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50화 (50/425)
  • 뭐, 한국인? (2) <2권 끝>

    지로의 말에 편집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본다.

    “어이 어이 이봐, 아카기.”

    “네?”

    “자네가 지금 신인에게 신경 쓸 때야? 담당인 다케다 선생님을 편집부에서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몰라서 그래?”

    “······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

    “일단 그건 됐고, 어서 빨리 다케다 선생님 댁에나 가봐.”

    편집장의 화난 표정을 보고 있으니 더 이야기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내민 서류봉투를 한 번 더 내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래도 꼭 한번 봐주세요.”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가방을 챙겨 바깥으로 나간다.

    그 모습을 본 편집장에 후 하며 담배연기를 뿜고는 혀를 쯧쯧 하며 찬다.

    “방금 말했는데도 또 저런 소리를·······. 일한지도 1년이 넘었으면서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그리고는 곧 눈앞의 원고들을 정리하게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방금 지로의 얼굴을 떠올렸다.

    한 번도 저런 눈빛으로 자신에게 뭔가를 부탁한 적이 없었다는 걸 떠올린 것이다.

    원고를 정리하던 손이 멈춘다.

    “에이, 귀찮게.”

    일단 다른 작업들을 잠시 중단 한 채로 지로가 놓고 간 서류봉투를 열어 안에 들어있던 원고를 꺼내보았다.

    “뭐야? 데생원고인가? 신인이라면서 펜선도 안 입히고 가져왔네. 새롭게 발굴해서 관리 중인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천천히 원고를 살피기 시작한다.

    첫 장면부터 도시의 전경이 펼쳐진다. 데생이라고는 해도 생각보다 꽤나 꼼꼼하게 그려 눈길이 간다.

    도시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변두리 낡은 건물.

    생각보다 장면 전환도 나쁘지 않다. 아니, 신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굉장히 노련해보이기까지 한다.

    몇 장면은 만화보다는 영화적인 연출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아마도 요즘 만화계에서 태풍의 눈으로 떠오른 오토모의 신작 아키라의 연출법을 연구한 모양이다. 신인이라고 했는데 제법 노련해서 얼핏 보면 기성 작가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렇게 한 장, 한 장 넘겨간다.

    그리고 어느 순간 편집장이 멈칫거린다.

    몇몇 장면에서는 익숙하지 않는 느낌의 구성도 보여서다.

    독특하면서도 화려하지 않고, 또한 세련되어 있는 느낌이다.

    신인이면서 독창적인 개성이 잘 잡혀있다.

    과감하게 생략된 장면도 나쁘지 않다.

    오히려 적은 그림만으로도 보는 이의 상상력을 자극하기도 한다.

    어느새 그림의 매력에 빠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곧바로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는 원고를 자세히 살펴본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등장하는 살아있는 시체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거다.

    “······어? 이거 좀비 아냐?”

    생각지도 못한 것들이 등장하는 바람에 깜짝 놀랐다.

    그런데 시체들의 느낌이 더럽다거나 추하지 않다.

    공포감을 주긴 하는데, 뭔가 기존의 그림들과는 상당히 달라서 특이하다는 느낌까지 준다.

    아무튼 그렇게 느닷없이 좀비들이 등장하면서 만화는 끝이나버렸다.

    “이거······, 엔딩이 아닌가?”

    단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다.

    호기심이 동한 편집장이 서둘러 원고를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림만 봤기 때문에 이번엔 이야기에 집중하기로 한 것이다.

    20페이지라 읽는 것에 특별히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니었다.

    이야기도 시작부분에서는 특별한 게 보이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일상과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

    어쩐지 일본의 일반적인 도시풍경과는 다른 모습이다.

    도시의 거리모습도 그렇지만 간판은 죄다 영어로만 적혀있다.

    하지만 묘하게 동양적인 풍경이라 익숙함도 있다.

    “일본의 느낌과는 좀 다른데? 외국인가?”

    뭐, 사람마다 세계관을 표현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으니 별로 상관없다.

    아무튼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다 뭔가 징조 같은 장면들이 있고, 그렇게 마지막엔 좀비장면으로 이어진 것이다.

