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한국인? (1)
“어머나, 이거 섭섭해서 어쩐데?”
“그동안 신세 많이 졌어요.”
주인아줌마의 말에 누나가 쓴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진희 너도 잘 알잖니. 우리 바깥양반이 워낙 맘이 약하잖아. 거기다 너희 아버지랑은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네.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건 그렇고, 근처에 1층짜리 단독주택이라고?”
“네.”
“방은?”
“세 칸이에요.”
“집은 작은가 보네.”
“저희 다섯 식구 살기엔 넘쳐요.”
“그야, 그렇겠지.”
일요일 아침.
가족들이 모두 나서 집안에 있는 짐들을 모두 꺼내느라 정신이 없다.
박상식과나, 그리고 1톤 트럭기사는 장롱이나 TV처럼 큰 물건 위주로 옮기고 있었고, 나머지 가족들은 두 손으로 들 수 있는 가벼운 물건들 위주로 나르고 있다.
그런 와중에 주인아줌마는 도와줄 것도 아니면서, 계속 누나를 붙들고 말을 시키고 있다.
밉살스런 아줌마에게 한마디 하고 싶긴 했지만, 그동안 엄마와의 관계도 있고 해서 그냥 모른 척 외면하고 있을 뿐이다.
“넓은 데로 가네. 갑자기 돈벼락이라도 맞은 거야?”
“네. 우리 윤환이 덕분에요.”
“정말? 윤환이가 뭘 하는데?”
그때 주인집 문이 벌컥 열리자 주인아저씨가 머리를 빼꼼 내밀고는 버럭 소리쳤다.
“아, 거 좀! 당신은 거기서 뭘 하는 거야! 모두 바쁜데 왜 자꾸 방해하고 그래?”
“방해는 누가한다고 그래? 떠나니까 섭섭해서 그러지.”
“뭔 소리를 하는 거야? 근처로 간다는데.”
“그래도 붙어 있을 때랑 같아?”
“헛소리 말고 도와줄 거 아니면 방해나 하지 마! 밉상 짓도 적당히 해야지.”
그 말에 주인아줌마가 콧김을 푹푹 뿜었다. 그리고는 서둘러 자기집안으로 들어가더니 문을 쾅 하고 닫는다.
안에서 버럭 하는 아줌마의 신경질적인 소리가 들린다.
“아니, 당신은 사람들 앞에서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안사람 망신을 줄 참이야?”
“망신은 무슨, 자네가 하는 짓 자체가 망신이네. 알기나 하나?”
“자기는 어떻고! 맨날 휴일만 되면 잠자는 게 일인 주제에.”
“하늘같은 남편에게 뭐?”
결국 주인집 안에서는 큰소리가 오가고 있다.
저 양반들은 툭하면 저렇게 큰소리를 지르며 싸우면서도 꽤나 사이가 좋은 특이한 사람들이다. 뭐, 다 각자 나름의 삶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러는 사이 어느새 집안의 물건들은 깨끗하게 비워지고, 1톤 트럭엔 짐들이 빼곡히 쌓였다.
트럭기사가 고무 바를 이용해 꼼꼼하게 묶고는 운전석에 오른다.
“자, 이제 출발합니다.”
“네.”
트럭기사 옆에 내가 자리를 잡자 곧바로 출발했다.
이번에 옮기는 곳은 도보로 대충 10분정도, 가까운 곳이다.
원래는 조금 좋은 곳을 알아보려했지만, 이곳에 줄곧 살아온 가족들이라 동네를 떠나기 싫어한 탓에 어쩔 수 없었다.
덕분에 인근에서 쓸만한 집을 찾다 발견한 것이 바로 1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집 자체는 그리 크지 않고 아담한 형태인데, 마당도 있고, 방도 세 개나 되어서 한동안 살기엔 안성맞춤이라 여겼다.
물론 돈이 좀 더 모인다면 다시 집을 옮길 생각이다.
끼익.
워낙 가까운 곳에 있어서 그런지 트럭으로 이동하니 금방 도착한다.
내가 먼저 트럭에서 내린 후 열쇠로 대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가 마당을 지나 다시 건물의 문을 열어둔다.
뒤늦게 도착한 가족들이 대문 앞에서 눈동자를 굴리며 묘한 표정으로 안쪽을 본다.
가족들이 작은 물건들을 들고 대문을 통과해 들어온다.
