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54화 (54/425)

삼사라(SAMSARA) (1)

평발 스트라이커 새 에피소드가 대본소에 뿌려졌다.

이번에 출간된 2부는 기존의 1부 인기를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물론, 특별한 이야기라고 해봐야 경기 위주로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경기속의 극적인 묘사에 열심히 집중한 탓인지 꽤나 반응이 좋았던 모양이다.

덕분에 박상식에게 전상길이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하고 있었다.

“그건 윤환이에게도 잘 말해볼게요. 네. 네. 그럼, 수고하세요.”

박상식이 그렇게 말하더니 전화를 끊는다.

그 모습을 본 내가 의아한 표정을 물었다.

“뭘 잘 말해?”

“아, 전상길 선생님도 스토리의 중심이 너라는 걸 아니까, 네가 빨리 구상을 할 수 있게 내가 좀 많이 도와주라고.”

박상식이 그렇게 말하며 웃는다.

“어쩔 수 없잖아. 출판사에서 그렇게 독촉전화가 온다는데. 아무래도 돈독이 제대로 올랐나보다.”

“전 선생님이?”

내 질문에 박상식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출판사. 전 선생님도 작업속도는 더 이상 올릴 수 없다며 말해도 듣지를 않는데. 출판사는 만화가들이 그냥 그림을 찍어내는 기계쯤으로 아는가보다.”

“그 쯤 되면 찍어내는 속도는 맞지. 대본소용 만화를 공장만화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잖아.”

“아, 그런가?”

박상식이 눈알을 굴리더니 피식 웃는다.

그래도 덕분에 들어오는 현금이 많아서 매일, 매일이 행복한지 늘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있다.

“그런데 이번 3부도 이미 이야기는 다 만들어졌잖아. 콘티는 내가 조금 더 서두르면 되는데 왜 천천히 보내라는 거야? 저 쪽도 급하니까 저러는 건데.”

“형도 좀 조절하면서 작업해. 그러다 몸 완전히 망가져. 그리고 계속 그런 식으로 넘겨주면 나중엔 당연하게 여기게 된다고. 그럼 형만 고달파져. 화실이야 여러 사람이서 분담해하는 작업이라 그렇다 쳐도 형이나 나는 아니잖아.”

“······그런가?”

박상식이 표정을 묘하게 짓는다.

납득을 한 건지 안한 건지 모르겠네.

“그러니까. 돈 욕심도 좋지만 몸 생각하면서 작업하라고.”

내가 한 번 더 다짐을 시키듯 말하자 박상식이 머리를 끄덕인다.

“그래. 알았다.”

“그런데 콘티작업, 보통 때처럼 하면 언제 마무리 될 것 같아?”

“대충 모레정도면 완성될 것 같다.”

“그럼, 하루 정도 더 있다가 넘겨줘.”

“그건 또 왜?”

“그냥. 그렇게 줘. 여유 있게.”

“알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유는 무슨. 너무 끌려 다니지 말라는 거지. 돈도 이제 좀 벌었으니까, 몸 좀 생각하면서 해.”

“알았다, 알았어.”

나도 최근 이사를 한 덕분에 가진 돈을 몽땅 탈탈 털렸는데, 또 목돈이 들어오고 있어서 다음 계획을 실행하기가 더 수월해졌다.

다음목적이야 당연히 화실을 구하는 거다.

본격적으로 선희와 함께 만화를 해나가려면 작업실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실, 선희 혼자서는 연재만화를 해나가는 건 무리다.

물론 선희가 만화에 재능이 있고, 혼자서도 감당할 만큼 빠르다는 건 인정하고 있지만, 어쨌건 이젠 선희도 고등학생이 된다.

집에서야 따로 공부를 하지 않아도 성적이 잘 나온다 해도 어쨌건 학교생활을 하는 이상 늘 시간이 부족한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선희에게 혼자서 작업을 시키는 무식한 짓을 시키고 싶지도 않고.

어쨌건 작가로 시작하려면 작업 공간과 함께 도와줄 어시 정도는 있어야 한다.

선희는 메인작업인 데생에만 열중해야 앞으로 연재가 가능하다는 것이 지금의 내 생각이다.

그렇게 잡다한 생각에 빠져있는데 박상식이 나를 툭 친다.

“왜?”

“뭔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앞으로의 일 때문에.”

“넌, 다 좋은데 너무 생각이 많은 것 같다.”

“내가?”

“어.”

그렇게 말하더니 곧 피식 웃는다.

“하긴, 그러니까 그런 대단한 이야기를 생각해 낼 수 있는 거겠지만.”

