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59화 (59/425)

여고생 선생님 (3)

오후가 되자 박상식이 화실에 들어왔다. 아침에 전상길의 화실에 다녀온 모양이었다.

“어, 정리 다 끝났구나.”

그렇게 말하며 들어오다 정미자를 보고는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한다. 그녀 역시도 펜선 작업을 하다가 들어오는 박상식을 보고는 인사한다.

“평발 스트라이커 반응 좋다고 보너스를 주더라. 자, 이거 네 몫.”

“어, 고마워.”

봉투를 슬쩍 열어보니 100만원이 들어있다.

시대도 그렇지만, 이 시절 대본소 만화 쪽은 대박만 난다면 돈이 넘치던 시절, 그러다보니 현찰 선불이 아주 일상화 되었다. 덕분에 바로바로 돈을 받을 수 있어 완전 내게는 꿀이다.

어쨌건 요즘 전상길은 꽤나 잘나가고 있었다.

원래는 한동안만 하려했던 두 작품 ‘경영의 왕’이랑 ‘평발 스트라이크’의 인기가 너무 좋다보니 이제는 그만두기가 어려운 지경이 되어버렸다.

전상길도 정상길이지만, 나나 박상식의 경우에도 워낙 목돈이 들어오고 있어서 쉽게 연재를 중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물론 출판사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특히, ‘평발 스트라이커’의 경우엔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주인공 ‘강도치’의 캐릭터 그림을 베껴 코팅한 뒤 책받침으로 사용하는 유행도 생기고 있었다.

때문인지, 공책을 만드는 회사에서 캐릭터를 사용하고 싶다는 요청이 들어왔던 모양이다. 드디어 2차 문화 파생상품으로서의 거래가 첫 번째로 이뤄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규모가 작은 회사라 제시한 돈이 적은 모양인데, 전상길이 계약을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듣기로는 좀 더 큰돈을 제시하는 곳을 기다린다고 하는데, 뭐 나야 계약대로 그가 받는 돈의 30%만 받으면 된다.

어쨌건 그림에 관한 판권이다 보니 나야 뭐 거저먹는 기분이기도 하고.

“용철이 형은 요즘 어때?”

“뭐, 만화 반응은 엄청 좋다더라. 그런데 문제는 속도지 뭐. 그래서 조만간 사람을 뽑아야 할 텐데, 너무 초짜들만 모여서 그게 또 문제인가 봐.”

“하기야, 가르치랴 원고하랴 힘들겠지. 아, 대봉이 형에게 부탁할까?”

“오, 그러네. 우리 마당발 대봉이 형.”

그런데 이대봉도 양반은 못되는지 그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 때문에 우리가 피식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이대봉은 들어오자마자 우리 표정을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뜬다.

“뭐야? 표정들이 왜 그래? 혹시 내 얘기하고 있었던 거야? 그랬어?”

그 말에 나와 박상식은 말없이 웃기만 한다.

“너희들 진짜.”

그런데 그의 뒤에 두 사람이 보인다.

둘 다 여자다.

한명은 살이 조금 넉넉하고 안경을 쓴 여자고, 다른 한명은 반대로 심하다 싶을 정도로 왜소하며 마른 체형의 여자다.

“두 분은······?”

내 물음에 긴장한 표정의 여자 두 명이 동시에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나도 얼떨결에 같이 인사했다.

그러자 곧 이대봉이 나선다.

“아, 네가 부탁했던 배경맨, 아니 배경우먼이라고 해야 하나?”

“맨이면 그냥 돼. 뭘 그런 걸로 개그를 쳐.”

“아, 그런가? 아무튼 실력 있는 배경맨들이야. 며칠 전까지도 현장에서 일하던 고급 인력들이야.”

“뭐야, 남의 화실에서 무작정 빼온 거야?”

“아, 뭐. 그런 건 아니고.”

역시 과장광고인가?

뭐, 실력이 있다면 상관없지만.

이대봉이 두 여자에게 내 소개를 먼저 한다.

“앞에 있는 사람은 스토리맨, 아니 스토리 작가. 그리고······.”

이대봉이 머리를 들어 빛이 들어오는 중앙의 책상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러자 두 여자가 서둘러 중앙 쪽에 앉아있는 정미자 쪽으로 서둘러 다가간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두 사람이 앉아서 펜선 작업에 몰두해 있던 정미자에게 인사한다.

