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61화 (61/425)

여고생 선생님 (5)

화실로 들어서니, 경희와 손님이 와 있다.

“오빠 왔네.”

“그래. 어?”

손님이 누군가 했더니 갈색머리, 아니 이젠 긴 검은색 생머리로 변한 성준희였다.

그런데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서 뭔가를 열심히 하고 있다.

대충 살펴보니, 원고 뒤처리 작업 중인 모양이었다.

지우개질과 먹칠, 그리고 화이트 칠 같은 단순한 작업 말이다.

“놀러 온 김에 그냥, 도와주는 거야.”

성준희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한다.

작업 중이던 여자들은 나와 성준희를 번갈아보며 눈치를 보고 있다. 그러다 내 눈이 그녀들 쪽으로 향하면 헛기침을 하며 곧바로 작업에 몰두한다.

아무래도 성준희와 내 사이를 궁금해 하는 모양이었다.

“점심은 먹었냐?”

“아, 응. 아까 어머님이 오셔서 식사 준비해 주셔서 같이 먹었어.”

“그래?”

그렇게 대답한 내가 원고를 들어 확인한다.

보나마나 성준희는 뭐라도 돕겠다고 나선 게 틀림없다. 작업 중이던 어시들도 그런 성준희가 할 수 있는 뒤처리 정도를 맡긴 모양이고.

그래도 일본에 건너갈 원고인데 괜찮나 싶어서 꼼꼼하게 살펴보니 먹칠이나 화이트는 잘 칠해져 있다.

작업하는 모습을 본 게 아니라 어느 정도 능숙하게 한 건지는 모르지만, 일단 깔끔하게 잘 처리되어 있다. 평소 꼼꼼해 보이기는 하던데, 이만하면 어느 화실에 가더라도 막내 생활을 할 만한 실력이다.

말 그대로 막내 정도의 수준일 뿐이지만.

그래도 만화작업에서 뒤처리할 사람은 항상 필요한 법이다. 급하다고 중요한 스텝만 뽑았지 정작 원고에서 자잘한 작업을 해줄 사람을 뽑지 못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준희에게 물었다.

“너, 만화 좋아하냐?”

갑작스런 질문에 얼떨떨해 하더니 곧 머리를 끄덕인다.

“으응, 좋아해.”

“무슨 만화?”

“······수, 순정만화.”

“좋아하는 만화는?”

갑작스런 질문 공세에 성준희가 당황하고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계속 질문을 던졌다.

“없어?”

“······있어. 으음.”

잠시 생각하더니 곧 입을 연다.

“북해의 별이랑, 굿바이 미스터 블랙.”

이 시절 여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은 전설적 만화들이다. 후대에도 엄청 회자될 정도로. 아무튼 이쯤 되면 만화를 좋아한다는 건 맞는 모양이다.

난 곧바로 다른 질문으로 넘어갔다.

“너, 요즘 어디서 일한다고 했었지?”

전에 경희에게 넌지시 들은 것 같아서 말해본 것이다.

“어? 아, 고모네 식당. 저녁에만 잠시.”

“얼마 받아?”

내 질문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왜?”

“너, 이참에 거기 그만두고 여기서 일해라.”

“뭐?”

성준희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본다.

하긴, 갑작스런 제의라 놀라기도 했을 거다.

하지만, 어차피 뒤처리를 해야 할 사람도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뒤처리도 은근히 사람 구하기 힘들다.

단순일이라고는 해도 나름 전문성도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물론 결정적인 거야, 그냥 친하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한마디로 낙하산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잘은 모르지만 처음 만났을 때 내게 돈까지 주려 했던 아가씨다. 그 이전의 과거에 대해선 정확히 모르지만, 아마도 본체 녀석에게 많이 뜯겼을 거라 예상하고 있다.

그래서 그냥 보상차원으로 하는 것도 있다.

내가 저지른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임은 피할 수 없다. 뭐 어쨌거나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물론 무작정 도와주는 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본인이 원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요청하지 않을 참이다.

“여기서 일하라고?”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얼떨떨한 모양이다.

“식당에서 일하는 일당이 얼마야?”

“6시간일하고······ 2,300원.”

“그럼, 시간당 400원이 좀 안되네?”

한 시간 일하고도 짜장면 한 그릇 먹기가 빠듯하네.

“응. 그래도 처음보다 오른 거야.”

“좋아. 시간당 600원 어때?”