“······.”

별로 그런 건 아닌데.

그동안의 덕후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조합해서 만들뿐이니 박상식이 생각하는 것처럼 내가 특별히 대단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무리 덕후로서 라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야기를 그럴 듯하게 잘 만들어내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다. 이 짓도 계속하다보니 늘고 있는 것인지, 만들면 만들수록 완성도도 괜찮은 것 같고.

나 혹시, 애초에 그림보다는 이야기에 재능이 있었던 것일까?

그동안 기회가 없었을 뿐이라 빛을 못 본 것 뿐, 드디어 내 재능이······, 있었을 리 없지.

잘 나간다고 너무 붕 뜨지는 말자.

모르긴 해도, 그 고양이 덕분에 뭔가 이쪽에도 특별한 능력이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째 힘이 빠지네.

에효.

“왜, 한숨을 쉬냐?”

“아무것도 아니야.”

“역시 너도 스토리를 쓰는 게 부담돼서 그러는 구나. 하기야, 그 심정 알만하지.”

“······.”

“그나저나 일본 그 편집장은 원고 가지고 잘 돌아갔을까?”

박상식이 콘티 작업을 멈추고는 연필 뒷부분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모르지.”

솔직히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무런 연락이 없어서 그냥 맘 편하게 생각하고 있다. 어차피 내 손을 떠난 상태에서 인연이 닿지 않은 거라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며칠 동안 연락도 없는데, 일이 꼬인 건 아닐까? 아, 나도 참. 재수 없는 말을.”

박상식이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하는지 입을 손바닥을 찰싹 때린다.

“뭐, 나야 할 만큼 다했으니까, 기다릴 수밖에. 그리고 뭐 잘 안 풀리면 다시 기회를 만들어보면 되는 거지.”

“이럴 때 보면 넌 참 대범한 건지 아니면, 매사 모든 일에 감흥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이왕이면 대범한 걸로 해줘. 그게 듣기에도 좋잖아.”

내 말에 박상식이 웃으며 머리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벽시계를 올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점심은 뭐로 먹지? 먹을 게 라면밖에 없는데.”

“찬밥은 있어?”

“없는데.”

“그럼 집에 가서 찬밥 좀 가져올 테니까, 형은 라면 좀 끓여줘.”

“알았어. 내가 또 라면은 맛깔나게 끓이잖냐.”

박상식이 부엌에서 라면을 끓이는 동안 난 우리 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이동했다.

일명 신사용자전거로 불리는 이놈은 몸을 반듯하게 탈 수 있는 방식의 촌스러운 모델이다.

집이 가깝다고는 해도 천천히 걸으면 10분 거리다. 그래서 큰 마음먹고 자전거를 한 대 장만한 것이다.

내가 왜 큰마음을 먹었다고 말하냐 하면, 이시절의 자전거는 생각보다 비쌌기 때문이다. 기어가 없는 자전거인데도 말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폼은 정말 안 난다.

아무튼 집 앞에 도착,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자 마당에 처음 보는 아이가 놀고 있다.

5살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다.

어라? 이 녀석 누구지?

옆집에서 놀러온 건가?

“꼬마야. 너 누구냐?”

“······.”

아이에게 다가가 쭈그리고 앉은 채로 물었더니 이 녀석, 놀란 눈을 하고는 곧바로 문 쪽으로 가더니 소리친다.

“누나! 누나!”

“누나?”

곧 문이 열리더니 여자가 머리를 빼곰 내민다.

갈색머리다.

어, 그런데 갈색이 아니네?

“왜 그래, 준모야.”

“누나.”

아이가 갈색머리, 이젠 아니지만. 아무튼 여자에게 매달린다.

전에 경희가 이름을 말해줬던 것 같은데······, 성준희라고 했었나?

그나저나 저렇게 어린 동생이 있었구나.

“어. 왔니?”

“걔, 네 동생이냐?”

“어.”

“동생이랑 나이차이 많이 나겠네.”

“그래.”

누가 보면 갈색머리, 아니 성준희의 아들이라고 하겠다.

물론 예의 없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그런데 너 우리 집엔 어쩐 일이냐?”

“아, 그게······.”

그때 경희가 문을 열고 나온다.

“오빠 왔네?”

“어. 그런데······.”

“아, 준희 언니? 전에 만났을 때 오늘 집에 놀러오라고 했었거든. 오늘 엄마도 절에 가셨고, 언니도 공부하느라 바빠서 집엔 선희랑 나뿐이잖아.”

“그랬냐?”

그렇게 말하면서 성준희와 그녀의 다리를 붙들고 뒤에 숨어있는 남자아이를 내려다본다.

