.

    “작은 선생님은 이제 쉬셔도 돼요. 이제부턴 저희가 마무리 할게요.”

    “네. 저희도 할 일이 있어야죠.”

    그렇게들 말하며 미완성된 원고 작업을 시작한다.

    완성된 원고는 곧바로 성준희가 들고 가서는 먹칠과 화이트 칠을 시작한다.

    나는 스크린톤 박스를 들고 작업 중인 성준희 곁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얘, 왜 이렇게 긴장하지?

    아무래도 과거에 본체 녀석이 너무 괴롭혔던 탓인가?

    아무튼 성준희 곁으로 가서는 스크린톤 박스를 열어 자주 사용되는 점박이 스크린톤을 꺼냈다.

    “이건 스크린톤이라는 건데, 내가 이거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줄게.”

    고등학교시절 만화 그리는 것에 한참 미쳐있던 시절에 톤의 사용법을 익힌 경험이 있다. 뭐 덕후인 덕분에 스크린톤도 사용법에 관해서는 실전보다는 이론이 강한 편이라는 게 문제기는 하지만.

    “이거 일제라며, 비싼 거 아니니?”

    “일제도 맞고, 비싼 것도 맞는데, 앞으로 네가 해야 할 일이니까 겁먹지 마.”

    “내, 내가?”

    “그래. 이것도 뒤처리 할 사람의 일이야. 간단한 작업 정도는 괜찮으니까.”

    내 말에 미간에 힘을 주며 대답한다.

    “응, 최선을 다할게.”

    “뭐, 그렇게까지 기합을 넣을 필요는 없는데.”

    *

    “······아, 이게.”

    완성된 원고를 들여다보는 지로의 동공에 지진이 생기고 있다.

    하기야, 완성이 쉽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철석같이 믿고 있다가 이렇게 멀끔하게 완성된 걸 봤으니 충격을 좀 받았겠지. 물론 좋은 쪽으로.

    “어때요?”

    내가 묻자 그가 머리를 들어 날 본다. 그리고는 다시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선희 쪽을 보더니 다른 어시들을 돌아본다.

    “모두······, 고생하셨습니다. 저도 도왔어야 했는데.”

    그 말에 작업 중이던 어시 세 명이 움찔하고 놀랐다.

    “아니에요. 작은 선생님 덕분에 빨리 마무리 할 수 있었는데.”

    “맞아요. 그래서 여유 있게 작업했어요.”

    배경담당인 구자희와 박소미가 호들갑을 떨었다.

    새로운 책상에 자리를 잡고 있던 성준희는 그저 평소처럼 열심히 지우개질을 하며 묘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아무튼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아침에 출발 하신다고 하셨죠?”

    내 질문에 지로가 머리를 끄덕였다.

    “아, 네. 그렇습니다.”

    “원고 잘 챙겨 가세요.”

    “네. 그럼요. 제 목숨처럼 소중하게 다루겠습니다.”

    지로가 감격한 얼굴로 우리를 돌아본다.

    그동안 일본에서도 마음고생 많았으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는 모양이지.

    그런데 그때 갑자기 정미자가 시계를 보더니 내가 서둘러 말한다.

    “아참, 지금 사라예보 동계올림픽 개막식이 한다던데. 그거 봐도 되죠?”

    “동계 올림픽요?”

    “네.”

    그런데 다른 사람들 눈도 반짝거린다.

    박상식도 시계를 보더니 궁금한지 나를 쳐다본다.

    지금은 원고도 끝났으니 여유가 있다.

    “그럼 봐야죠. 동계올림픽이면 저도 좋아하는데.”

    그렇게 말하며 화실 한쪽에 놓여있는 TV를 켰다.

    마침 개막식이 한참 열리고 있다.

    대충 상황을 보니 생방송은 아닌 모양이다.

    요즘의 분위기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이 열린다는 사실 때문인지, 올림픽에 관한 관심이 높아져 있다.

    방송 중에도 툭하면 올림픽에 대한 얘기가 나오고 있고, 광고를 봐도 ‘88올림픽 공식 후원 업체’라는 것을 강조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아마도 그 때문인지, 이번 동계올림픽에 대한 관심도 큰 모양이다.

    그나저나 유고슬라비아가 어디쯤에 있는 나라지?

    TV에선 동구권 국가라고 하는데, 난 잘 모르겠다.

    “아아, 한국이다. 한국.”

    [······이어서 한국 선수단입니다. 아래 위 흰 운동복입니다. 스피드 스케이팅에 남자 셋, 여자 셋. 스키 알파인에 세 명. 바이애슬론에······.]

    화면에 비추는 선수단 숫자는 조촐하다.

    아나운서의 설명으로는 15명, 거기서 두 명 정도가 입상 가능성이 있단다.

    “어? 쇼트트랙은 안 나가는 건가?”

    “쇼트트랙이 뭐예요?”

    “······?”

    주변에서 날 이상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몰라? 동계 올림픽 메달밭, 한국이 가장 잘하는······.”

    아, 이 시절엔 정식종목이 아닌가?

    박상식이 뭔 소리를 하느냐는 듯 황당한 표정으로 말한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동계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역사가 없는데.”

    “······그래?”

    난 계속 눈알을 굴리다 어색하게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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