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46화 (46/425)
  • 뜻밖의 기회 (4)

    호텔로 돌아온 지로는 설렘과 함께 고민에 빠졌다.

    “내가 성급했던 걸까.”

    오늘 만난 여자아이의 그림실력에 정신이 팔려 앞뒤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네임을 달라고는 했지만, 그것이 옳은 판단이었는지 확신이 서지 않아서다.

    냉정하게 판단해 봐도 그림실력에 문제는 없다. 약간 어색한 연출을 빼면 그 나이라고는 믿기 힘든 그림실력을 가졌으니까.

    하지만, 그것만으로 정말 일본에서 만화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마냥 순탄하게만 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의 일본은 만화가들의 전성기나 다름없다.

    단행본 초판 발행 220만부라는 기록적인 판매기록을 세운 만화가 튀어나올 정도라 경쟁도 치열하다.

    그런 곳에서 그림만으로 살아남는다?

    그것만으로는 사실 어렵다고 봐야한다.

    그럼에도 뭔가 알 수 없는 확신 같은 게 마음속에 생겼었다.

    무엇이었을까.

    평소의 자신이라면 그렇게 성급한 판단을 내리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에 온 뒤로 피곤이 쌓여서일까.

    어쨌건 감정에 이끌려 내린 판단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알 수 없는 확신 같은 것이 마음 한편에 생겨나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망상일수도 있고, 여자아이에게서 뭔가를 발견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지금으로서는 일주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최종결정은 네임을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

    만약 자신이 이 설렘이 단순한 착각이었다면 정중하게 사과하고 끝내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한번 도전해 볼 생각이었다.

    그동안 주간소년 토부에 들어와 한 일이라고는 담당인 만화가 선생의 뒤치다꺼리만 한 게 전부였으니까.

    처음 입사할 때의 마음처럼 숨겨진 재능 있는 신인을 발굴해 그를 최고의 만화가가 되게 하고 싶다. 현재 토부는 일본에서 그냥 그런 3류 소년만화잡지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자신의 손으로 뛰어넘게 하고 싶다는 꿈도 있다.

    창가에 앉은 채 도시를 내려다보는 지로의 마음은 이런저런 생각으로 복잡해져 있었다.

    ***

    임팩트가 있는 스토리가 필요하다.

    무엇이 좋을까?

    선희가 비록 그림에는 재능이 뛰어난 아이기는 하지만, 스토리는 다른 문제다.

    만화계에서 엄청난 그림실력을 가지고도 뜨지 못하는 작가는 널리고 널렸다. 마치 뛰어난 가창력을 가지고도 가수로 뜨지 못하는 것과도 비슷한 경우다.

    황당한 확률을 뚫고 서울시 한복판에서 일본만화출판사의 편집자와 만나는 기적을 이뤘다.

    지금으로서는 무조건 이번 기회에 제대로 된 콘티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이런 저런 고민에 빠져 있는데, 계속 그림만 그리던 선희가 어느 순간 날 보고 있다.

    “······왜?”

    “콘티.”

    “어. 그래. 그게 왜?”

    “그게 중요한 거야?”

    “그럼. 건물로 치면 설계도와 같은 건데.”

    “설계도?”

    “그래. 설계도 없이 건물을 지으면 어떻게 될 거 같냐?”

    “이상하겠지.”

    “그래. 바로 그거야 그리고 일본출판사에서는 이 콘티를 보고 작품에 대해 미리 예상하는 거야.”

    “······아.”

    납득을 했는지 머리를 끄덕인다.

    “한국 출판사들은 아직 인맥에 의존하고 있는 형태야. 그리고 만화가들도 대부분 대본소에 의존하는 형태고. 만화전문 월간지가 나오기는 했지만,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고.”

    “많이 아네. 역시······.”

    “역시 뭐?”

    “아니야.”

    저 녀석 또 이상한 소릴 하려고 한 것 같은데.

    “아무튼 너에게는 천재일우의 기회야.”

    “천재일우, 천년에 한번 만난다는 뜻으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기회라는 뜻.”

    “무슨 인터넷 사전이야?”

    “인터넷?”

    “······아무튼, 어렵게 얻은 기회니까 여기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야해.”

    그 순간 선희의 눈이 반짝거린다.

    만화에 대한 얘기라면 눈빛자체가 달라진다.

    “오빠가 시키는 대로 할게.”

    “그래?”