내 말에 눈이 커진다.

“그렇게나 많이 준다고?”

“여기선 일단 시작할 땐 이게 기준이 될 거야. 하지만, 뭐. 시간이 지나면서 급여가 달라질 거야. 만약 추가 작업을 하게 되면 잔업수당도 붙을 거고. 저녁 6시 이후, 잔업은 1.5배니까 시간당 900원. 동생 돌봐야 되면 데리고 와도 돼. 옆에 작은 공간 있으니까, 준모 장난감 몇 개 사다놓으면 혼자 노는 거 보면서 일해도 되고.”

“······.”

“어때?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냥 가끔 놀러오는 정도라도······.”

“아니, 할게. 하고 싶어.”

“아, 그래. 근데 뭘 그렇게 주먹까지 불끈 쥐고 그러냐?”

“아······.”

성준희가 살짝 얼굴을 붉힌다.

“조금 힘들지도 몰라.”

“괜찮아.”

“그럼, 뭐 됐고.”

“오빠, 나도.”

경희도 나섰지만 코웃음을 치고는 단번에 컷 시켰다.

“넌 빠져.”

“히잉.”

어쨌건 얼떨결에 뒤처리담당 한명을 더 얻었다.

그럼 이로서 선희와 나를 뺀 스텝은 총 4명이다.

대략적인 팀 구성은 끝이 났다.

이쯤 되면 주간 연재에 대한 준비는 끝이 났다고 생각한다.

오후 늦게.

“안녕하세요. 이 선생님.”

그렇게 말하며 들어온 사람은 바로 아카기 지로, 담당편집자였다. 그는 몇 개의 종이가방과 화분을 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네. 제가 찾아뵙는 게 좀 늦었죠? 죄송합니다. 그사이 일본에 좀 다녀오느라고.”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자그마한 화분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창가 쪽으로 가져가 놓는다. 하얀색의 꽃이 예쁘다.

“이건 화실 오픈 기념선물인데 호접난입니다. 늘 가까이 두면 액을 막아준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주위 환경에 휘둘리지 말고 맡은 자리에서 고고한 향기를 풍기라는 뜻으로 선물합니다.”

“아, 고맙습니다.”

그런데 경희는 화분의 꽃보다는 지로가 가져온 종이봉투에 더 관심을 보인다.

이미 한번 경험한 탓에 무엇인지 짐작한 것이다.

“아, 그거. 전에 가져왔던 일본과자 아니에요?”

아니, 냄새를 맡은 건가?

경희 코가 좀 개코라야지. 아니, 선희의 눈도 빛나는 걸로 보면 쌍둥이의 공통 스킬인지도 모르겠지만.

“아, 네. 맞습니다. 전에 가져왔을 때 좋아하시던 것 같아서.”

그 순간 나에게 강렬한 눈빛을 쏘아 보낸다.

“오빠, 다 같이 먹어도 되지?”

저런 눈빛으로, 그것도 다 같이 먹겠다는 데 말릴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

그 순간 어시 모두가 작업을 멈추고 과자를 먹기 위해 테이블로 모여들었다.

선희는 언제 왔는지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눈을 빛내며 종이가방에서 꺼내는 상자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선희의 곁에 백설기 녀석도 같이 와 있다.

이놈은 또 언제 온 거야?

과자를 오픈하자마자 모두 맛보느라 정신없다.

특히 선희의 경우엔 백설기와 과자를 나눠 같이 오도독거리며 먹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저 고양이랑 선희가 묘하게 닮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나저나 용케도 짧은 시간 만에 어시 분들을 다 구하셨군요.”

“네. 그런데 일본은 모레 가시나요?”

“사흘 후, 새벽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런데 작업은 좀 진행이 되셨나요?”

그 말에 정미자가 과자 오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작업책상 앞에 있던 파일 바구니 속 원고를 들고 나온다.

“여기 있어요.”

정미자가 그렇게 말하며 편집자에게 원고를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원고를 받은 편집자가 한 장 한 장 세심하게 살핀다.

총 페이지 중에서 완벽하게 완성된 건 7페이지에 불과하다.

나머지 13페이지의 경우, 데생은 이미 완성되어 있는 단계였지만, 문제는 어시들의 합류가 늦어 아직 작업이 더디다는 점이다.

거기다 아직은 선희의 그림에 완벽하게 익숙해지지 않았다는 것도 큰 이유였다.

