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58화 (58/425)
  • 여고생 선생님 (2)

    다음날, 이대봉이 우리 동네 제빵가게로 찾아왔다.

    물론 부탁한 사람을 데리고서.

    그런데 예상과 다르게 여자다.

    나 역시, 선희를 데리고 그 자리에 나갔다.

    만나자마자 이대봉이 여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나랑 절친한 동생 정미자. 나이는······.”

    그 순간 정미자라고 소개받은 여자가 화들짝 놀라며 이대봉을 말린다.

    “돼, 됐어. 그런 거 왜 말할려구 그래?”

    대충 20대 중반쯤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뭐야, 그래도 남자 앞이라 부끄럽다는 거니?”

    “아, 아니거든.”

    “으흥, 그래?”

    그렇게 말하며 정미자를 그윽한 눈빛으로 보더니 곧 내게 시선을 돌린다.

    “그렇다는데, 어쩔 수 없네. 이건 네가 이해 좀 해라.”

    “제임스는 좀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정미자가 제임스를 찰싹 때리며 말린다.

    이 인간은 지금 여기가 선보는 자린 줄 아나, 왜 이렇게 오바질인지.

    “그럼 몸무게 같은 것도 궁금하지······.”

    “적당히 하라고!”

    “아야!”

    정미자에게 허벅지를 꼬집혔는지 머리를 아래로 처박고 열심히 다리를 양손으로 문지른다. 그리고는 곧 다시 머리를 들어 올려 헝클어진 머리를 바로 넘기고는 표정관리를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튼, 이쪽은 정미자고, 윤환이가 부탁했던 대로 펜선 능력자야.”

    “아, 안녕하세요.”

    렌즈가 두꺼운 검은 뿔테안경을 쓰고 있는 수수한 외모의 20대 중반으로 보이는 여자다.

    안경이 무거운지 계속 안경을 올려 쓰고 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옆에 있는 예쁜 소녀는 윤환이 동생?”

    이대봉이 내 곁에 있는 선희를 보며 물었다.

    “어.”

    내가 대답하는 사이에도 선희는 빵을 계속 오물거리며 먹고 있다.

    그러더니 빵을 약간씩 뜯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는다. 언제 따라왔는지 백설기가 선희 발아래에서 빵조각을 날름 받아먹고 있다.

    난 그곳에서 시선을 거두고는 곧바로 두 사람에게 선희를 소개했다.

    “이 쪽이 만화를 그리고 있는 이선희라고 합니다.”

    “아? 그냥 따라온 동생 아니었어? 엄청 귀엽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만화가라고?”

    정미자도 놀란 눈빛인데 이대봉은 더 놀란 모양이다.

    하기야, 이렇게 어린 만화가가 있던 시절은 아니니까.

    사실, 6-70년대 초반까지는 나이 어린 만화가들이 종종 있기는 했었다. 그 시절엔 중학교도 못나온 사람들이 시골에서 일찌감치 서울로 올라와 문하생을 몇 년 하다가 20살이 되기 전에 만화가로 데뷔하던 게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본격적으로 만화가 대본소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하고, 대량의 만화를 찍어내야 하는 시장으로 변질되어 가다보니 그것에 적응한 노련한 만화가들만이 살아남은 것이다.

    물론 몇 개의 월간지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이름 있는 작가들이 여러 곳에 연재까지 하는 상황에서 신인이 설 자리 따위는 있을 리 없었다.

    물론 그것의 가장 큰 책임은 바로 합동출판사라는 쓰레기 집단의 역할이 가장 컸지만.

    아, 합동출판사 얘기하려면 정말 끝도 없으니까 이쯤에서 접자.

    “선희야 인사해.”

    선희가 두 사람에게 여전히 빵을 오물거리며 머리를 꾸벅한다.

    “이번에 고1에 올라가.”

    내말에 정미자가 놀란 눈으로 물어본다.

    “고등학교 1학년요?”

    “네. 조금 있으면 중학교 졸업하니까요.”

    “와, 그런데 만화가라고? 어디 연재하는데?”

    “아, 형은 좀 빠져. 오늘은 어시 분이랑 대화를 더 해야잖아.”

    “형이 아니라, 제임스라고, 제임스.”

    “시끄러워. 좀.”

    “어시가 뭐예요?”

    정미자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어시스턴트요.”

    “······?”

    “문하생 비슷한데, 그냥 그림을 도와주는 사람. 일본에서도 요즘엔 도제 형식을 벗어나서 이렇게 어시 개념으로 바뀌고 있어요.”

    “왜 갑자기 일본 얘기야?”

    정미자의 곁에서 머리를 갸웃거리던 이대봉이 다시 끼어들었다.

    “형은 진짜.”

    그렇게 말하고는 한숨을 푹 쉰 후 짧게 설명했다.

    “며칠 전에 일본 출판사랑 계약을 했거든.”

    “뭐? 진짜?”

    정미자와 이대봉이 동시에 깜짝 놀란다.

    특히나 이대봉은 어찌나 놀랐던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였다. 때문에 가게에 있던 손님들이랑 직원들이 놀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본다.

