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55화 (55/425)

삼사라(SAMSARA) (2)

역시 결정이 난 모양이다.

자세한 건 경희에게 말했을 리도 없고.

그나저나 일이 어떻게 결정이 났을지 궁금하다.

“오빠, 무슨 음식 준비해야 해? 일본 사람들은 뭘 잘 먹어?”

“그런 걸 갑자기 왜 준비해?”

“지금 집까지 찾아온다잖아.”

“뭐?”

몇 시간 후, 일본인 편집자를 박상식이 직접만나 그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들어온 그가 내부를 보며 감탄한다.

“집이 깔끔하고 이쁘군요.”

“이사한지 며칠 안됐거든요.”

“아. 그렇군요. 혹시 전화는······?”

“네. 이사하면서 같이 달았어요.”

전화 놓는다고 거금 좀 들였다.

편집자가 새집 전화번호를 조그마한 수첩에 적는다. 그리고는 뭔가 아담하고 예쁜 종이상자를 내밀었다.

“이거.”

“이게 뭡니까?”

“아, 네. 화과자라고 일본전통과자입니다.”

“고맙습니다.”

일본만화에서 이런 거 주고받는 건 많이 봤지만 직접 이렇게 받아보는 건 처음이다.

상자를 받아 경희에게 건네주자 애가 신기해하며 계속 상자를 들고 이리저리 살핀다. 하지만 조심스러운지 선뜩 열지는 못한다.

“열어보셔도 됩니다.”

“진짜요?”

“네.”

편집자의 말에 초롱초롱한 눈으로 날 돌아본다.

“알았어. 그렇게 해.”

“오케이!”

그렇게 말하더니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어본다.

그랬더니 나무로 만들어진 곽이 보이고 그 안에 20개의 아기자기하면서 알록달록한 색의 과자들이 눈에 들어온다.

“와아, 진짜 예쁘다!”

“좀, 조용.”

“아, 미안.”

그렇게 말하더니 과자를 보며 신기해한다. 곁에 있던 선희에게도 슬쩍 보여주며 ‘엄마랑 언니 오면 같이 먹자.’라고 말한다. 그러자 선희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아참, 이것도 좀 가져와봤습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보다야 일본에서 많이 사용되는 거고, 또 구하기도 쉬울 것 같아서.”

커다란 8절지크기의 얇은 상자를 또 내밀었다.

“이건 또 뭡니까?”

“스크린톤입니다.”

“아, 그렇군요.”

“역시 스크린톤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군요.”

역시라니, 뭔 말이지?

이 양반 혹시 나에 대한 특별한 선입견이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곧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표정관리를 하며 끄덕였다.

“네. 요즘은 스크린톤을 점점 많이 사용하는 게 흐름이니까요.”

“맞습니다. 예전엔 그냥 스크린톤을 단순하게 사용했지만, 최근엔 스크린톤 사용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하는 만화가들도 많이 생겨났거든요.”

편집자의 말 대로였다.

만화에 좀 더 많은 묘사를 할 수 있게 한 스크린톤의 묘사법이 이시기 많은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80년대 초부터 스크린톤을 이용한 화려한 그림을 구사하는 만화가들이 일본에서 하나둘 생겨나던 시기라 스크린톤에 대한 수요도 점점 늘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이 시절 한국의 만화에선 아직 스크린톤 사용기법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나마 프로만화가들이나 조금씩 사용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거기다 스크린톤이라는 것이 100퍼센트 일본 수입품이라 상당한 고가품이기도 해서 마구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것을 직접 가져올 정도면 이 편집자가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제법 있다고 봐야한다. 아니면 특별히 우리 쪽에 대한 조사를 따로 한 것인지도 모르고.

어쨌건 이런 부분까지 신경 쓰는 걸 보면 꽤나 믿음이 가긴 한다.

“그럼, 연재 결정은 난겁니까?”

내 질문에 그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뭐지? 저 알 수 없는 표정은.