    분명 평범해 보이는 진행인데 마지막 장면때문인지 묘하게 인상에 남는다.

    그리고 평범하지만 상당히 눈에 잘 들어오는 그림과 내용이다.

    상당히 노련한 기성이 만든 작품처럼 보인다. 하지만, 분명 지로는 신인이라고 했다.

    “뭐야? 아카기 이 녀석, 그동안 빌빌대더니만, 대단한 신인을 잡았네.”

    단 20페이지만으로도 상당한 호기심을 끄는 만화다.

    지로의 말대로 신인이라면 나이가 많은 중고 신인일 가능성이 높다. 실력은 있지만, 이제껏 운이 닿지 않아 데뷔하지 못한 케이스.

    그렇게 생각해도 이렇게 압도적인 연출과 그림이라면 그것도 잘 쉽게 이해가 되는 건 아니다. 이 정도 실력이라면 출판사에서 자체적으로 괜찮은 스토리작가와 이어줄 수도 있는 거니까.

    어설프게 잘 그리는 신인들이야 흔하지만 이렇게 재능 있는 신인이라면 스토리작가를 붙여서라도 출판사와 계약하는 게 여러모로 이익이니까.

    하지만 만화가들 중엔 묘하게 자신의 작품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

    인기를 위해서는 당연히 좋은 스토리와 합작해서 그리는 것이 좋을 텐데도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려고 고집하는 사람들. 어쩌면 이 신인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하긴, 이만한 실력이면 자존심이 강할 만도 하겠지.

    지금은 출판만화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시기, 이럴 땐 실력 있는 만화가를 많이 확보한 출판사가 경쟁력이 있는 건 당연한 이치다.

    아무튼 이번 신인은 이야기에도 쪽에도 재능이 있어 보인다.

    주간 연재 분량은 20페이지.

    단 20페이지만으로 독자들에게 호기심을 주는데 실패하면 그 다음부터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물론 후반으로 갈수록 피치를 올리며 스토리가 빵빵 터져주는 사람들도 있지만, 어쨌건 첫 20페이지로 호기심을 끌었다면 절반은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

    거기다 신인인 주제에 흔하지 않은 소재인 좀비이야기라니 그것도 참신하다.

    다만, 지금 토부의 주력은 명랑이나 개그처럼 가벼운 만화가 주력이다. 물론 몇몇 극화풍의 만화도 있지만.

    어쨌건 위에서도 독자층이 너무 어린 쪽에 편중되어있다고 말이 많았는데, 이정도 작품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다.

    원고를 바라보던 편집장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신다.

    “그나저나, 뒷내용이 뭐지? 자꾸 신경 쓰이네.”

    *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지로의 말에 책상에 앉아 원고에 열중하던 작가 다케다 쇼타로가 머리를 끄덕인다.

    평소에도 성격이 차갑기로 소문난 만화가다. 그런데 이번엔 배경 자료용 사진이 늦었다고 화가 난 상황이니 더 뚱한 모습이다.

    지로는 한 번 더 머리를 처박고 그림에만 열중해 있는 만화가에게 인사를 하고는 물러났다.

    나가는 동안 거실에 모여 있는 어시들에게도 인사를 한 뒤 바깥으로 나간다.

    그때 다케다 선생의 부인이 문밖까지 배웅을 나온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고생하신 편집자님께 제가 더 죄송하죠.”

    30대 후반의 전형적인 일본주부의 모습을 한 그녀가 문밖에서 다시 한 번 사죄하는 지로에게 웃으며 말한다.

    사진을 전해주러 온 이후로 쇼타로 선생에게 계속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담당이면 담당답게 책임감을 가져야 할 거 아닙니까.’

    ‘아무리 내가 여유가 있다 해도 담당이 그렇게 여유를 부려서야 되겠어요?’

    ‘만화가에게 시간은 금이에요. 이렇게 어영부영 하는 일하는 편집자는 처음이에요.’

    사실, 원래대로라면 휴가로 했다하더라도 한국에서는 하루나 이틀정도만 머물 생각이었다. 기껏해야 서울구경 조금하고, 필요한 물건이나 선물 같은걸 몇 가지 사면 할 일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기적적으로 재능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말았다.