“어?”

“······?”

이대봉과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광경을 지켜보기만 했다.

아무래도 두 여자는 중앙에 앉아있는 정미자가 만화가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 순간 정미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여자를 보며 덩달아 머리를 숙이고 인사한다. 그 모습을 보던 이대봉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뭐야, 너희들. 만화가 선생님은 그쪽이 아니라고.”

“네?”

“······?”

놀란 두 여자가 이대봉 쪽으로 돌아봤다가 다시 정미자를 바라본다.

정미자가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전 만화가 선생님이 아니고 인물 펜선 담당이에요.”

“······?”

“······?”

두 여자가 잠시 혼란스러운 눈빛이 된다.

아마도 여자 선생이라는 얘기는 들었던 모양이다. 박상식에게 시선을 두지 않는걸 보니까. 그럼 남은 사람은 한 명뿐.

“이 분이 만화가 선생님이셔. 어때? 우리 선생님 예쁘고 깜찍하지?”

이대봉이 계속 만화에 열중해 있는 선희를 가리키자 두 여자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왜소한 덩치의 선희는 누가 봐도 중학생, 끽해야 고등학교 1학년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분위기도 잠시, 곧 두 사람이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안녕하세요.”

두 여자들이 인사를 했지만 역시 요지부동이다. 때문에 여자들이 좀 당황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내가 나서야겠네.

“선희야!”

내가 소리치자 멈칫 하더니 머리를 들어올린다.

그리고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왜?”

“네 그림 도와줄 분들 오셨어. 너한테 인사하잖아.”

그 말에 다시 두 여자들에게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머리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자리에 앉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 때문일까 두 여자들은 당황한 듯 머뭇거린다.

“아, 미안해요. 쟤가 원래 사람들과 소통하는 게 좀 저래서 그런 거예요. 이해하세요.”

내 설명에 두 여자들이 두 손을 내저으며 대답한다.

“아, 아뇨. 괜찮아요.”

“저도요.”

배경담당을 여자로 한건 의외였다.

내가 왜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가관이다.

“아, 선생님이 우리 이쁜 선희니까, 당연하지.”

아니, 당신이 그런 걸 왜 걱정해. 그리고 실력은?

물론 당사자들이 앞에 있는데 이렇게 대놓고 물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지 이대봉이 곧바로 설명한다.

“내가 실력 없는 사람을 소개할 정도로 앞뒤 분간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 우리 윤환이도 잘 알잖아.”

“거기서 우리가 왜 나와?”

두 여자들의 이름은 덩치가 큰 사람이 구자희로 26살, 배경 경력은 7년으로 상당한 베테랑이라는 이대봉의 설명도 덧붙는다.

그리고 왜소한 쪽은 박소미로 22살, 경력은 3년 정도지만, 자선 속도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두 사람의 그림을 살펴보니, 서로가 상호보완적인 구석이 있었다.

헐렁해 보이지만 이대봉의 성격상, 이런 것도 아마 염두에 두고 데려온 건지 모른다.

어쨌건, 남자 여자를 떠나, 이 시대에서는 만나기 힘든 스텝들임은 분명해 보인다. 아마도 능력에 비해 제대로 대우를 못 받았을 거라는 건 뻔 한 일이고.

“자자, 두 사람 다 자기 그림 보여줘.”

이대봉의 말에 두 사람이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원고용지들을 꺼낸다. 그런데 마른 여자, 그러니까 박소미가 이대봉을 돌아보더니 묻는다.

“그림은 어느 분께·······?”

“아, 그건 우리 윤환이에게.”

“아, 진짜.”

여자들이 중앙에 앉아있는 내게 다가와 자리를 잡고 앉으며 그림을 내민다.

그 순간 계속 뻘쭘하게 서 있던 박상식이 어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난, 커피 준비할게. 두 분 커피 드시죠?”

“네.”

“네.”

“삼삼삼 괜찮아요?”

그 말에 두 여자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난? 안줘?”

“대봉이 형도 삼삼삼?”

“너, 진짜, 제임스라고 부르라니까. 아무튼 난 삼이이.”

“까다롭긴, 알았어.”

나도 이젠 삼삼삼이라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냥 그렇게 마시고 있다.

아무튼 두 여자가 꺼낸 그림들을 확인했다.