“야아, 이제부터 우리가 여기서 살 거라는 거지?”
경희가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표정으로 이리저리 두리번거린다.
며칠 전에 왔을 때도 저렇게 법석을 떨더니.
하긴, 엄마한테 듣기론 저 녀석 매일같이 여기를 찾아왔던 모양이지만.
“호들갑 그만 떨고, 정리부터 도와, 이것아.”
“알았어, 엄마.”
가족들이 거실로 통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며 깜짝 놀란다.
“어머나, 이게 뭐니?”
“새 가구······.”
엄마와 누나가 옮기던 물건을 내려놓고는 놀란 표정으로 집안을 이리저리 둘러본다.
각 방에 넣어진 장롱부터, 작은방에 있는 이층침대, 부엌에 있는 새로운 싱크대.
실내는 모두 하얀 벽지로 도배가 되어있으니 그야말로 새로운 세상처럼 보였을 것이다.
원래는 거실벽도 나무로 되어있어 내부가 칙칙한 느낌이라 과감하게 싹 다 리모델링을 해버린 것이다. 그것도 하얀색으로.
벽지도 특별히 따로 구했고, 가구도 되도록 색에 맞는 걸로 구해봤다.
“어? 뭐야?”
뒤늦게 들어온 경희가 실내를 보며 경악한다.
며칠 전에 왔을 때와 전혀 다른 내부인테리어에 놀란 모양이다.
“며칠 전부터 뚝딱뚝딱 거리더니 이렇게 만든 거야?”
“넌 알고 있었니?”
“문이 닫혀 있어서 몰랐어. 그냥 소리만 요란해서 공사 중이라는 건 짐작했지만.”
“어때? 마음에 드냐?”
내가 슬쩍 다가가서 물었다. 그러자 여전히 멍한 얼굴로 날 돌아본다.
“완전 하얀 궁전 같다.”
“궁전은 좀 오바고.”
“왜, 이정도면 궁전이지.”
하기야, 전에 살던 집에 비하면 궁전처럼 여기는 것도 이해는 된다.
선희도 나름 실내인테리어에 감탄했는지 입을 떡하니 벌린 채로 경희를 따라 이 방, 저 방을 돌고 있다.
“입 다물어. 벌레 들어가겠다.”
“너도.”
“에헤헤. 그래?”
경희도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는다.
그나저나 기존에 쓰던 가구가 사실 좀 그렇기는 하지만, 이집에 어떤 의미였는지 모르는 이상 함부로 버릴 수는 없어서 일단 집안으로 들인 건 잘 한 일이었다.
“버리면 당연히 안 되지. 장롱을 처음 집에 들이던 날은 아직도 잊을 수 없으니까.”
엄마의 저런 반응을 보니까.
***
단편인 20페이지짜리 데생을 위해 일주일 가까이를 쏟아 부어 완성시켰다.
완성된 데생그림이야 20페이지에 불과하지만 사실 그 과정에서 중단시킨 데생까지 모두하면 100페이지는 충분히 될 것이다.
일본인 편집자가 가지고 간 데생원고는 어디까지나 연재용이고,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단편을 만든 것이다.
하지만 단편이라서 그런지 오히려 작업이 더 까다로웠다.
짧지만 임팩트 있는 내용을 넣기 위해 장편과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아무튼 내가 힘든 거야 크지 않지만, 선희의 인내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단 20페이지를 완성시키기 위해 그 많은 페이지를 갈아엎고 새롭게 그렸음에도 전혀 질리거나 힘들어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내가 생각한 것을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을 정도다.
중간 중간에 ‘안 힘드냐?’라고 물어도 ‘별로’라고 쿨하게 대답까지 한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알려준 연출을 이젠 거의 다 이해한 것을 넘어 자신의 방법을 새롭게 창조하는 모습도 간혹 보여줄 때가 있을 정도다.
그림의 속도도 속도지만, 선희의 만화적 센스는 정말 발군이었다.
그리고 그 사이 그림의 실력도 많이 늘어버렸다.
아무리 초기에 실력이 많이 느는 게 특징이라지만, 이건 빨라도 너무 빠르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하겠어.”
내말에 선희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보인다.
이정도면 선희로서는 엄청나게 자신을 표현한 모습이다.
“앞으로는 이렇게 펜터치 하지 말고 계속 데생위주로만 그려.”
“왜?”
“펜 작업은 단순일이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야. 하지만 장면을 구성하고 만들어내는 데생은 전혀 다르지.”