    “가장 좋은 길을 안내해 줄 테니까.”

    “······.”

    얘가 뭘 믿고 이런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뭘 해야만 하는지 시켜만 줘. 뭐든 할 테니까.”

    “그래. 그런 마음이면 돼. 내가 널 어떡하든 최고의 만화가로 만들어 볼 테니까.”

    그 말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문이 열리며 경희가 들어온다.

    “어? 둘이서 뭐해?”

    “뭘 하긴, 신작 준비하는 거지.”

    “정말 콘틴가 뭔가 하는 거 그거 만들어서 그 일본사람에게 주려고?”

    “당연하지.”

    “그럼 정말 선희 일본에서 출세하는 거 아니야? 그럼 완전 가문의 영광이잖아.”

    “너무 앞서가지 마라. 이제 겨우 조그마한 기회가 생겼을 뿐이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나, 올라갈게.”

    선희가 곧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경희도 선희를 따라 다락방으로 올라가며 수다를 떤다.

    “너, 돈 많이 벌면 나도 좀 데리고 살아줘. 알겠지?”

    “······.”

    “가정부라도 할 테니까.”

    “청소도 못하면서.”

    “그, 그럼 분위기 띄우기. 어때?”

    “필요 없어.”

    “그러지 말고 나 좀 써 줘라.”

    “······.”

    두 녀석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려니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그나저나 신작에 대해서는 조금 고민이 필요할 것 같네.

    난 일단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박상식의 방문이 잠겨있다.

    “어디 갔나?”

    내가 온 시절이라면 휴대폰으로 걸면 되는데 이 시절은 이게 참 답답하다. 갑자기 연락을 해야 할 때가 되면 난감할 뿐이다.

    일단 대문 밖을 나선다.

    구멍가게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평상이 비어있어 동네 할아버지처럼 그곳에 턱하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떤 이야기가 좋을까?

    사실, 내게 완벽한 새로운 아이디어 따위는 없다. 애초에 난 작가가 아니니까. 그냥 만화 덕후일 뿐이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사정 따위가 아니다. 지금은 어쨌건 해내야 하는 상황이다.

    무엇이 있을까?

    지금 일본에선 어떤 만화들이 나오고 있지?

    1984년이면······, 아 그렇구나.

    토리야마 아키라가 ‘닥터 슬럼프’ 연재를 종료하고 ‘드래곤볼’로 갈아타는 시점이다.

    그러고 보니 일본 만화계로 보자면 꽤나 역사적인 해구나.

    뭐, 드래곤볼 정도면 세계 만화사에서도 중요한 해이기도하고.

    하지만 드래곤볼 같은 경우엔 초반엔 반응이 신통찮았었다고 한다.

    대박작인 ‘닥터슬럼프’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드래곤볼은 연재가 시작되고 나서도 한동안은 거의 최하위 성적에 머물렀을 정도니까.

    당시 ‘닥터슬럼프’의 인기는 그야말로 엄청났었다.

    만화단행본 사상 최초로 초판 200만부를 넘어서는 기록을 세울 정도였으니까, 그런 와중에 작가가 더 이상 그리기 싫다고 했으니 출판사야 오죽 속이 탔을까.

    그리고 새롭게 낸 작품이 바로 드래곤볼이다.

    이 작품은 서유기에서 설정을 가져와, 자신이 좋아하는 브루스 리의 무술을 도입시키고, 거기다 ‘사토미 팔견전’의 일곱 개 구슬이라는 것까지 등장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특유의 야릇한 장면까지 등장시켜보았지만 초반의 반응을 그저 냉담하기만 했다.

    원래대로라면 일찌감치 연재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작품을 다시 구상하거나, 기존의 대박작인 닥터슬럼프의 속편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닥터슬럼프 애니로 재미를 보았던 제작사 토에이 애니메이션사가 드래곤볼 연재와 동시에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계속 연재를 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결국 초반에 연재가 중단되지 않았다.

    급기야 담당 편집자가 ‘타도, 북두의 권!’을 부르짖으며 배틀물로 전환하면서 결국 전설의 드래곤볼이 탄생하게 된 것이지만.

    아무튼 2억 5천만부의 전설적 판매기록을 가진 드래곤볼을 드디어 연재를 시작하게 되는 해라니.

    그나저나 드래곤볼은 소년만화의 배틀물의 왕도를 새운 작품이다.

    무한히 발전해나가며 더 강력한 적이 끊임없이 등장하는 그것.