    때문에 예정에도 없이 며칠을 더 머물러야만 했다.

    그 때문에 그 많은 잔소리를 들었음에도 평소처럼 짜증이 일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새롭게 자신이 발견한 신인 때문에 묘한 들뜸이 있었다.

    하지만 쇼타로 선생의 부인은 지로가 마음이 상했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계속 위로를 한다.

    “저녁이면 금방 또 풀어지실 거니까요.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아닙니다. 선생님의 말씀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제가 좀 책임감이 부족했다는 건 스스로도 느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웃자 그제야 쇼타로 선생의 부인도 안심하는 듯 살짝 미소 짓는다.

    “그렇게 생각하시니 다행이에요.”

    “그럼 며칠 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네. 그럼 안녕히 가세요.”

    “네, 들어가세요.”

    지로는 서둘러 출판사로 돌아갔다.

    *

    “아카기 군!”

    편집부에 들어오자마자 편집장이 지로를 불렀다.

    “네.”

    그의 부름을 받은 지로가 서둘러 편집장의 자리로 갔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자네에게 미안하게 됐군.”

    “······네?”

    “방금 연락을 받았는데 말이지······.”

    “······?”

    “쇼타로 선생님께서 담당을 바꿔달라고 하는군.”

    “네?”

    지로가 경악한 얼굴로 편집장을 바라봤다.

    “서, 설마 이번 배경 사진 때문입니까?”

    “······그거야, 뭐. 알 수 없지.”

    “그거 말고는 없잖아요. 방금 만나 뵙고 올 때만 해도 화를 내시긴 했지만, 별다른 말씀은 안하셨는데.”

    “자네도 알잖아. 쇼타로 선생님, 꽁한 성격.”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편집부로서는 어쩔 수 없는 거 알잖아. 쇼타로 선생님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하겠어.”

    “그럼 전 담당하는 작품이 없는 겁니까?”

    “······.”

    “그런······.”

    지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명 한국에 가기 전 배경사진을 부탁받았을 때만해도 천천히 찍어도 된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래서 휴가도 같이 보낸 것도 있다.

    물론, 중간에 예상치 못한 인연이 있어 굉장한 재능의 남매를 만난 행운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런 편집부의 결정도, 그것을 부탁한 만화가에게도 실망하고 있었다.

    그런 지로의 기분을 이해한다는 듯 편집장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다.

    “어쩔 수 없지 않나, 편집부 입장이라는 것도 있으니 자네가 좀 이해를 해주게.”

    “······.”

    여전히 표정이 굳어있는 지로를 보던 편집장이 뭔가 떠올랐는지 손바닥을 탁하고 쳤다.

    “아 참, 그나저나 어떻게 찾은 거야?”

    “네?”

    “신인 말이야. 신인. 네가 준 원고, 그거 신인작품이지?”

    그제야 지로가 편집장의 말을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인다.

    “아, 네. 읽어보셨군요.”

    “그래. 데생만 되어 있던 그거, 그런데 단편이 아닌 장편원고더군.”

    “네.”

    편집장이 하는 말의 뜻을 잘 알고 있다.

    신인의 경우 잡지에 첫 데뷔하는 경우가 보통 두 가지다.

    신인공모전에 당선되거나, 아니면 직접 원고를 들고 찾아와 편집자의 간택을 받는 경우다.

    그리고 두 가지 경우 모두 단편으로 테스트를 받는다.

    단편은 공정하게 잡지에 기재되고 독자로부터 엄격한 심사를 받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 반응에 따라 장편으로 결정되느냐, 아니면 그냥 가능성만 인정받느냐가 결정되는 거다.

    그런데 이 작품은 단편도 아닌데다가 펜선작업도 되지 않은 그냥 데생원고일 뿐이니 당연한 소리였다.

    “완성시키기엔 시간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말에 편집장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시간이 왜 부족해? 그 사람에게 무슨 일 있어? 갑자기 외국으로 떠나기라도 한데?”

    “아뇨. 신인이 한국인이거든요.”

    “뭐? 한국인?”

    그 말에 편집장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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