저렇게 어린 동생을 돌보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오빠, 그런데 무슨 할 얘기 있는 거 아니었어?”

“아, 참. 찬밥 있냐?”

“찬밥은 왜?”

“상식이 형이 라면 끓이거든. 밥 말아먹게.”

“그거 가지러 일부러 온 거야?”

“그래. 있으면 빨리 줘. 얼른 가게.”

“아니, 그러지 말고, 온 김에 같이 밥 먹자. 상식이 오빠도 오라고 당장 전화할게. 이럴 땐 집에 전화가 있으니까, 정말 편하네, 히히.”

그렇게 히죽거리며 안방으로 달려간다.

그런데 아직 성준희의 다리에 딱 붙어서 머리를 처박고 있는 아이가 아직 내 눈치를 보고 있다.

“거, 자식 누나 닮아서 자알 생겼네. 자, 용돈.”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100원 짜리 동전을 내밀었다. 그러자 조그마한 녀석이 지 누나 눈치를 슬슬 살피더니 곧장 내게 다가와 동전을 받고는 배꼽인사를 한다.

“고마쓰미다.”

“오올치, 인사성도 좋네.”

내가 꼬마 녀석 머리를 쓰다듬었다.

“몇 살?”

내 말에 준모가 손가락 네 개를 펼친다.

“아, 네 살이구나.”

“새해 지났으니까 다섯 살이야.”

“그래?”

내가 준모의 머리를 쓱 쓰다듬고는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아이의 웃음소리에 문을 닫기 전에 돌아보니 동전을 손에 쥔 채로 뭐가 좋은지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는 성준희의 모습······, 진짜 엄마처럼 보이네.

곧 어깨를 으쓱 한 나는 거실로 들어가 쌍둥이 방 쪽으로 갔다.

똑똑.

노크를 하고는 문을 열자 책상에 앉아 열심히 그림에 몰두하고 있는 선희의 모습이 보인다.

“뭐하냐?”

“······그림.”

가까이 다가가서 봤더니 데생을 열심히 하고 있다.

“일본에 보낸 거 다음 편 그리냐?”

“아니 처음부터 다시.”

“엥? 갑자기 왜?”

“뭔가 어설퍼.”

“어디가?”

“그냥 느낌이.”

그렇게 말하며 연필을 빠르게 놀리고 있다.

이미 완성된 데생원고를 들어 살펴봤다.

이야기는 그대론데······, 과연 상당히 다른 느낌의 데생이다.

뭐지?

뭐가 달라진 거지?

기본적인 화면 배치도는 같다. 그런데 그림의 느낌이 달라져 있었다.

입체감이다.

그림에 입체감이 이전에 비해 압도적으로 강해져 있었다.

동몽과 아키라를 그동안 수도 없이 보고 파더니 결국 이런 느낌까지 만들어 버린 건가?

인체 캐릭터의 비율도 상당히 안정화 되어있었다.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림실력이 미친 듯 상승하고 있다. 아니, 얼마 되지 않았으니 발전이 빠른 건 당연한 건가? 처음부터 워낙 좋은 실력이다 보니 점점 실력이 무섭게 상승하는 모양이다.

거기다 더 놀라운 건 속도다.

데생에만 몰두하라고 했더니 데생 자체의 디테일이 상당한 수준까지 상승했다.

배경의 경우는 특징만 표현하고 세세하게 그리지 말라고 했지만, 그 특징만으로 것도 굉장히 디테일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손의 움직임은 엄청나다.

슥슥 대충 그리는 듯한 움직임이지만 놀랍도록 정확하게 그림이 완성되어가고 있는 모습이라 마치 기계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완성된 데생원고는 총 18페이지다.

지금 그리고 있는 건 19번째 페이지고.

“언제부터 그린거야?”

“아침밥 먹고 나서. 9시쯤부터”

시간을 확인해보니 대충 3시간 정도 흘렀다.

이렇게 디테일한 원고 18페이지 작업하는데 3시간이라······.

내가 알기론 이 기준을 일본, 그것도 노련한 작가로 비유해도 엄청난 속도다. 거기다 디테일까지 생각하면 인간이 아닌 것 같다.

집안에 괴물이 살고 있었구나.

어이가 없어하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며 경희가 뛰어 들어왔다.

“오빠! 오빠!”

“야야, 문 부서지겠다. 살살 열어? 전쟁이라도 났냐?”

“왔대.”

“오긴 누가와?”

“아니, 상식이 오빠가 그러는데, 방금 그 일본 아저씨한테서 연락이 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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