그러다보니 아직 진행률이 턱없이 모자란다.

덕분에 지로의 표정엔 당황스러움이 물든다.

“······.”

생각보다는 완성도가 높아지는 느낌 때문에 놀란 듯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틀 밖에 남지 않았는데, 남은 작업량이 상당하다는 사실 때문에 당황하고 있는 눈치다.

뭐, 내가 저 양반 입장이라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겠지.

“······저기, 이거 위험하지 않을까요? 이거 이틀 안에 완성해야 하는데.”

그 말에 놀란 건 세 명의 어시들이었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들은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여자들이 과자를 입에 오물거리면서 놀란 눈으로 나와 선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선희야 당연히 과자에만 신경 쓸 뿐 그런 시선은 관심 없지만.

나는 느긋하게 과자를 씹으며 대답했다.

“오늘까지 사흘이죠.”

내 말에 황당하다는 표정이다.

“그래도 부족하긴 마찬가지 아닐까요?”

“시간은 충분합니다.”

내 말에 지로뿐만 아니라 어시들도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마치 그들 표정이 ‘이 인간 뭘 믿고 저런 미친 소리를 하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말씀하셔도, 이미 데생이 완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진행이 이거밖에 되지 않았다는 건······.”

“아시겠지만 화실 준비하고, 어시 받고, 뭐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내 말에 지로가 머리를 끄덕였다.

“사실, 일주일 밖에 시간을 주지 않았다는 건 제가 생각해도 좀 그렇습니다만, 이미 위쪽에서 정해버린 일이라.”

“괜찮아요.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으로 말한 건 아니니까요.”

“그, 그렇습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영 미덥지 못하다는 표정이네.

하긴, 멍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어시 세 명의 얼굴을 보니 더 불안하겠지.

어쩌면 지로보다 어시들의 충격이 더 클지 모르겠다.

작업 중에 원고가 급하다거나, 언제까지 작업해야 한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을 테니까.

“혹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이것도 담당 편집자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뭐, 말씀은 고맙지만, 사람은 충분해요.”

“지우개질이라도 괜찮습니다만.”

그 말에 오늘 취직(?)한 성준희가 과자를 먹다 놀랐는지 켁켁 거리며 물을 마신다.

“괜찮아요. 출발하시기 전에 그냥 원고나 잘 가지고 돌아가시면 돼요.”

“······그럼.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은 하는데 표정은 영 불안한 모양이다.

잠시 후 담당편집자가 돌아가고 나자 곧바로 어시들이 얼떨떨한 표정이 되어 날 바라본다. 그러더니 정미자가 세 명의 어시 대표자격으로인지 내게 물어온다.

“2일, 아니 오늘까지 3일 남았다는 게 정말이에요?”

“네.”

내가 머리를 끄덕이자 잠시 동요하는 그녀의 표정이 곧 굳어지더니, 미간에 힘을 준다.

“······?”

뭐지?

뭔가를 다짐하는 듯한 얼굴.

“오늘부터 최대한 잠을 줄여서라도 그림에 매달려 완성시켜 볼게요. 이곳에서 잠을 자도 괜찮구요. 인물 펜 터치야 뭐 어떻게든 완성이 될 테니까······, 저도 최대한 배경 그리는데 돕겠습니다. 예전에 배경을 그렸던 경력도 있으니까······.”

“저도 할게요. 지금은 화실의 생존이 걸린 거니까, 잔업수당 따위는 필요 없어요.”

“저도요.”

세 명이 전투력을 잔뜩 올리며 눈에 힘을 준다.

“나, 나도 할게.”

이젠 성준희까지 나선다.

아무래도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일까.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지만, 저런 눈빛들이라니, 부담스럽네.

그때 계속 데생에 몰입해 있던 선희가 머리를 긁적이더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배경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은 원고 쪽으로 가더니 그것을 들고 자기 자리로 가지고 간다.

그 모습을 본 정미자가 선희를 말렸다.

“선생님은 안하셔도 돼요. 안 그래도 데생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하지만 선희는 그런 정미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목함을 열었다. 깔끔하게 정리된 목함 안에는 잉크와 몇 가지의 펜들이 가지런지 자리 잡고 있다.

잉크를 꺼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고 자리에 올려둔다. 그리고는 펜들을 잠시 들려다보며 신중하게 고른다.

펜을 정한 뒤 곡선자와 일반 자를 손에 쥐고는 곧바로 작업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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