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51화 (51/425)

뭐, 한국인? (3)

“어? 그런데 분명 대사는······.”

“제가 번역한 겁니다. 비행기 안에서.”

“자네가?”

“네. 어차피 한글로 써진 거라 제가 번역하지 않으면 못 알아 볼 테니까요.”

지로의 말에 편집장이 기억났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다.

“······아, 그래. 자네가 한국어를 잘했지.”

“그런데 편집장님은 어떠세요?”

지로의 질문에 멍한 표정을 짓던 편집장이 곧 정신을 차렸다.

“아, 그래. 뭐, 흥미로운 작품이었어.”

“그렇죠? 전 처음 보고 엄청 놀랐습니다. 꼼꼼함이야 의욕적인 신인들에게서 자주 보이는 모습이지만, 연출, 장면묘사부분은 신인답지 않았어요.”

“그렇긴 하더군.”

하지만 편집장의 표정이 좀 묘하다.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지로도 알 것 같았다.

아마도 한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요즘 실력 있는 만화지망생이 부족한건 사실이지만, 한국인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일본에서 만화가 생활을 하게하려면 한국인들을 이쪽에서 초청해야하고, 또 수많은 출입국 서류까지 챙겨야한다. 이래저래 귀찮은 게 한두 가지 아닌 것이다.

그런 것들을 모두 감안하고 원고를 받아야 할 정도인가 하는 점이 미묘했을 것이다.

그림실력이 아깝기는 하지만, 역시 이래저래 생길 문제에 고민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이걸 한번 보시겠습니까?”

지로가 이번엔 노트 한권을 내밀었다.

“이게 뭐지?”

“네임입니다. 그 원고의 뒷이야기입니다.”

“뒷이야기?”

“네. 일단 한번 읽어보시겠습니까?”

편집장은 조금 못마땅한 표정으로 지로가 내민 노트를 받아 펼쳤다.

간단한 형식의 네임이다.

그림도 대략적으로 표현되었지만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대사는 한글로 적혀있지만, 그 밑에 파란색으로 번역되어 있다.

“이거도 자네가 한 건가?”

“네. 택시 안에서 매달리기는 했는데 시간이 부족해서 끝내지는 못했습니다.”

지로가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인다.

그런 지로의 말에 편집장이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는다.

“거참, 쓸데없는 짓을······, 자네가 번역가도 아니고 말이지. 편집자는 편집자로서의 일이 있는 거야.”

“그렇지만 이건······.”

“됐어. 자네 뜻을 알겠는데, 이건 좀 곤란해.”

“네?”

“너무 번거롭다고. 나도 그림이 훌륭하고 대단해 보인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굳이 한국인을 들여야 할 만큼 인재가 부족한 것도 아니잖아.”

“······하지만 지금 토부엔 히트작가가 부족하잖아요. 그러니까 재능 있는 신인을 발굴 육성해서······.”

지로의 말에 편집장의 눈썹이 휘말려 올라갔다.

“이봐, 편집장은 나야. 자네가 내 대신 그런 것을 고민해서 어쩌겠다는 거야?”

“······네?”

“쓸데없는 말 더 하게 하지 말고, 오늘 식자 수정할거 많으니까, 빨리 그것부터 해. 안 그래도 일손이 부족한데 자네까지 왜 그래?”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네임 노트를 테이블 위에 던져버린다.

“편집장님. 그래도 한번 읽어보시고······.”

“그만!”

결국 편집장의 버럭 하는 소리에 지로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편집장 앞에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그는 머릿속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분명 편집장도 대단한 신인을 발견했다는 사실에 기대감을 가지는 것처럼 보였었다. 그런데 한국인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곧바로 돌변하는 그의 태도라니.

도대체가 작품을 대하면서 국적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가?

대단한 신인이라면 한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잡지에선 최선을 다해 서포트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도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네임은 아예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원고들의 식자작업을 도와주면서도 계속 머릿속은 자신의 가방에 들어있는 원고와 콘티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이대로 놔두면 남매와의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저런 재능이라면 언젠가 분명 두각을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더 이상 자신은 그들 곁으로 다가갈 수가 없게 된다.

편집자의 꿈을 가지고 일을 시작할 때만해도 주변 동료들과 달리 자신에겐 나름의 포부가 있었다.

훌륭한 재능을 가진 만화가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발굴해, 그들과 함께 커 나가는 것.

현재 소년점프에서 최고의 인기 만화인 ‘닥터슬럼프’의 토리야마 아키라와 ‘윙맨’의 카츠라 마사카즈(후에 ‘전영소녀’와 ‘아이즈’를 그리게 된다)를 발굴한 편집자 토리시마 카즈히코는 이쪽 업계에선 꽤나 유명인 이었다.