    “앉아, 좀. 사람들이 보잖아.”

    “정말 일본출판사랑 계약했어? 진짜 일본에 있는 회사?”

    “맞아. 그러니까 호들갑 좀 그만 떨고 앉아.”

    내가 눈을 번뜩이자 그제야 주춤거리며 자리에 앉는다. 그리고는 머리를 들이밀며 호기심어린 눈빛으로 묻는다.

    “어떻게 한 건데? 응? 어떻게 했어. 그 이야기 좀 자세하게 해봐.”

    “그런 얘기는 나중에.”

    “아, 궁금한데.”

    그렇게 말하며 이대봉이 입맛을 다신다.

    나는 곧바로 정미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보다, 혹시 펜선 작업한 거 볼 수 있어요?”

    내 말에 이대봉이 와락 인상을 쓰고는 버럭 한다.

    “뭐야? 날 못 믿는다는 거야?!”

    “가져왔어요.”

    정미자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서류봉투를 꺼내 내민다. 그것을 열어 종이를 꺼내보니 연습용 그림인지 펜선작업이 된 그림들이 여럿 있다.

    천천히 펜선을 살펴봤다.

    여자라서 가늘고 섬세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과감하면서도 강렬한 느낌이다.

    이정도면 여자보다는 남자만화에 가까운 느낌이다. 물론, 내 기준에서 보자면 좀 투박한 느낌도 있다.

    그래도 선의 강약도 자연스럽고, 무엇보다 입체감이 두드러지는 스타일이다. 이정도면 이대봉이 큰소리 칠만하다.

    “최근에 그린 것만 가져왔어요.”

    “인물 전문이신가요?”

    “배경은 잠시 했었는데, 그 쪽보다는 이쪽에 더 자신 있어요.”

    “펜선 속도는 어떤가요?”

    “이제까지 거쳐 간 화실은 세 곳이고, 거기서는 제가 제일 빨랐어요.”

    이정도 펜선에 속도가 빠르다면 상당한 수준인 건 분명해 보인다.

    “그건 내가 보장할게. 나도 얘 작업하는 거 수없이 봤으니까.”

    이대봉까지 그렇게 말할 정도면 확실하겠지.

    “만약 하시게 된다면 앞으로 접하게 될 데생이에요.”

    난 미리 준비해온 데생원고를 꺼내 이들에게 보여주었다.

    원고를 꺼내자마자 두 사람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든다.

    “이, 이걸 쟤가 그린거야?”

    “어. 이걸 앞으로 일본으로 보내게 될 거야.”

    “와, 엄청 그림이 섬세하네. 연출도 좋아. 이정도 연출은 대본소 만화에선 한 번도 못 봤는데.”

    대본소 수준의 연출이었으면 애초에 편집자의 눈에 차지도 않았겠지.

    “그래서 말인데, 제대로 배경을 그려줄 어시도 두 명 정도 필요할 것 같은데.”

    “이정도 배경을 감당하려면 일반적인 대본소 배경맨으로 턱도 없겠는데.”

    “어렵겠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피식 웃는다.

    “어렵긴. 내가 빅풋 제임스잖아.”

    “설인이냐? 빅풋은 또 뭐야?”

    그 말에 본인도 엉뚱하다고 느꼈는지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돌린다.

    “혹시, 시간이 급하니?”

    “뭐, 원고가 급하긴 한데, 배경이야, 뭐 급한 대로 선희가 하면 되니까.”

    “일단 알았어. 그 문제도 내가 한번 알아볼게.”

    “고마워, 형.”

    “제임스라니까.”

    그런데 이야기를 듣던 여자가 머리를 돌리더니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저······. 합격 된 건가요?”

    “네. 내일부터 하실 수 있어요?”

    “전 상관없어요.”

    “그럼. 뭐, 내일부터, 여기 근처에 일단은 작지만 화실도 있으니까, 그곳으로 출근하시면 돼요. 지금은 일본 출판사에서 첫 원고를 빨리 달라고 독촉을 해서.”

    그런데 정미자가 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린다.

    “왜요?”

    “저기, 혹시 급여는 알 수 있을까요?”

    “아 중요한 얘기를 빼먹었네요. 미안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곧이어 설명했다.

    “네. 당장은 체계가 잡혀 있지 않지만, 일단 인물터치랑 자잘한 원고 뒷정리를 도와주시면 되고요. 일은 아직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예요. 월급은 일단 20만원 드릴게요. 만약 일이 계획보다 늘어나면 추가수당도 있고, 어때요?”

    그 말에 놀랐는지 눈이 살짝 커진다.

    사실, 화실의 실력 있는 문하생의 경우 더 큰돈을 버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대부분 데생맨이고, 거기다 화실에서 먹고 자야하는 남자들의 경우가 대부분이다.

    더불어 엄청난 양의 원고를 작업해야 하는 건 덤이고.

    아무튼 이것저것 따져 봐도 여자로서 받는 한 달 어시비 20만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닌 것이다.

