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고생 선생님 (1)
“이 정도 가격에 이만한 방 구하기 힘들어요.”
“괜찮네요. 계약하죠.”
“아유, 잘 생각했어요.”
눈가에 주름이 가득한 중년의 아줌마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좋아라한다.
지금 내가 찾아온 곳은 1층짜리 단층주택으로 야외로 문이 달려있는 구조의 주택이다.
한 건물에 총 4가구가 살고 있었고, 그중 내가 선택한 집이 가장 크다.
커다란 거실과 작은방 두 개로 되어있고, 화장실이 내부에 설치되어 있는 나름 신식인 곳임에도 가격은 비교적 저렴했다. 물론 그 대신 벽지와 장판은 내가 직접 하기로 했다.
아무튼 이제야 드디어 온전하게 작업에만 열중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당연히, 화실과 스토리를 집필에 집중할 수 있는 장소 말이다.
일단 위치는 집과 가까워 시간적 소모가 적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그리고 작업실로 쓰기 위해선 책상도 들여야 하기 때문에 주 공간이 될 거실이 큰 곳으로 정했다.
집 사면서 탈탈 털렸던 통장도 평발 스트라이크와 경영의 왕 속편들의 성공으로 인해 다시 두둑해졌다. 그 덕에 이런 전셋집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돈 들어갈 건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이 텅 비어있는 공간을 수리하고 다시 필요한 물건들을 채워야 한다.
방 계약이 끝나자마자 인근 지물포로 갔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직접 도배지와 장판을 골랐다.
컬러는 무늬가 거의 없는 흰색으로.
장판은 별로 고르고 자시고 할 만한 색상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두께만 조금 두툼한 걸로 골랐다. 그리고 주문을 넣자마자 가게에서 두 명의 기술자들이 집으로 찾아와 도배를 시작했다.
그 사이 가구점에 들러 사용할 책상 몇 개와 기본가구들을 내일 아침에 넣어달라는 주문을 했다.
저녁 무렵 호떡 200원어치를 사서 도배와 장판까지 작업이 모조리 끝난 화실에 들어와 둘러보았다.
마음에 딱 든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
아무래도 시대의 한계를 넘을 수는 없으니까 그건 뭐 할 수 없는 일이고.
아직 아무것도 들어온 것이 없다보니 휑한 실내지만, 이제 이곳이 내가 선희,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작업을 해나갈 공간이 된다고 생각하니 이래저래 묘한 기분이 든다.
갑작스럽게 1983년이라는 시간대로 와버렸을 때만해도 여기서 어떻게 적응하며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는데, 대충 4개월 이상을 지내면서 어느 샌가 이곳 생활에 적응도 했고, 앞으로 할 일도 찾을 수 있었다.
그저 재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내가, 그나마 만화덕후라는 취미 하나 때문에 이만큼 자리를 잡은 건 순전히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거기다 좋은 가족까지.
가족이라······.
그러고 보니 내가 떠나왔던 시절의 엄마는 지금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언젠가 다시 돌아갈 때 시간대가 같다면 괜찮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충격으로 쓰러질지도 모르는데.
남편을 잃고 하나 남은 아들마저 잃게 되면 우리엄마는 절대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후우. 잘 지내고 있으려나.”
엄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이 시대에도 어쩌면 엄마가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하지만, 1983년에 엄마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애초에 가족 이외의 친척과는 교류가 거의 없었고, 엄마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동네도 가봤지만, 같은 동네가 맞나 싶을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 현재의 내가 파악할 수 있는 건 전혀 없었다.
만약 이곳에서 10년 이상을 지내게 된다면······, 그땐 한번 찾아볼 생각이다.
그나저나 이곳을 떠나 다시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간다면 그땐 이곳의 가족은 또 어떻게 되는 거지?
뭔가 이것도 이거대로 마음이 무거워지네.
그런데 그때였다.
냐아앙.
언제 다가왔는지 백설기가 발 근처에서 날 올려다보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내 손에 들려진 호떡봉투다.
“먹고 싶냐?”
냐아앙.
“한개만 먹어.”
그렇게 말하며 녀석에게 내밀자 호떡을 입으로 받으며 눈은 여전히 호떡이 들어있는 봉투 쪽을 향해있다.
“이건 안 돼. 덩치도 작은 놈이 왜 이렇게 욕심이 많은 거야?”