지로도 이런 편집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 후로 한 일이라고는 과중한 업무와 단순히 만화가들의 심부름 따위를 하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 원고를 보고 의견을 내보려하면 만화가들은 자신의 원고에 간섭한다고 담당을 바꿔달라는 말만하고, 편집장은 그런 의견을 받아들여 자신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게만 만들었다.

이쯤 되면 편집자라기보다는 그냥 하인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출판사 윗사람들은 왜 판매부수가 적느냐고 난리다.

그나마 괜찮은 신인을 발굴해도 관리가 되지 않으니 떠나가기 일쑤다.

결국 그 때문에 신인발굴보다는 기성만화가들 중 적당한 수준의 만화가들을 영입하기 일쑤다. 그리고 잡지의 타깃이 점점 연령이 낮아지는 것도 문제였다.

아무래도 안정적인 판매를 위해 조율하다보니 결국 이런 상황으로 흘러간 것이다. 그리고 편집장은 그것을 나름 바꿔보겠다며 바로 얼마 전 자신이 담당하게 된 쇼타로 선생을 영입한 것이다. 물론 오늘은 그 담당도 끝이 났지만.

아무튼 그런 주먹구구식으로 이끌어가는 모습에 조금씩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찰나에 한국에서 발견한 남매는 그야말로 새로운 길을 보여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다시 막혀버렸다.

식자를 붙이던 손이 멈추고 곧 입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온다.

퇴근시간이 되자 가까운 세븐일레븐에 들러 맥주와 안주거리를 좀 사서는 자신의 집인 맨션으로 갔다.

그래도 중산층인 부모님 덕분에 대학시절부터 도쿄생활은 편하게 해오고 있다. 지금이 이 맨션도 어머니가 직접 구해주신 집이다.

대충 샤워를 한 뒤 맥주를 한잔 마시려는데 전화가 울린다.

“네, 아카기입니다.”

- 여어, 아카기. 나야.

“야지마 선배.”

- 선배는 무슨, 대학졸업한지가 언젠데 아직 선배라는 거야? 그나저나 지금 집에 혼자 있지?

“네.”

- 술 한 잔 안할래?

“별일 없으면 우리 집으로 놀러오세요. 샤워까지 끝내서 나가기 귀찮은데.”

- 그럴까?

“네.”

- 알았어. 곧 갈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먹을 건 내가 사갈게.

잠시 후 몸집이 큼직한 남자가 지로의 집으로 찾아왔다. 아까 전화통화를 했던 야지마였다.

“갑자기 무슨 일인데요?”

“아, 뭐.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그 말에 지로가 미간을 찌푸린다.

“저 그런 취미 없는데요.”

“나도 없어. 재수 없는 소리 마.”

야지마가 그렇게 말하며 사람 좋은 얼굴로 웃는다.

야지마 준.

그는 지로의 대학2년 선배다.

대학교시절 지로가 가장 좋아하며 따르던 사람으로 그는 현재 지로의 주간소년 토부의 라이벌 격 회사인 미쯔다쇼텐의 주간소년 히어로에서 일하고 있다.

사실, 지로가 편집자의 꿈을 꾸게 된 계기도 야지마의 영향이 가장 컸다.

야지마는 전형적인 만화광으로 어릴 적부터 만화에 미쳐 살다가 만화가를 도전하려 했지만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곧바로 만화편집자가 되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어쨌든 대학시절 이 야지마와 같이 붙어 지낸 시간이 길어서 결국 이 사람의 영향을 받고 자신의 진로까지 결정한 것이다.

회사는 다르지만 같은 업계에서 일하며 좋은 관계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혼자 술 마시고 있었냐? 뭐 스트레스 받는 일 있었어?”

“선배는 갑자기 왜 술을 사가지고 온 건데요?”

“나도 요즘 답답해서 말이지.”

야지마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일인데요?”

“무슨 일이긴, 편집부에서 일하면 누구나 겪는 일이지. 일은 많지, 직원은 부족하지.”

그렇게 말하더니 지로 쪽으로 머리를 쭉 들이밀었다.

“너 말이야. 그딴 출판사 편집부는 그만 두고 우리 쪽으로 오라니까.”

“······아. 또 그 얘기에요?”

“또는 무슨, 네가 오면 좋을 텐데. 가뜩이나 일손도 부족하고 말이지. 편집자가 부족해서 맡아야 할 만화가도 평균 넘는다고. 이러다가 과로사 할 것 같단 말이야.”

“그쪽은 직원 안 뽑아요?”

“안 뽑긴.”

“그런데 왜 그래요?”

“일이 힘들다는 거지, 일이. 월급은 괜찮은데, 아무래도 편집장님이 너무 의욕이 넘쳐서. 그래서 신입이 들어오면 힘들다고 죄다 그만둬 버리니까.”

