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56화 (56/425)

삼사라(SAMSARA) (3)

- 뭐? 2차 판권에 대한 계약서?

“네. 연재만화에 대해서는 그냥 구두 정도로 계약이 가능하지만, 2차 판권은 꼭 계약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 음, 그래?

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그러더니 잠시 후 팀장이 입을 열었다.

- 일단 그 문제는 내가 편집장님과 잘 얘기해볼게. 아마도 편집장님 선에서도 해결되지 않을 테지만.

“그렇겠죠?”

- 당연하지. 그런 판권문제는 그리 간단한 게 아니야.

일반적인 신인이었다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소리였을 텐데, 확실히 이번 작가에 대해서는 팀장도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만큼 그림과 스토리는 매력적이었으니까.

- 지금 호텔이지?

“네.”

- 내가 이야기 해보고 전화 줄 테니까, 어디 가지 말고 기다려.

“알겠습니다.”

딸깍.

호텔 데스크에서 전화를 끊은 지로가 라운지 쪽으로 걸어갔다.

“2차 판권이라······.”

지로도 이제까지 이런 계약서를 만들어 본 일이 없다.

사실, 일본에서는 아직 계약서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그리 활발하지 않다.

원고료마저도 만화가마다 일정한 것이 아니었고, 편집자들은 담당 만화가들에게 다른 작가의 원고료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따지지 않는다.

그런 사정은 비단 출판사 직원뿐만 아니라, 만화가들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을 출판사에게 맡겨왔고,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일종의 금기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한국도 사정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들었다. 아니, 오히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일본보다 더 뒤떨어져 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이윤환이라는 사람은 이 계약서를 꼭 필요로 했다.

스토리 자체도 놀랐지만, 저런 식의 계약이라니······.

계약에 대해 까다롭다는 미국도 이정도 일까?

물론 스타워즈를 감독한 조지 루카스도 이런 계약을 통해 엄청난 거부가 되었다는 얘기쯤은 들었지만.

아무튼 이윤환이라는 사람에게는 뭔가 특별함 같은 게 있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

미쯔다쇼텐 부사장실.

“2차 판권 계약서?”

“네. 반드시 그건 했으면 한다고.”

“다른 신인들이 이런 요구를 해온 경우가 있었나?”

“신인은커녕, 기성 작가들조차 이런 요구를 해온 경우는 처음입니다.”

“당돌한 케이스라는 거군. 맞나?”

“네. 그렇습니다.”

“그래 자네 생각은?”

주간소년 히어로 편집장의 보고를 받은 미쯔다쇼텐의 부사장 스즈키 노부히데가 머리를 끄덕이며 묘한 표정으로 편집장에게 되물었다.

“제 생각보다는······.”

“자네가 그렇게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신인이 아닌가. 그러니까 자네 생각을 말해보게.”

부사장의 말에 머뭇거리던 편집장이 곧 입을 열었다.

“일단, 2차 판권이라는 것이 앞으로는 굉장히 중요해질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만. 그 보다 중요한 건 역시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만들어 내는 작가는 더 중요하죠. 그래서······.”

“자자, 쓸데없는 얘기는 접어두고, 본론만.”

“······2차 판권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올 정도가 실제로 벌어지게 된다면, 이미 대단한 인기작을 만들어냈다는 뜻이 되겠지요. 더불어 그런 작가를 보유한 잡지라면, 그 인기야 말하지 않아도 알만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대단한 작품을 만들지 않으면 의미 없는 계약서라는 뜻이군.”

그 말에 편집장이 어색하게 웃었다.

너무 단조롭게 해석한 탓이다.

“지금 일본의 계약방식은 작가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인기작이 나오면 출판사가 작품에 대한 권리를 좌지우지하죠.”

“그건 출판사에게 유리한 게 아닌가?”

“당장은 그렇게 보일수도 있습니다만, 후에는 그것이 출판사의, 아니 출판계 전부의 발목을 잡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 이해가 안 되네, 어째서 지?”