“그게 중요해?”
“그럼. 스토리도 중요하지만 그 스토리를 살리는 연출도 중요하지. 단순히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는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뜻이야.”
그 말에 선희가 머리를 갸웃거린다.
확실히 이해가 된 건 아닌 모양이다.
“만화가가 되려면 중요한 일이야.”
내 설명에 더 이상 별다른 의문을 던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다.
“알겠어. 그럼 할게.”
***
일본으로 건너간 지로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원고를 챙겨 곧장 출판사로 출근했다.
며칠간 한국에서 이래저래 나름 한가한 시간을 보낸 탓에 정신적 여유가 생겼지만, 출근하자마자 책상마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책들을 보니 빡센 편집부의 생활이 곧바로 실감난다.
편집부 직원들은 언제나처럼 분주하게 움직이며 바쁘다.
전화기를 붙들고 머리를 숙이는 사람, 만화가들과 연재회의를 하는 사람, 원고의 식자들을 다시 검토하는 사람 등등······.
특히 최근 들어 만화의 폭발적인 성장세 때문에 출판사간의 경쟁이 치열하다.
특히나 이곳 주간소년 토부의 경우, 중하위권에 머물러 있는 상태.
재능 있는 신인만화가를 찾기 위해 편집자들은 그야말로 동분서주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었다.
그때 사무실에서 만화책들 사이에 파묻혀있던 편집장이 지로를 보고는 손을 슬쩍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아카기! 그래, 편하게 잘 쉬고 왔나?”
곧바로 지로는 편집장의 자리로 걸어가서는 인사했다.
“다녀왔습니다. 편집장님.”
“그래, 어때?”
“네?”
“한국여자들 말이야.”
“······저기, 아닌데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한국에 갔으면 그거는 기본 아니야?”
편집장이 손가락으로 기괴한 모양을 만든다.
그 모습을 본 지로가 곧 인상을 찌푸렸다.
편집장이 말하는 뜻을 잘 알고 있어서다.
소위 말하는 기생관광.
70년대부터 불기 시작한 단체관광.
특히나 한국의 기생관광은 꽤나 유명한 일이었다.
한국에서도 그 문제로 인해 많은 단체들이 이것을 문제 삼으며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일본에서도 그 문제를 크게 보도하며, 사회문제로 소개하며 자제를 부탁하고 있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몇 년 전에는 한국에 둔 애인을 죽인 일본남성이 체포된 사건도 뉴스에서 크게 보도된 일이 있었다.
덕분에 남자 혼자 한국에서 휴가를 보냈다고 하면 모두 은근히 그런 것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아뇨,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그래, 알았어. 부끄러워하긴.”
그렇게 말하며 징그러운 표정으로 웃는다.
그러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아차하며 지로에게 말했다.
“아, 맞다. 다케다 선생님이 사진 필요하다고 얼마나 닦달했는지 알아?”
편집장의 말에 지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여유가 있는 줄 알았는데요?”
“여유? 3일안에 완성시켜야 할 원고에 몇 장면 등장한 예정인가 보던데.”
“그래요? 이상하네? 분명 콘티엔 없었는데.”
“콘티를 수정한 모양이지.”
“아.”
자주는 아니더라도 없는 일은 아니다.
“그나저나 한국에서 사진 미리 현상해 뒀지?”
“네. 혹시 몰라서 미리 해뒀습니다.”
“좋아, 그럼 빨리 다케다 선생님 댁에 먼저가. 또 늦으면 그 선생 또 미쳐가지고 연중한다 어쩐다하며 편집부로 쳐들어와서 협박할지도 모르니까.”
“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래.”
편집장이 곧 쌓여있는 원고들을 뒤적거리며 손을 들어 빨리 가보라는 시늉을 한다.
곧바로 나가려다 멈칫한 지로가 자신을 가방에 들어있는 원고를 떠올렸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 편집장에게 다가갔다.
편집장은 담배를 문 채로 정신없이 원고들을 살펴보다가 머리를 들었다.
“시간 없다는데, 안가고 뭐하는 거야?”
“편집장님 잠시만 이거 봐주실 수 있을까요?”
지로가 조심스럽게 서류봉투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눈살을 찌푸리던 편집장이 그것을 보며 물었다.
“뭔데?”
“제가 봐둔 신인이 한명 있는데, 이게 그 원고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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