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한국인? (4)
“선배도 그렇게 생각하죠?”
“당연하지. 이걸 보면 누구나 똑같은 소리를 할 걸?”
“······.”
“아, 너희 쪽 보스는 아니구나.”
그렇게 말하며 코웃음을 치더니 곧바로 지로에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런데 어째 이거 번역이 왜 되다 만 거야?”
“말했잖아요. 시간이 부족해서······.”
야지마가 곧바로 지로의 멱살을 움켜쥔다.
“당장 해!”
“네?”
“당장 하라고!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가 끊기니까 변을 보다만 것 같이 개운하지 않아.”
“······.”
“당장!”
“네······.”
결국 야지마의 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결국 번역작업에 들어갔다.
그러자 지로의 실시간 번역작업을 곁에서 지켜보던 야지마가 ‘오, 오.’하는 감탄사를 내며 바라본다.
그런 야지마의 반응에 지로가 인상을 썼다.
“이럴 거면, 그냥 말로 할게요.”
“그냥 써. 글로 읽는 게 훨씬 감정 몰입이 잘 되거든. 그러니까 어서, 어서.”
계속 하라는 듯 손을 휘적휘적 거린다.
“나 참.”
혀를 찬 지로가 하는 수 없다는 듯 계속 번역작업에 몰두한다.
그리고 몇 시간이 흐른 뒤 모든 번역이 끝나자, 그것을 계속 지켜보던 야지마가 아쉽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여기까지군.”
“네. 여기까집니다.”
“스토리는 계속 작업하고 있겠지?”
“아마도요.”
“너 이 자식!”
갑자기 야지마가 다시 지로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아 진짜, 또 왜 이래요?”
“너란 녀석은 이런 대단한 실력을 가진 남매를 발견하고도 그런 쓸데없는 생각에 빠져있었던 거냐?”
흥분한 야지마가 부르르 떤다. 그런데 어쩐지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하다.
“왜 또 울고 그래? 그런 거 좀 하지 말라니까.”
“그러니까 이직하라고, 이직! 지금 세상에서 평생직장이 상식인 건 알지만, 그것도 직장 나름이지. 거긴 네가 있을 곳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또 그 얘깁니까?”
“고민은 그만하고, 이거 가지고 내일 같이 우리 출판사로 가자.”
“말도 안 되는 소리마세요.”
“넌 도대체 뭣 때문에 출판사에 입사한 거야? 어?”
“······.”
“너도 꿈이 있잖아. 그런데 그걸 회사가 방해하면 그만둬야지, 왜 목을 매?”
“선배는 너무 급진적인 거 아닙니까?”
“네가 너무 구식인거지. 나도 힘들다, 힘들다 하면서도 여기 있는 건 그래도 즐겁기 때문이야. 이렇게 일을 더럽게 하는 곳이 즐겁기라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까운 인생을 이곳에 왜 허비해? 돈? 남은 인생을 회사가 책임져 줄 거라고 생각해?”
“······.”
고민하는 지로를 보더니 야지마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가져온 봉지 속에서 맥주와 안주들을 꺼내며 말했다.
“인생은 짧다. 그러니까 잘 생각해.”
“자자, 일 얘기는 그만하고 맥주나 한잔해요.”
“그러자.”
***
“그 얘기 어제 끝난 게 아니었어?”
아침부터 어제의 그 네임을 들이미는 지로 때문에 편집장의 얼굴에 짜증이 일었다.
하지만 지로는 어떡하든 편집장을 설득하고 싶었다.
“편집장님, 제발 이 네임이라도 한번 읽어보시고······.”
“이번 신인은 그냥 포기하라고 했잖아. 넌 네 일이나 똑바로 하란 말이다.”
“편집자는 이런 재능 있는 사람을 발굴하는 게 일이잖아요.”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부편집장이 다가오더니 지로의 팔을 붙잡았다.
“자네, 왜 이렇게 경우가 없어? 편집장님에게 이게 뭔 짓이야?”
“그 자식, 어제 그렇게 말했는데도 저 모양이라니까.”
“부편집장님이라도 네임을 한 번 읽어봐 주세요. 그럼 제 마음을 이해하실 겁니다.”