녀석은 호떡을 입에 물고도 여전히 미련이 남는지 내가 들고 있는 봉투를 바라본다.
“안된다니까 그러네.”
그렇게 말하며 호떡을 서둘러 내 입에 밀어 넣었다.
“앗, 뜨거!”
뜨거운 설탕물이 입가로 흐르자 놀라 펄쩍 뛰었다. 그 순간 먹던 호떡과 함께 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때였다.
“어?”
백설기가 자신이 물고 있던 것과 함께 봉투까지 입에 물고는 서둘러 도망쳐버렸다.
“얌마!”
호떡 6개를 샀는데, 5개를 백설기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진 호떡을 보고난 뒤 녀석이 사라진 곳을 보며 어이없는 웃음만 지었다.
“저, 망할 녀석.”
*
다음날 아침.
주문했던 가구들이 도착했다.
직원들이 집안에 가구들을 배치하는 동안 가족들이 화실로 찾아왔다.
박상식이 가족들을 데리고 온 것이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이후에 일부러 부른 것이다.
화실로 찾아온 가족들이 이곳저곳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다.
물론 박상식도 마찬가지.
“너는 말도 없이 혼자 이걸 준비한 거니?”
“가족이잖아. 이런 건 같이 해야지.”
엄마와 누나가 섭섭하다는 투로 말한다.
“실내 장식은 내가 직접 해보고 싶어서 그런 거야. 아무래도 사람이 많으면 내 생각대로 만들기 어려워서.”
그 말에 납득했는지 엄마와 누나가 머리를 끄덕인다.
“그나저나 방이 참 넓네. 벽지도 우리 집처럼 하얀색이라 깔끔하고.”
“앞으로 여기에서 선희가 그림을 그릴 거라는 말이지?”
“어.”
내 대답에 엄마가 눈물을 글썽거린다.
“참 듬직해졌구나. 우리 윤환이. 그동안 우리 선희 학교 졸업하고 어떻게 사회생활 할까 늘 걱정했는데. 이렇게 네가 곁에 있어주니까, 안심이 되는구나.”
그 모습을 본 누나가 엄마에게 찰싹 붙어서 말한다.
“엄마는 또 이렇게 좋은 날 왜 그래?”
“그러게, 주책없게.”
아아, 이런 건 정말, 도대체가 적응이 안 되네 진짜.
그런데 아까부터 실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던 경희가 책상 쪽으로 가서는 환하게 밝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와, 책상이 여러 개네? 여기 내 것도 있어?”
경희가 책상을 이리저리 살피며 혹시나 하는 표정으로 날 돌아본다.
“왜 여기에 네 것이 있어?”
“나도 일 같이 할 거 아니었어?”
“너는 공부나 열심히 해.”
“이거 왜 이러셔. 전에 용철이 오빠 원고에 내가 화룡점정 찍었던 거 몰라?”
“화룡점정은 무슨.”
“오빠 해태 눈이야? 이런 고급 인력을 못 알아본다는 게 말이 돼?”
경희가 투덜거리자 내부 청소를 하던 누나가 등짝을 찰싹 때린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어서 청소나 해. 저기 선희도 열심히 청소하고 있잖아.”
“아따따그······, 언니는 정말······. 선희는 원래 청소광이잖아!”
경희가 등짝이 아픈지 요란하게 몸을 흔들며 버럭 한다.
그 사이 박상식과 나는 가구배치를 조금씩 옮기며 정리해 나갔다.
그렇게 몇 시간동안 정리를 마치고 나자 점심시간이다. 그래서 중국집에서 음식을 배달시켰다.
짜장면과 탕수육, 그리고 만두가 도착하자 거실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 모여 식사를 시작했다.
엄마가 음식들을 보며 걱정스럽게 말한다.
“너무 돈 많이 드는 거 아니니?”
“오늘은 모두 고생했는데 이 정도는 먹어야지.”
“그건 오빠 말이 맞아. 그리고 우리도 이젠 오빠 덕에 부자 되었으니까 이 정도는 먹어줘야지. 그나저나 오빠, 나 용돈 줄 거지? 아야!”
결국 누나에게 꼬집히고 말았다.
“넌 도대체 누굴 닮아서 그렇게 돈, 돈 그러는 거니?”
“아니, 일을 부려먹었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는 건 당연한 일이야. 특히 가족일수록 돈 문제는 깔끔하게.”
