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60화 (60/425)
  • 여고생 선생님 (4)

    계약서가 작성되자마자 어시들은 각자 자신의 책상을 잡고, 그림에 열중했다.

    원래라면 새로운 그림에 적응하는 기간이 필요하겠지만, 선희도 아직 실력이 완숙기에 접어 든 게 아니라 같이 성장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해 곧바로 작업에 투입시켰다.

    인물 터치를 맡은 정미자의 경우엔 그럭저럭 펜선이 적응한 모양이고, 두 사람은 처음 보는 스타일의 배경이라 흠칫 놀라고 있다.

    왜소한 체구의 박소미가 중앙자리에서 인물터치에 여념이 없는 정미자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기, 언니. 이걸 작은 선생님이 그리신 거예요?”

    작은 선생님? 선희를 말하는 건가?

    아참, 정미자는 24살이다.

    그러니까 화실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은 구자희, 그다음이 정미자, 그리고 박소미 순이다.

    화실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라 그런지 짧은 시간 만에 서로 언니, 동생 사이가 돼 버린 모양이다.

    어쨌거나 이대봉이 미리 언질을 단단히 준 탓인지, 선희와 내게는 꼭 선생님이라는 말도 붙이고 있다.

    그런데 선희는 어느 순간부터 자기들 사이에선 작은 선생님이 된 모양이다.

    그럼 난 큰 선생님인가?

    “맞아. 인물데생도 장난이 아닌데, 배경까지 엄청 꼼꼼하셔.”

    “와, 세상에는 진짜 천재가 있나 봐요.”

    “나, 효민 선생님 화실에 있을 때, 그때 엄청나게 잘 그리면서도 손이 엄청 빠른 데생맨을 본 적 있거든. 그때 처음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 작은 선생님 보니까······. 정말 뛰는 사람 위엔 나는 사람이 있나봐.”

    그렇게 호들갑을 떨고는 곧장 도구들을 준비해 작업에 돌입한다. 그리고는 선희가 미리 완성했던 원고와 비교하며 배경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대략 한 시간 정도 흐르자 어느새 조심스럽던 손동작도 점점 과감하게 움직이며 빠르게 비어있는 페이지를 채워나간다.

    근처에 가서 살펴보니, 선희의 스타일에 맞춰 잘 그려나가고 있다.

    생각보다 적응력이 좋아서 넌지시 물어봤다.

    “배경이 조금 복잡한데, 잘 그리시네요.”

    내가 물었더니 박소미가 작업을 계속 이어가며 입을 열었다.

    “배경이 이미 데생으로 완성되어 있으니까······, 수월해요.”

    “맞아요. 배경 데생도 원래는 저희 몫인데 이렇게 만들어진 그림이라면 어렵지 않아요. 그림만 익숙해지면 형태나 지시 정도만 적어주셔도 저희가 완성할 수 있어요. 물론 사진이 있다면 더 쉽구요.”

    “네. 배경은 저희에게 맡겨 주시면 돼요.”

    하긴, 데생이 되어 있는 배경을 그린다면 훨씬 일이 쉽기는 할 것이다.

    내가 선희 쪽을 돌아보자, 선희도 그 얘기를 들었는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머리가 좋은 아이니까 좀 더 효율적인 작업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표정을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건 실력이 뛰어나고 자신의 일에 대한 책임감이 있어 보이는 사람들이다.

    확실히 이런 일에 대해서는 이대봉의 눈이 정확하네.

    특이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사람을 알아보는 눈은 정확해 보인다.

    그러는 동안 박상식은 수시로 화실에 찾아와 나와 의논을 하거나, 같이 외출해 스토리를 만들어 나갔다.

    점심과 저녁식사는 엄마가 주로 찾아와 차려주시고, 누나나 경희도 가끔 엄마를 거든다.

    물론 식사 준비할 땐 확실히 화실에 여자들이 많다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그림에 빠져 있던 선희가 갑자기 작업을 멈추었다.

    아까부터 계속 작업 중에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무슨 일인지 연필을 놓아버린 것이다.

    그러더니 박상식과 한참 ‘평발 스트라이커’에 대해 의논 중이었던 내게 다가왔다.

    “······?”

    “일 끝났어?”

    “어. 대충. 그런데 왜?”

    “나랑 같이 가줘.”

    “어딜?”

    “아파트가 보고 싶어.”

    “아파트? 갑자기 왜?”