    “좋아요. 내일부터 시작할게요.”

    정미자는 혹시라도 내 생각이 바뀔 것을 걱정하는지 서둘러 대답했다.

    “배경맨들은 급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도 일단은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물론 능숙도에 따라 더 줄 수도 있고.”

    “오, 네 말대로라면 대우가 엄청 좋네. 그럼 배경맨 구하는 것도 좀 더 쉽겠다.”

    “저기, 그런데 부탁하나만 해도 될까요?”

    정미자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네. 말씀해 보세요.”

    “저기, 캐릭터 데생그림 몇 장 얻어가며 안될까요?”

    “네? 왜요?”

    “이거 연습해보고 싶어서요. 아무래도 당장 원고를 들어가야 할 텐데 캐릭터에 맞는 펜선을 만들어 보려고요.”

    그 말에 내가 선희를 돌아보며 말했다.

    “캐릭터 그려놓은 연습장 있지? 그거 좀 줘볼래?”

    옆에서 계속 단팥빵을 오물거리던 선희가 빵을 입에 문 채로 가방을 열어 연습장을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그녀에게 내밀자 그녀가 그것을 확인하며 다시 물었다.

    “이거 빌려가도 되죠?”

    그녀의 말에 내가 선희를 돌아본다.

    ‘넌 어때?’ 라는 표정으로.

    그러자 선희가 별거 아니라는 듯 빵을 계속 오물거리며 머리를 끄덕인다.

    그 모습을 본 정미자가 연습장을 살펴보더니 곧 자신의 가방에 넣었다.

    “오신 김에 위치도 확인할 겸 화실에 한번 들렀다 가세요.”

    “네.”

    “오, 나도 구경할게.”

    우리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가족들이 먹을 빵을 더 구입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엄마와 누나가 화실정리를 마무리하는 동안 정미자가 들어왔다.

    그녀는 들어오자마자 엄마와 누나를 보며 넙죽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아, 처자가 오늘부터 우리선희 그림 도와줄 사람인가보네요. 잘 좀 부탁해요.”

    “아뇨, 제가 오히려 잘 부탁드립니다. 사모님.”

    정미자의 말에 엄마가 화들짝 놀랐다.

    하지만 표정을 보니 그리 싫지 않은 모양이다.

    “사모님은 무슨, 그냥 아줌만데. 아, 그리고 이쪽은 우리 큰딸이에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아참, 사모님, 그냥 말 놓으셔도 돼요.”

    “그, 그럴까? 뭐, 딸 같으니까.”

    “그럼요.”

    그렇게 간단히 대화를 나누더니 우리 쪽으로 온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네. 안녕하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선희 쪽을 돌아본다. 그런데 이 녀석은 아침부터 자신의 책상에 앉아 계속 그림에만 몰두해 있다.

    어제부터 자신의 전용 작업 책상이 생겼다는 사실 때문인지 계속 찰싹 붙어있다. 그래서 아침에도 일어나자마자 서둘러 와서는 이렇게 자리를 잡고 그림만 그리고 있다.

    내가 책상을 툭툭 치자, 그제야 선희가 머리를 들더니 정미자를 보고는 머리를 꾸벅 숙인다. 그리고는 다시 그림에 몰두했다.

    “미자 씨가 좀 이해해 주세요. 낯을 많이 가려서.”

    “전 괜찮습니다.”

    정미자가 웃었다.

    그런 그녀에게 적당히 책상을 배정해주었다.

    선희는 빛이 잘 드는 자리를 만들어주었는데도 굳이 구석자리에 앉겠다고 해서 그곳에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창가 가장 명당은 자동적으로 정미자에게 돌아갔다.

    “제가 이런 자리 써도 되나요?”

    “뭐, 쟨 이 자리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니까, 그냥 쓰세요. 왜, 마음에 안 들어요?”

    “저야 좋긴 하지만.”

    “그럼 쓰면 되는 거죠.”

    내 말에 엄마가 나선다.

    “그래. 그냥 써. 쟨 원래 어릴 적부터 구석자리 같은 데를 좋아해서.”

    그리고 잠시 후 정리가 완전히 끝나고 엄마랑 누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정미자는 자신의 자리에 앉아 물건을 꺼내 정리를 하고는 곧바로 데생 원고 작업에 들어갔다.

    확실히 경험이 많은 탓인지, 몇 번 종이에 펜으로 쓱쓱 긋더니 곧바로 데생 원고 속 인물에 펜터치를 시작했다.

    밤사이 꽤나 펜선을 연습했던 건지, 원래의 스타일과 조금 다른 방식의 펜선을 구사했다.

    그런데 선희의 캐릭터와 묘하게 조화가 되며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사실, 펜선에 따라 그림이 가지는 느낌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데생과 펜선의 조화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데생을 잘해놓고도 펜선 때문에 반감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미약한 데생을 펜선이 멱살 잡고 캐리 하는 경우도 간혹 있으니까.

    아무튼 정미자의 펜선은 하드캐리 정도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조화를 이룰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나름 밤새 연구를 많이 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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