“······제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요?”

“네.”

그렇게 대답하더니 명함을 한 장 내민다.

“왜 다시······, 어?”

그런데 명함이 전에 봤던 거랑 다르다.

“······미쯔다쇼텐? 주간소년 히어로? 어? 이직하셨어요?”

“아, 네.”

그렇게 말하며 쑥스럽다는 표정을 어색하게 웃는다.

“스카우트입니까?”

“아하하, 그렇게 요란한건 아니고요. 실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일본으로 돌아가 선희의 데생원고와 콘티노트를 출판사로 가져갔던 일, 그리고 편집장이 했던 말과 여러 가지 수모를 겪은 일까지.

그 말을 듣고 있는 내내 짜증이 치밀었다.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니.

이 시절, 일본사회 내에서의 한국인, 혹은 교포2세에 대한 차별이 많았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간접적으로나마 겪고 보니 좀 황당하다 싶은 생각도 든다.

그래도 나름 외적으로는 선진국인 나라였고, 만화에서 만큼은 뭔가 특별하지 않았을까했는데, 역시 그 정도였나 싶다.

물론, 그런 회사만 있을 리도 없고, 그런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닌 건 사실이지만. 사실, 토부라는 그 편집부에서도 편집장이 독단적인 결정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었으니까.

역시 대가리가 멍청하면 그 파급력은 그야말로 메가톤급 재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는 사건이다.

하지만 그 이후, 대학교 선배가 일하는 출판사로 이적해간 과정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아카기 지로라는 이 사람에 대해 미안한 마음과 함께, 또한 고마움도 생겨났다.

“저희 때문에 여러모로 고생이 심하셨군요.”

“고생은요. 오히려 제가 두 분 선생님 덕에 세상을 좀 더 알게 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피식 웃었다.

그런데 어느 샌가 선희도 자기 방에서 하던 만화를 멈추고 거실로 나와 있다.

편집자 지로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혹시 제목은 정하셨습니까?”

“네. 삼사라(SAMSARA)입니다.”

내 말에 알겠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다.

“아, 윤회로군요.”

“네. 사실, 윤회보다는 반복이 된다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제목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동안 나눈 후, 그가 가방을 열어 전에 가지고 갔던 데생원고를 꺼내 내밀었다. 콘티노트야 복사해서 제본한 거라 돌려줄 필요가 없었지만, 데생원고는 다르다.

“이젠 이거 바로 완성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그것을 받아든 내가 바닥에 놓으며 말했다.

“이거 이젠 필요 없을 것 같네요.”

“네?”

“선희가 데생을 다시 해버렸거든요.”

그 말에 지로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라고요?”

“네.”

그렇게 말하고는 선희 쪽으로 머리를 돌렸다.

“아까 작업 중이던 건 다 됐어?”

내 질문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가져올래?”

내 말에 선희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서는 새롭게 만든 데생원고를 가져와서는 내게 내밀자 그것을 받아 다시 지로에게 건네준다.

“이, 이게 새롭게 작업한 데생······ 원고 입니까?”

“네. 한 번 확인해 보세요.”

“네.”

그렇게 대답한 지로가 조심스럽게 데생원고를 살핀다.

“내용과 대사는 같아요.”

“······그렇게 보이네요.”

그렇게 대답하고는 말없이 원고를 한 장씩 살펴간다.

앞전 데생원고와는 당장 비교가 될 테니 그 차이가 확연함을 분명 느낄 것이다.

그가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데생 모두를 살피던 그의 눈이 점점 커진다.

이 사람도 전에 그렸던 데생원고와는 전혀 다른 수준이라는 것을 눈치 챈 모양이다.

그런 그에게 내가 웃으며 물었다.

“놀랍죠?”

“······네. 그렇군요. 연출이 좋아졌군요. 그리고 캐릭터가 더 안정된 느낌이구요. 배경은······, 더 입체감이 있습니다. 동몽이나 아키라처럼 장소에 대한 입체감이 상당히 좋아졌어요.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동안 이렇게나 발전한 겁니까?”