    “배경.”

    “아······.”

    그제야 선희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배경 자료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하긴, 주간 연재만화인 ‘삼사라’의 경우 도시가 주 배경이고, 또 이야기의 초반 내용이 아파트에서 진행되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아파트 사진은 구해올게. 실내 사진도 일단 구해볼 테니까.”

    그런데 선희가 머리를 좌우로 흔든다.

    “아니, 직접 볼래.”

    “직접? 왜 사진만으로 부족해?”

    “응. 자꾸 걸려.”

    “걸려?”

    자신의 상상 속에서 잘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 같다.

    얘가 보는 세상을 난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다. 하지만, 굳이 내 기준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 알았어. 그럼 지금 당장 나갈까?”

    내 말에 머리를 끄덕인다.

    “집안도 보고 싶어.”

    “집안까지?”

    주변에 아파트 사는 사람이 있으면 잠시 실례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런 사람이 없다.

    시대가 시대다보니, 그런 것도 있지만, 그래도 한명정도는 아파트에 살고 있을 법한 사람도 있을 것 같은데.

    아무튼 일단 부딪쳐보기로 했다.

    “다녀오세요.”

    “다녀와라.”

    어시들과 박상식의 인사를 받으며 화실을 나선다.

    집 주변엔 아파트가 없는 관계로 일단 버스를 타고 가까운 아파트 단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내가 살던 시대엔 사방이 온통 아파트인데, 아직은 그런 때가 아니라 주택이 주류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 아파트 단지가 보이는 곳에 내려 곧장 다가갔다.

    일단 자료차원에서 사진을 찍으며 물었다.

    “이정도면 되겠니?”

    그런데 어째 선희 표정이 묘하다.

    뭔가 자신의 생각과 다른 것일까.

    이내 머리를 가로 젓는다.

    “왜?”

    그런데 얘가 좀 황당한 말을 한다.

    “여긴······, 좀비들이 몰려오면 방어를 하기 힘들어.”

    “뭐?”

    얘, 눈에는 지금 이곳을 단순히 배경자료 쯤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다.

    바로 삼사라의 세계 속 이야기에 등장하는 배경인 아파트 단지의 정확한 모델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초반, 주인공이 아직 제대로 된 능력을 얻지 못했을 때 사람들과 힘을 합쳐 좀비들을 막는 부분의 이야기가 있다. 아마도 그 배경이 되는 아파트를 말하는 것 같다.

    나야 대략적으로 사람들과 힘을 합쳐 싸우는 정도의 설정만을 잡았고, 그것을 기반으로 박상식이 콘티를 짰지만, 선희는 다시 그것을 자신의 스타일로 바꿔 작업하고 있다.

    이미 완성된 콘티도 내가 상상으로 했던 것을 너무 실감나게 구현해서 놀라울 정도였는데, 이렇게 디테일한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구나.

    얜 정말.

    “······?”

    선희가 날 보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아마도 내가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었나 보다.

    “좋아. 그럼 여러 군데 돌아보자.”

    내 말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이렇게 되면 버스를 타고 대충 찾아서는 곤란하다.

    “택시!”

    나는 곧장 택시를 잡았다.

    “어디로 갈까요?”

    “아파트 단지가 있는 곳을 돌아주세요.”

    “네?”

    택시운전기사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조수석에 탄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서울 랜드 마크가 될 만한 아파트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저희가 좀 바쁘니까 꼼꼼하게 좀 돌아주세요.”

    내 말에 살짝 미간을 찌푸리더니 내 복장을 힐끔거린다.

    한쪽 어깨에 카메라도 걸려있겠다. 가방도 뭔가 중요한 물건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였는지 금세 밝은 표정으로 말한다.

    “아, 공무수행중이셨군요.”

    “뭐, 그런 건 아니고.”

    그런데 이 아저씨 내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린다.

    “아이고, 귀한 분들이네. 알겠습니다. 제가 알아서 잘 모십지요.”

    그렇게 말하더니, 서둘러 출발한다.

    아, 이거. 공무원 사칭 죄로 잡혀가는 거 아니야?

    아니, 난 공무원이라고 사칭한 적 없다. 이 아저씨가 멋대로 착각한 거지.

    그렇게 우리는 택시를 타고 서울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초록색의 포니택시가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는 사이 뒷좌석을 돌아보니 멍한 얼굴로 선희가 창밖만을 응시하고 있다.