확실히 이대봉의 말대로 배경 그림은 능숙하긴 하다.

하지만, 이 시대의 배경맨들이 그렇듯 지금의 내 눈에 괜찮아 보이는 실력은 아니다. 애초에 내 눈이 35년은 앞서가 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튼 속도가 빠르고 능숙한 펜 솜씨라면 어쨌든 선희의 그림에 적응해 가겠지.

그리고 애초에 그림만으로 일본시장에서 승부를 낼 수도 없는 일이다.

아키라 같은 만화가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거야 그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서나 그렇지, 정작 만화를 보는 독자들은 그런 것보다는 결국 재미있느냐 없느냐가 가장 중요한 문제니까.

다만, 한국인이라는 특수한 사정까지 감안하고 있으니 그림이라도 당장은 일본 만화 평균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어쨌건 생각보다는 스텝들 수준이 괜찮아 보인다.

앞으로 어떤 식의 만화를 해 가야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시작은 이렇게 조촐할 수밖에 없겠지.

한참동안 그림을 살펴보던 내가 배경 그림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괜찮네요.”

방금까지 그렇게 긴장하더니 내 말을 듣고 나서야 안도하는 표정이다.

그러고 나서는 곧 살집이 있는 여자······, 아니 구자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급여문제는······ 어떻게 되나요?”

“형이 말 안 해줘요?”

“제임스 오빠에게 얘기는 들었는데······, 확인 차원에서.”

“한 달, 기본으로 20만원씩 드릴 거예요. 아참, 미자 씨!”

“네?”

“미자 씨도 잠깐만 여기 와보실래요?”

“네.”

그렇게 대답하고는 같이 내 앞에 두 사람이랑 나란히 앉았다.

곧바로 내가 모두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내밀었다.

모두 이게 뭐냐는 눈치다.

“계약서에요. 세 분이서 이제 화실 식구가 되셨으니까, 앞으로 저희가 어떻게 대접할 계획이고, 세분이 기본적으로 지켜줬으면 하는 내용이 들어있는.”

잠시 세 사람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더니 곧 계약서를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내용을 천천히 읽어나가다 곧 박소미가 움찔하더니 고개를 들고는 내게 물었다.

벌써 다 읽었나? 빠르네.

“저기, 여기 적혀있는 보너스, 정말인가요?”

“아, 네 일단 400%로요. 앞으로 사정이 더 좋아지면 더 늘 수도 있고요.”

“회사처럼 보너스를 준다는 건가요?”

“뭐, 그렇죠.”

그 말에 눈을 휘둥그레 뜬다. 그리고는 다시 계약서를 들여다본다.

어깨너머로 계약서를 읽어보던 이대봉도 흥미롭다는 눈치다.

“이야, 보너스 주는 화실은 또 처음이네. 보통 명절에 떡값으로 몇 만 원 정도가 기본인데. 그나저나 우리 윤환이는 독특하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대?”

“우리라는 말 빼, 그리고 독특하다니, 욕이야?”

“칭찬.”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는다.

사실, 이 시절.

아니, 이 시절이 아니더라도 문하생이건 어시건 간에 대체적으로 이런 계약을 하는 건 후에도 흔치 않다. 그냥, 월급을 차라리 더 많이 주는 쪽으로 하거나, 혹은 데뷔를 돕거나 하는 정도지.

물론 그것도 화실의 리더급인 데생맨 정도나 돼야 하는 얘기고, 실제로 펜 터치나 배경을 그리는 급이라면 그 대접도 상당히 떨어진다. 하물며 먹칠이나 지우개질 같은 뒤처리야 아예 말할 필요도 없는 거고.

애초에 그림 배운다는 조건으로 소규모 화실의 경우 무급제인 곳도 상당했으니까.

하지만, 앞으로 내 사람들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다른 화실과 같은 대접을 하면서 더 나은 실력을 바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욕심일 뿐이다. 물론 지금도 충분한 건 아니다.

언젠가는 최고의 팀을 만들기 위해 당연히 해야 할 투자일 뿐이다.

어쨌건 이런 조건이 그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이 되었던 모양이다.

나머지 두 사람도 내 말에 얼떨떨해 하더니 곧 표정이 밝아진다. 그리고는 내용을 다 숙지하고는 곧바로 계약서에 지장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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