그 말에 부편집장이 편집장의 눈치를 살핀다. 그리고는 곧바로 인상을 썼다.
“한국인이라며.”
“네. 맞습니다.”
“그럼 편집장님 말씀대로 하는 게 맞아.”
“네? 국적보다는 작품이 먼저 아닙니까?”
“하지만 현실은 아니야. 거기다 지금 한국에 있는 사람이라며. 일본으로 건너오겠대?”
“아뇨, 아직 거기까지는 얘기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말에 부편집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차라리 잘 되었군.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고, 자네가 약속한 것도 없다면.”
“네?”
“자자 이제 그만 포기해. 도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목을 매는 거야?”
“방금 말씀드렸다시피 네임을 보시면 제 마음을······.”
“그러니까 자네 마음 따윈 관심 없다는 거야.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
“왜 이렇게 상사한테 따지는 게 많아? 이 친구 팀장 누구야?”
그때 마른 남자 한명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자네가 팀장이야?”
“아, 네.”
“자네는 부하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야?”
“죄, 죄송합니다.”
팀장이 머리를 숙인다. 그리고는 지로 쪽을 보며 제발 그만 좀 하라는 눈짓을 한다.
그 모습을 힐끔 보던 부편집장이 한 번 더 팀장을 야단치고는 곧바로 편집장에서 고개를 돌렸다.
“편집장님, 제가 나중에 한 번 야단을 칠 테니까, 이제 화 푸십시오.”
“크음, 뭐 자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편집장이 헛기침을 하고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자, 곧바로 부편집장이 라이터를 켜고는 그에게 내밀었다.
그 모습을 본 지로는 곧 그곳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뒤에서 편집장의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저 친구. 모친이 한국인이라고 했던가?”
“네.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쯧쯧, 그러니까 저렇게 나서는 거군.”
그 말에 머리가 멍해진다.
그나마 아버지는 일본인이라 그 정도가 심하진 않았지만, 지로가 아는 사람들 중엔 부모 양쪽이 한국, 혹은 북조선 출신이라 어릴 적부터 차별을 심하게 받으며 자라온 사람들을 제법 알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는 20살 성인이 될 때 국적 선택에서 일본국적과 함께 일본이름을 선택한다고 들었다.
그래도 자신은 그들과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아니, 그보다 왜 지금 저 얘기가 나와야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한국인인 게 뭐가 문제라는건가?
그때 팀장이 지로에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어이, 아카기. 우에다 선생님 댁에 가봐.”
“네? 담당은 고토 씨 아닙니까?”
“이 친구가 진짜, 지금 우에다 선생님 심부름 간 거 몰라?”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튼 지금 일손이 남는 사람은 자네뿐이니까 원고를 좀 받아와야겠어.”
“······알겠습니다.”
“갈 때 화과자 한통 사가는 거 잊지 말고. 우에다 선생님 화과자 좋아하시잖아. 얼른 가봐.”
“······네.”
지로가 가방을 메고는 느린 걸음으로 편집부를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계단을 터벅터벅 내려갔다.
온 몸에 힘이 몽땅 빠져나간 사람처럼 그의 몸은 허느적 거리고 있었다.
출판사 건물을 빠져나온 지로는 멍한 얼굴로 인근에 있는 화과자 가게로 들어갔다. 그리고 직원에게 돈을 지불하고 화과자 박스를 하나 고른 후, 다시 가게를 빠져나온다.
그리고는 여전히 혼이 빠진 듯한 모습으로 터덜터덜 걸어서는 버스정류장 앞으로 갔다. 그리고는 정류장 벤치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전히 아무런 생각도 없어보이던 그가 어느 순간 화과자 박스를 뜯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하나, 하나 입에 넣어 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스스로는 자신이 지금 무슨 행동을 하는지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마지막 편집장의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을 뿐이다.
‘저 친구. 모친이 한국인이라고 했던가?’
‘쯧쯧, 그러니까 저렇게 나서는 거군.’
출판사에 입사해 2년 가까이 정말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일해 왔었다.
그동안 회사에서 겪었던 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그중엔 그래도 뿌듯한 일도 몇 번 있었고, 편집자가 된 것이 다행이라 여겼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화과자를 입에 쑤셔 넣던 그가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 번호도 확인하지 않은 채로 올라탄다.