“그저 평범한 작가일 때는 상관없습니다만, 인기작가가 되고 난 뒤엔 그것이 불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그로인해 출판사와 등질수도 있습니다. 인기작가 한명이 잡지판매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물론 엄청난 단행본 판매와 2차 상품 판매로 인해 출판사의 규모를 좌지우지 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보면, 나중엔 큰 손실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겁니다.”

“그건 너무 멀리 간 거 아닌가?”

“아닙니다. 벌써 인기 잡지들에는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부사장이 몸을 소파에 기대며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린다.

“그러니까, 자네는 신인뿐만 아니라 출판사 자체에서도 이런 계약은 필요하다는 거로군.”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미래라······, 답답한 임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텐데 말이지. 사장님이야, 뭐 특별히 이런 문제까지엔 관여하지 않으실 거고······.”

부사장이 깍지를 낀 채 잠시 동안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그리고는 곧 머리를 끄덕이더니, 편집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자네 뜻대로 해보게. 책임은 내가 질 테니까.”

부사장의 말에 편집장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곧 머리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

호텔의 로비에 앉아 있는 지로에게 호텔직원이 다가왔다.

“아카기 씨. 기다리시던 전화입니다.”

“아, 고마워요.”

지로가 서둘러 프론트 쪽으로 다가가자 기다리던 여직원이 수화기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지로가 대답했다.

“네. 아카기입니다.

그 순간 수화기너머에서 팀장의 소리가 들려왔다.

- 부사장님의 허락이 떨어졌어.

“부사장님이요?”

- 그래. 편집장님이 직접 가서 허락을 받은 거야. 그러니까 얼른 계약서 써주고 원고부터 빨리 받아와라.

“빨리라니, 무슨 뜻입니까?”

“아, 내가 설명하는 걸 잊어버렸다. 며칠 전에 소노다 선생님의 만화가 연재 종료되었어. 이번 주는 단편작으로 자리를 채울 거지만, 당장 다음 주면 한자리가 비게 돼. 어쭙잖게 신인작품을 2주 연속으로 싣는 건 별로 좋은 것도 아니라서, 되도록 빨리 원고를 받아와야 할 것 같다.”

“그럼 기간은 일주일입니까?”

“그래. 딱 일주일. 그러니까 잘 이야기하고 원고를 받아오도록 해.”

“하지만 갑자기 이렇게 일정을 빡빡하게 잡으면 곤란해 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진다. 그리고는 곧 조용한 어투로 말해왔다.

- 아카기.

“네?”

- 작가라는 건 말이야 계약과 동시에 프로라고. 거기다 우리는 주간지야. 연재를 시작하게 되면 매주 끝날 때까지 매주 연재마감을 겪어야 되는 일이야. 그런데 첫 번째 원고를 일주일 만에 해오지 못한다는 게 말이 돼? 물론 재능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결국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어차피 이 업계에서 버텨내지 못해. 그리고 그런 것은 작가 스스로 감당해야 할 일이지 편집자가 대신 걱정해주는 게 아니라고. 물론 도와주는 게 우리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지.

그 말에 지로의 얼굴을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는 곧 머리를 끄덕인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얘기를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 그래.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독촉하지는 말고.

어떻게 말해도 독촉이 될 것이다.

그래도 상급자의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 그럼, 수고.

그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이제는 본격적인 마감전쟁을 매주 치러야 할 것이다.

***

지로를 만나기 위해 선희와 내가 나와 있는 곳은 집과 그리 멀지 않은 도로변의 제과점이다.

“일주일 만에 완성하라고요?”

내가 놀란 음성으로 되묻자 지로가 굳은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인다.

“네. 갑작스럽기는 합니다만, 사정이 그렇게 됐습니다. 제가 아직 회사의 모든 사정을 파악하지 못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지로가 앉은 자리에서 머리를 숙인다.

이런 모습은 뭐랄까, 일본인답기는 한데······. 주변에 사람들이 힐끔거리는 걸 보니 영 불편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내 곁에 있는 선희는 눈앞에 있는 빵과 우유를 먹느라 정신이 없다.