누나에게 꼬집힌 팔을 열심히 문지르며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는 곧 내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애교를 부린다.
“그렇지, 오빠?”
“그래, 알았으니까 마무리도 네 말대로 깔끔하게 해라.”
“옛 썰!”
손을 번쩍 들고 소리를 지르더니 짜장면을 후루룩 삼키듯 먹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본 누나가 한마디 한다.
“얘, 천천히 먹어. 체하겠다.”
“에헤헤.”
입 주위에 검은 짜장 국물을 잔뜩 묻히고 뭐가 좋은지 히죽거린다.
경희 곁에 있는 선희도 짜장면에 목숨을 건 사람마냥 폭풍흡입하고 있다.
곱빼기를 시켰는데도 부족해 보일 정도다.
쌍둥이들의 식성은 정말 놀라울 정도다.
먹는 모습을 보면 얘네들 정말 외국에 데려가서 푸드파이터로 훈련시켜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 망상을 털어낸 나는 곧바로 쌍둥이의 모습에 삼촌미소를 보내는 박상식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참, 형. 그 남자 있잖아. 전에 찾아왔던 이대봉이라는 사람.”
“이대봉? 그 스미스라는 사람?”
“제임스라고 하지 않았나?”
“스미스든 제임스든 그게 중요하냐? 아무튼 그 사람이 왜?”
박상식의 의외라는 표정으로 날 본다.
“부탁할 게 있거든.”
“부탁?”
“전에 전상길 선생님한테 듣기론, 그 사람 인맥이 넓다던데.”
“그래? 그럼 내가 따로 연락을 해 볼게.”
*
“흐응, 이거 참. 어쩐 일로 저를 다 불러주시고.”
집근처 다방에서 다시 만난 이대봉은 뭔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오랜만에 다시 만났는데 정말 이 인간, 잘생기긴 했다. 여자들이 줄을 서겠구만.
당장 이곳에 있는 다방 여직원도 계속 이대봉을 오며가며 힐끔거릴 정도니까 뭐.
그나저나, 진짜 이 인간 묘하고 소름 돋을 것 같은 표정만 안 지으면 좀 대화하기 좋겠는데.
잠시 미간을 찌푸린 내가 곧 입을 열었다.
“발이 넓다고 들었어요.”
내 말에 양손바닥을 비비더니 머리를 갸웃 둥하며 웃는다.
“아, 상길이 형한테 들었구나.”
“네.”
“뭐 내가 인맥이 좀 넓긴 하지요.”
그렇게 말하며 입을 가리고 웃는다.
“그럼, 부탁하나만 해도 돼요?”
“당연하죠. 윤환 씨 부탁인데.”
“펜선 능숙한 분 구할 수 있어요?”
“펜선? 펜선맨, 말이에요?”
“네. 되도록 경력이 좀 되는 분으로.”
그 말에 이대봉이 턱을 괴고는 씩 웃으며 나를 바라본다.
“흐응, 사람을 키우고 계시는구나. 실력이 좋은가 봐요?”
“구할 수 없어요?”
“당연히 있지. 그 정도야 뭐.”
“그럼 부탁 좀 할게요.”
“그 대신, 조건이 있는데.”
뭐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다. 다만 말도 안 되는 엉뚱한 걸 원하는 거라면 포기할 수밖에.
“뭔데요?”
“이제 우리 좀 친하게 지내면 안돼요?”
“네?”
내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는 경계하듯 되물었다.
“아니, 이렇게 존칭 쓰지 말고, 서로 친하게. 내가 형이잖아요. 그러니까 나한테 형이라고 불러주면 안되나? 아니다, 형보다는 제임스가 나아. 그리고 나도 그냥 윤환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서로 말도 트고.”
“그게······, 조건이라고요?”
“네엥.”
이대봉이 장난스럽게 대답한다.
그 모습을 본 내가 어이없어 하는데, 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갸웃한다.
“어? 이 조건 싫어요?”
“아뇨, 그 정도로 만족한다면야. 저야 좋죠.”
“오케이! 그럼 우리 지금부터 트는 거야. 윤환아. 너도 이제부터 제임스라 불러. 서양에서는 형, 동생끼리도 이름 부르잖아.”
“그냥 형이라고 부를게.”
“제임스로 불러줘.”
“싫어.”
이상한 거래라는 생각에 혀를 찼다. 하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순진한 구석이 있는 재미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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