그리고는 빈 의자로 다가가 앉는다.
잠시 후 정신을 추스른 지로가 자신의 손에 들려진 상자를 확인했다.
대부분의 화과자는 이미 사라지고 두 개만 남아있다.
그것을 보고도 별로 놀라거나 하지도 않는다.
잠시 박스를 내려다보던 그는 남은 두 개마저 입안에 털어 넣고는 곧바로 버스에서 내렸다.
그리고는 곧 멈칫하며 눈앞에 보이는 것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어?”
순간 자신 앞에 있는 건물을 올려다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여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전혀 예상치 못한 장소로 와 버린 것이다.
“미쯔다쇼텐?”
눈앞에 있는 건물은 미쯔다쇼텐의 건물.
바로 대학교 선배인 야지마가 일하는 주간소년 히어로 편집부가 있는 곳이다.
“······.”
*
“어? 이 시간에 어쩐 일이냐?”
야지마가 편집부 사무실에서 나오며 지로에게 물었다.
“······뭐, 그냥 지나가다가.”
“너희들 시간이 널널한가 보구나, 이런 바쁜 시간에 남의 회사까지 놀러온 걸 보면.”
그렇게 말하는 야지마의 눈이 웃고 있다.
대충 상황을 눈치 챈 모양이다.
“뭐, 일단 왔으니까 음료수나 한잔하자. 뭐 마실래? 커피, 우롱차?”
그렇게 말하며 야지마가 지로를 끌고 휴게실로 갔다. 그리고는 자판기 앞으로 가서는 자신이 마실 우롱차와 지로의 캔커피를 뽑아 의자에 앉아있는 지로에게 다가가 내밀었다.
야지마는 지로가 캔커피를 받자 곧바로 맞은편 자리에 앉아 우롱차 캔을 따 입안으로 털어 넣고는 주저리주저리 떠들기 시작했다.
“너도 알겠지만, 편집자란 게 중간에 끼여서 머리가 터지는 존재잖아. 만화가와 독자들 사이에서 말이야. 내가 담당하는 선생님은 말이야······.”
“선배.”
“······어?”
“이거, 선배가 맡아주세요.”
지로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가방에서 서류봉투를 꺼내 야지마에게 내밀었다.
“······.”
“선배라면, 이 두 분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더니 묘한 표정이 된다.
그런 지로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던 야지마가 한숨을 푹 쉬더니 곧 입을 열었다.
“야, 지로.”
“네?”
“너 이렇게 무책임한 놈이었냐?”
“······네?”
“네가 책임을 지겠다고 약속했다며? 그런데, 이렇게 쉽게 남에게 넘겨줘도 되는 거야?”
“······선배라면 괜찮아요.”
“정신 나간 소리 하고 있네. 나도 남이야, 남. 거기다 그 두 사람에게 그렇게 큰 소리치고 왔다면서, 이렇게 포기해도 되는 거냐고!”
“······하지만.”
“헛소리 말고 따라와.”
그렇게 말하더니 억지로 자신을 끌고 편집부로 데려간다.
이곳 주간소년 히어로의 편집부도 토부처럼 직원들이 바쁘다. 하지만, 토부와는 사뭇 다른 공기가 흐른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런 와중에 야지마가 지로를 데리고 누군가의 자리로 다가갔다.
“팀장님.”
“야지마. 나 바쁘니까 도와줄 거 아니면 귀찮게 하지마라.”
“이거 좀 봐줘요.”
그렇게 말하며 지로가 줬던 서류봉투를 팀장이 책상위에 내려놓는다.
“이게 뭔데?”
“일단 봐요.”
“귀찮게.”
그렇게 말하면서도 호기심이 생기는지 서둘러 서류봉투를 열어본다.
먼저 데생원고를 꺼내 턱을 긁적이며 한 장씩 넘겨본다.
그러더니, ‘흐음, 호, 음.’ 이라고 감탄사를 몇 번 연발 한다
어쩐지 이 모습은 야지마와 닮은 것 같다.
그런데 팀장이라는 사람이 마지막장을 다 봤는지 곧바로 머리를 번쩍 들어올린다.
“이거 도대체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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