“아뇨, 그런 것을 탓하려는 건 아니고요. 뭐, 그렇게 결정이 난거라면 하는 수 없죠. 어차피 주간지 마감에 대한 건 이미 생각하고 있던 부분이기도 하니까요.”

“이해 해주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이건 말씀하신 계약서입니다. 대략적인 부분은 거의 명시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혹시라도 빠진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눈앞에는 일본에서 보내온 팩스로 프린팅 된 계약서가 놓여 있다.

그래도 이런 계약서가 오려면 이런저런 트러블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별다른 조건도 없으니 의외긴 하다.

그만큼 우리에게 거는 기대가 커서 그런 걸까?

하기야 선희 정도의 그림이면 그것만으로도 미래가 기대되긴 하겠지.

물론 내가 만든 스토리도 이 시대에서 보면 혁신적일 테고.

그렇다고 해도 출판사가 이렇게 빠르게 받아들인 건 좀 특별하긴 하다.

미래의 일본 출판사들도 이런 문제에 대해선 보수적이랄까, 꽉 막힌 구석이 많았는데 말이지.

그런 잡생각은 이내 툴툴 털어버리고 눈앞에 있는 계약서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내가 있던 시절에 자주 보던 긴 계약서와는 달리 필요한 것만 작성되어있어 보기에도 깔끔하다.

2차 판권에 대한 건 내 요구대로 하겠다는 것도 분명하게 명시되어있다.

그다음은 보통 구두계약의 일반적인 내용들이다.

계약서의 내용을 꼼꼼하게 다 살펴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정도면 괜찮군요.”

내가 웃으며 말하고는 사인과 함께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그 옆 자리에 선희가 먹던 빵을 내려놓고는 손을 휴지에 슥슥 딱은 후 이름을 쓰고 며칠 전에 만든 옥도장으로 정확하게 겨냥하고는 꽉 찍는다.

그 모습을 본 지로가 이제야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이 양반, 꽤나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럼, 원고는······.”

“네. 알겠습니다. 일주일 안으로 완성하죠.”

그렇게 말하고는 선희 쪽을 바라본다.

“이야기 들었어?”

“일주일?”

“그래. 어때?”

“괜찮아.”

내 말에 곁에 앉아서 롤케잌을 오물거리며 먹는 선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나저나 경희가 없으니까 조용해서 좋긴 하네.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편집자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뭔데요?”

“만약 계약을 할 경우, 작업은 어디에서 하실 생각이신지······.”

“아, 그거요. 당연히 한국에서 할 겁니다.”

“한국에서요?”

“네. 선희는 이제 고등학교를 들어가야 하는데, 일본으로 갈수는 없잖아요.”

“아, 그렇군요.”

납득은 하는 모양인데, 걱정은 되는 모양이다.

뭘 걱정하는 지는 대충 감이 온다.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일본에서는 편집자와 만화가의 교류를 굉장히 중요히 합니다. 그래서 정기적으로 선생님 두 분을 찾아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한국에 있으면 그게 쉽지 않아서요. 거기다 권두 컬러라거나, 이벤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힘들게 됩니다.”

아무래도 인기 순으로 연재의 수명이 왔다갔다하다보니 권두컬러 같은 이벤트는 굉장히 중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일단 그 문제는 차후에 생각해야죠. 인기가 없다면 애초에 기회조차 없을 테니까.”

“그렇긴 하네요.”

그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뭘 생각했는지 눈이 살짝 커진다.

“그나저나, 선생님은 어떻게 일본만화 출판계 사정을 그렇게 잘 아십니까?”

“뭐, 이래저래 주워들은 거예요.”

“일본에도 인맥이 넓으신가 보군요. 어쩐지.”

어쩐지는 무슨.

설명하기 힘드니까 하는 소리지.

뭐, 어쨌건 스스로 납득하고 있으니 다행이다.

“일단 삼사라에 대한 계약문제는 되었으니 일주일 후에 원고를 받으러 오겠습니다. 혹시 중간에라도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이쪽으로 전화주시면 됩니다.”

그가 머물고 있는 호텔 전화번호다. 그곳에 묵고 있는 방 번호가 볼펜으로 쓰여 있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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