“그럼 일을 좀 줄여달라고 해요.”

“그게 마음대로 되냐? 너희들은 그게 되든?”

“아니죠.”

“거봐, 그리고 편집자라는 게 원래 만화가들과 가끔씩 연재회의도 해야 하고, 거기다 편집실 일도 많고. 이쪽 일이 일반적인 건 아니잖아.”

야지마의 말이야 당연히 지로도 이해한다.

지로 역시도 겪고 있는 일이니까.

“생각 있으면 바로 얘기해. 너희들처럼 의욕 없는 녀석들이 있는 곳 보다는 괜찮잖아. 자리는 언제든 열려 있으니까.”

“뭔가 무서운 말이네요. 언제든 이라니.”

“아, 그런가?”

그렇게 말하며 웃는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은 말이지 엊그제 큰 사건이 있었거든.”

“사건요?”

“어. 우리 주간소년 히어로 간판 작가인 쥬조 선생이 연재를 끝내버렸어.”

“어? ‘파이팅 젠베이’의 작가 말이죠?”

“그래.”

“그거 한참 인기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 우리 잡지 간판만화잖아. 그런데 갑자기 연재를 마무리 지어버렸어. 그 때문에 편집부도 난리가 났었고. 그런데 오늘 다른 잡지사로 옮겨간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그래서 오늘 편집부 분위기 완전 엉망이 돼 버렸어. 편집장님이랑 부편집장님은 하루종이 저기압이고.”

“그랬겠네요.”

지로역시도 만화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는 이상 야지마의 기분을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야지마는 특유의 쾌활함으로 피식 웃어버린다.

“뭐, 내가 고민한다고 해결된 문제도 아니고. 어쩌겠냐. 열심히 해야지.”

그 말에 지로도 머리를 끄덕인다.

“그런데 넌 무슨 일인데?”

“아, 저요?”

“그래. 너 이렇게 축 늘어지는 스타일 아니잖아. 무슨 일이야?”

“실은······.”

지로는 자신이 쇼타로 선생의 담당으로 한국에 갔었던 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오, 편집자 주제에 외국여행이라니 팔자도 좋아.”

“일하러 갔어요. 일.”

“나라면 환영이야. 그런 일이라면.”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래 계속 해봐.”

광화문에 있는 햄버거가게에서 만난 남매의 이야기를 상세하게 설명하자 야지마가 처음으로 호기심을 보였다.

“재능 있는 남매?”

“끊지 말고 좀 들어요.”

“알았으니까 계속해.”

그렇게 재능 있는 한국인 남매에 대한 자세한 얘기가 이어지자 연신 감탄했다. 하지만 지로의 말을 끊을 수 없어 흥분한 얼굴로 머리만 끄덕이며 계속 이야기를 하라고 한다.

그렇게 이야기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와 편집부에서 편집장과 있었던 부분으로 이어지자 그가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버럭 했다.

“아니, 너희 편집장은 자격이 있는 사람이냐? 재능에 국적을 왜 따져? 그리고 귀찮다고? 미친 거 아니야? 편집장 맞아?”

흥분한 야지마의 말에 지로가 한숨을 쉬며 말을 받았다.

“후우, 그러게요. 내가 그것 때문에 오늘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아, 그런데 선배. 원고랑 네임 한 번 보실래요?”

“어? 그거 봐도 돼?”

“어차피, 우리 출판사에서는 안 되는데요, 뭘.”

“그래도 다른 출판사 직원이잖아. 나.”

“됐으니까, 선배가 보고 한번 판단해 보세요.”

“그, 그럴까? 뭐 나름 의견정도라면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눈을 반짝거린다.

지로가 가방이 있는 곳으로 가서는 원고와 네임이 들어있는 서류봉투를 꺼내 야지마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어. 그래.”

야지마가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서는 안에 들어있는 데생원고를 먼저 꺼낸다.

그리고는 천천히 원고를 한 장, 한 장 살피기 시작한다.

평소엔 말이 많은 사람이지만, 만화를 대할 땐 극도로 말이 없어진다.

원고를 한 장씩 넘기던 그가 20장의 데생을 모두 다 보고나더니 지로를 쳐다본다. 눈이 동그랗게 떠져있다.

“와, 이거 물건인데? 진짜 그 한국인 여자아이가 이걸 그렸다고?”

“네.”

“와 진짜 뒷내용 너무 궁금하다. 잠시만.”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네임이 그려져 있는 노트를 펼친다. 그리고는 잽싸게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참동안 읽어가던 그가 곧 노트를 다 덮었다.

네임은 모두 읽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묘하다.

이내 야지마가 부르르 떨더니 지로에게 소리쳤다.

“야, 이거 정말 엄청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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