    하지만 문제는 뒤로 갈수록 한계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 바로 파워인플레이션이다.

    무작정 강해지기만 하다 보니 결국 캐릭터간의 밸런스가 무너지게 되고 무작정 강해진다는 것도 어느 선을 넘게 되면 말이 안 되는 수준의 이야기만 난무하게 되고 결국 이야기는 막장으로 치닫게 된다.

    아무튼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 오는 희열이 대단해서 2018년에도 그런 류의 만화는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 유명한 원피스도 그런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않았고.

    아무튼 이런 성장형 만화는 일단 연재를 한다는 입장에서나 가능한 얘기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그림체다.

    선희의 그림은 어둡고, 거칠다.

    동몽과 아키라의 만화를 많이 연구했다고 쳐도 그림체가 너무 어두운편이다. 그렇다고 그림체가 닮았냐면 그런 것도 아니고.

    호러스타일 보다는 아포칼립스에 가깝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스토리역시도 지금의 선희에게 맞는 스토리가 필요할지 모른다.

    그림체와 전혀 다르면 아무래도 이질적으로 느껴질 테니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니 점점 혼란에 빠지는 기분이다.

    머리를 벅벅 긁다 곧 구멍가게 안으로 들어간 간식거리 과자 한 봉지를 사들고 나와 다시 평상위에 앉았다. 그런데 평상위에 백설기가 다소곳이 자리 잡고 있다.

    “넌 정말 안 나타나는 곳이 없구나.”

    하지만 녀석은 별 반응도 없이 그냥 멀뚱거리며 날 보더니 이번엔 과자 쪽을 본다.

    “그래, 이게 목적이었군.”

    하는 수없이 과자봉지를 까서는 한 움큼 쥐어서 녀석 앞에 내밀자 녀석이 열심히 과자를 받아먹는다. 정말 안 먹는 게 없는 녀석이네.

    다 먹고 나더니 다시 과자봉지를 바라본다.

    “그래. 먹고 싶은 만큼 먹어라. 누가 말리겠냐.”

    그렇게 말하고는 백설기 앞에 과자봉지 채로 놔둔다. 그러자 녀석이 과자봉지를 그대로 물고는 평상에서 뛰어내리더니 곧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어이가 없어서.”

    녀석이 사라진 방향을 보면서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뭔가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하루가 반복되는 타임루프.

    실수를 고쳐 하루 만에 세상을 바꾸는 이야기.

    이런 설정의 영화나 만화, 소설들이 꽤나 존재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거기다 좀비물을 섞어서.

    좀비가 창궐하게 되는 원인이 주인공 집 주변에서 벌어지고, 결국 좀비로 멸망하게 되는 미래를 반복되는 하루로 바꾼다는 이야기로 정했다.

    하루가 반복되며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를 없애는 이야기, 물론 미션이 완성되면 이야기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화로운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런 이야기다.

    오로지 주인공만이 그 모든 것을 겪은 상태로.

    좀비라는 건 이미 서양에서는 꽤나 인기 있는 장르였지만, 한국에서는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다. 물론 일본도 좀비장르는 아직 매니악 한 상황.

    연재라면 좋은 선택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짧은 이야기라면 임팩트는 충분하다.

    전체적인 이야기가 잡히자마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대략적인 형태로 글을 써봤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글 쓰는 재주가 미약해서 뭔가 어설프다.

    오후에 다시 박상식의 집으로 내려갔다.

    “어, 윤환이 왔구나.”

    “아침에 어디 갔었어?”

    “전 선생님에게 콘티 가져다주느라.”

    “콘티 작업은 어때?”

    “뭐, 어때고 뭐고 간에 마무리작업만 하면 되니까 그리 어렵지는 않아. 시간이 좀 걸린다 뿐이지.”

    박상식은 현재 ‘평발 스트라이커’를 계속 작업 중이었다.

    요즘 인기가 좋아서 계속 스토리를 이어나가고 있는 상황이라 콘티분량이 대략 세권정도 완성되면 전상길의 화실에 가져다주고 있었다.

    “형, 이거 좀 봐줄래?”

    내가 노트를 하나 내밀자 박상식이 호기심을 보인다.

    “뭔데?”

    노트를 받아 펼치며 천천히 읽어나간다.

    내용을 한참 읽던 그가 잠시 후 노트를 덮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날 쳐다본다.

    “이거, 내용이······ 좀 충격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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