“아직 초짜라서 그런가 봐요.”

“초짜······.”

지로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날 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렇겠지.

저런 실력을 초짜라고 말하는 내가 정신이 나간 걸로 보일 테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만화에서 만큼은 초짜가 맞다. 경험이 전혀 없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실력이나 다른 사람의 그림 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능력까지 생각해보면 일반적인 인간은 아닌 것이다.

“이것 참······.”

그렇게 중얼거린 지로가 다시 선희를 돌아본다.

하지만 그렇게 자꾸 봐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으니 결국 다시 원고를 내려다본다.

쟨 이럴 때라도 좀 반응해주면 좋은데.

하긴, 많은 걸 바랄 수는 없지.

“이제 본론을 말씀드릴까 하는데요.”

“네. 그러세요.”

“이번 신작, 출판사에서 큰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뭐, 직접 찾아온 것만 봐도 그 정도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개인적으로 두 분 선생님들을 모두 초청할 생각인데 어떠십니까?”

“초청요?”

“네. 혹시 일본에 오신 적이 있으십니까?”

“아뇨.”

이 시대엔 말이지.

물론 내가 살던 시대에선 여러 번 들락거렸지만.

물론 덕후로서의 유희 성격이 강했지만.

그런데 그때 경희가 눈을 반짝인다.

“오빠랑 선희 일본 갈 거야?”

하지만 정작 중요한 얘기는 빠져있다.

경희의 반응을 무시한 채 지로에게 물었다.

“그런데 계약서는 없습니까?”

“네?”

“계약서요. 작품을 잡지에 연재하려면 기본적으로 계약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 그게······, 저희 일본 출판계에서는 만화가와 계약서를 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이 부분은 편집자의 말이 맞다.

대부분 일본이 만화왕국이며 선진국이라는 생각에 이런 계약부분이 굉장히 발달되었다고 생각하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도 구두계약정도가 대부분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자국에서건 해외로 판권을 파는 과정에 고질적 문제가 발생하게 된 큰 이유가 되었다.

일본의 문화, 특히 만화 쪽 콘텐츠가 그렇게 발달했으면서도 2000년 이후 그렇게 해외활동이 미비해진 결정적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과거로부터 늘 만화가들은 모든 권리를 출판사에 맡겨두기만 하는 게 일반화 되어서 결국 훌륭한 콘텐츠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야말로 만화가들의 주 수입원은 단행본 판매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다.

아무튼 미래까지 이어질 일본의 고질적 문제야 지금 걱정할 일은 아니다. 어쨌건 지금은 지금 나름의 사정대로 갈 뿐.

“간단한 계약서라도 해주시면 좋겠는데요.”

“간단한 계약서요?”

“네. 2차 판권에 대한 것만이라도.”

“2차 판권이라시면.”

“뭐, 만화와 애니를 제외한 권리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명백히 애니도 2차시장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일본에서 애니로 인해 작가가 받을 수 있는 돈도 거의 정해져 있는 부분이라 이걸 요구한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앞으로 먼 미래에 나타날 일본 최고의 만화 ‘원피스’의 오다 에이치로가 TV판 애니로 편당 10만 엔, 그리고 극장판으로 100만 엔 정도밖에 받지 못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캐릭터나, 해외로 판권이 판매될 경우에 대한 것만 어느 정도 납득할만한 수준의 계약서면 됩니다.”

“······.”

편집자가 좀 당황한 모양이다.

그렇겠지.

그 정도 계약서를 편집자의 권한으로 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을 테니.

아무튼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편집자가 곧 입을 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여기서 확답을 드릴 수는 없겠군요. 팀장님이나 편집장님도 그 문제를 결정하실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일단 보고는 올려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그 부분에 대한 건 결정이 나고 난 다음에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가 납득했는지 머리를 끄덕인다.

“그럼 내일 다시 한 번 더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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