    확실히 운전기사 아저씨가 베테랑인지 효율적인 길로 아파트 단지를 잘 찾아다닌다. 하지만 원하는 곳을 찾지 못했는지 선희는 계속 같은 자세로 바깥에만 시선을 주고 있다.

    얼핏 보면 무슨 마네킹처럼 보일정도로 완전히 정지 상태.

    그 와중에도 운전기사 아저씨는 수다스럽게 떠들어댄다.

    사회문제, 정치문제, 경제문제.

    쉴 새 없는 그의 얘기를 들으면서도 계속 뒷자리를 힐끔거리고 있을 때, 선희의 동작에 변화가 생겼다. 손가락으로 창밖을 가리키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기.”

    “응? 어디?”

    “저기가 좋을 것 같아.”

    “아저씨, 저기 앞에 세워 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택시가 서자 택시비를 지불하는데 기사아저씨가 황송하다는 듯 두 손으로 받는다.

    “아이고, 감사합니다. 그럼 열심히 하십쇼.”

    “아, 네. 고맙습니다.”

    운전기사가 한 번 더 인사를 하고는 택시를 출발시켰다. 시야에서 멀어지는 택시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이며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곧 돌아섰는데, 선희는 벌써 아파트 단지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얌마, 같이 가자.”

    그렇게 말하고든 선희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아파트 단지가 잘 보이는 자리까지 간 선희가 걸음을 딱 멈춘다.

    “여기?”

    “응. 여기 위치 좋아. 여기라면 몰려와도 방어할 수 있어.”

    뭔가 전쟁을 준비하는 지휘관처럼 비장한 느낌까지 준다. 보통 때라면 분명 웃어야 할 타이밍인데 얘가 너무 심각하게 보고 있으니까 나도 덩달아 비장해지는 기분이다.

    일단 나도 선희의 입장에서 아파트를 바라보았다.

    어쨌건 내가 생각한 이야기니까.

    그런데 주변을 돌아보면 볼수록 선희의 말에 공감이 될 수밖에 없다.

    아무튼 아파트 앞에 있는 대형슈퍼와 주변 지형을 보며 상상을 해봤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좀비.

    그리고 그것에 맞서는 사람들이 주변의 건물들과 각종 방벽으로 대항하는 모습.

    이런 것들을 떠올려보니 내가 만들었던 이야기에 가장 부합되는 장면이 나온다.

    선희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이런 장소를 한눈에 알아 본 것이다.

    시각적인 정보를 이해하는 능력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는 느낌이다.

    내가 놀라는 동안에도 선희는 열심히 단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주변을 살핀다. 그리고는 곧바로 아파트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나도 서둘러 선희 뒤를 따랐다.

    7층을 누른다.

    삼사라에서도 7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외부로 노출된 아파트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래를 살피던 선희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곧 내게 다가와서 말한다.

    “아파트 실내도 보고 싶어.”

    “······그건, 곤란한데.”

    “······.”

    선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다.

    그런데 그때 뭔가가 떠오른다.

    “날 따라와.”

    그렇게 말하고는 서둘러 아파트를 내려가 근처 복덕방을 찾아갔다.

    “아파트를 보고 싶다고?”

    “네.”

    노인은 우리 둘을 번갈아 보더니 어색하게 웃는다.

    “어른들은?”

    “아, 어머니랑 아버지는 시간이 없으셔서요. 일단 저희더러 아파트부터 확인해보라고 하셔서.”

    “효자, 효녀구만. 허허.”

    “그런데 혹시 저기 101동 7층에 나온 매물은 없을까요?”

    “꼭 거기라만 되는 건가?”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다른 층도 상관은 없지만, 되도록 실제에 가깝게 하기 위해서다.

    “잠시만, 기다리게.”

    그렇게 말한 복덕방 노인이 노트를 뒤적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마침, 하나가 있구만.”

    그렇게 말하고는 노인이 복덕방의 문을 잠그고는 직접 안내한다.

    덕분에 아파트를 훑어보고는 나오며 다음에 연락 주겠다는 뻔 한 거짓말을 했다.

    그래도 일부러 시간까지 내 준 노인에게 미안한 마음에 안내해 줘서 고맙다는 뜻으로 근처 슈퍼에서 담배 두 갑을 사다드렸다.

    복덕방에서 피던 담배가 거북선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같은 것으로.

    아무튼 목적을 달성한 우리는 곧장 화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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