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기회 (3)
“얘, 부끄럽게 여기까지 와서 그림을 그리는 거니?”
“······괜찮아.”
“너 말고, 나랑 오빠를 생각해야지. 너만 괜찮으면 다야?”
“응.”
“오빠, 얘 좀 보라니까. 완전 얼굴에 철판을 깔았어. 아, 진짜. 오빠는 안 그래?”
“난, 괜찮은데.”
“뭐?”
경희가 황당해 하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다.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햄버거는 맛있게 냠냠거리며 잘만 먹는다.
선희도 햄버거를 입에 먹으며 시선은 노트에만 고정시킨 채 그림에만 몰두해 있다.
그 전에도 그림에 대한 열정이 대단했다고 하던데, 강용철의 집에 다녀온 뒤로는 만화에 대한 열정이 폭발하고 있다.
엉덩이를 어딘가에 붙이면 그림만 주구장창 그려대고 있으니까.
사실 열정은 둘째 치고 그림에 대한 재능만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나야 원래 그림에 대한 재능이 부족해 결국 만화가로서의 꿈을 접고 단순한 덕후생활을 시작한 것이지만, 얜 정말 그냥 두기 아까울 정도다.
이정도 재능을 단순히 한국에서만 사용하려니 뭔가 조금 아쉽다.
앞으로 한국만화계가 잘 나갈 날이 대충 IMF 이전까지로 생각해도 13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그 이후론 그야말로 한국만화계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
선희가 올해 17살이 되니까, 한창 만화로 왕성한 활동을 할 시기쯤엔 30살, 그때가 되면 이곳은 헬조선으로 변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만화가 넵튠으로 사정이 좋아지는 시기까지 다시 기리려면 거기서 또 15년 정도는 더 보내야 할 테고.
그렇게 되면 나이가······, 45살이 되나······.
선희의 미래를 생각하니, 갑자기 암담함이 몰려온다.
남이면 모를까, 이젠 친동생이나 다름없는, 아니 친동생이 맞지. 아무튼 그런 선희의 미래가 암당하다고 생각하니 그냥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물론 내가 줄곧 붙어있을 수 있다면 그 전에라도 어떻게든 다른 활로를 찾아보겠지만, 내가 만약 왔을 때처럼 느닷없이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간다면?
그땐 선희의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지?
하지만 뜬금없이 이곳으로 왔으니, 갑자기 다시 원래세계로 돌아갈 수도 있는 것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젠장, 설마 내가 원래의 시간대로 돌아갈 일을 걱정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한숨이 나온다.
기분 좋게 나름 외식하러 나와서 왜 이런 암울한 생각에 빠져있는 건지.
“왜 으래? 마어서?(왜 그래? 맛없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입에 햄버거를 우겨넣으며 경희가 묻는다.
“아무것도 아니니까, 넌 그냥 말하지 말고 열심히 먹어. 콜라도 좀 마시고.”
내가 콜라를 내밀자 히히거리며 좋다고 받아 마신다.
그때 테이블 아래에 있던 백설기가 선희의 무릎위로 풀쩍 뛰어 오른다.
그러자 선희가 녀석의 머리를 한손으로 쓰다듬는다. 그리고 다른 손으로는 여전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녀석은 기분이 좋은지 선희의 손길을 느끼며 갸르릉 거린다. 그리고는 곧 우리들이 먹고 있는 음식을 빤히 쳐다본다.
곁에 앉아있던 경희가 백설기를 지켜보며 물었다.
“왜? 먹고 싶니?”
경희가 그렇게 말하며 감자튀김 하나를 집는다.
난 곧바로 경희의 손을 툭 쳤다.
“야, 아무거나 주면 안 돼.”
그런데 그 순간 고양이가 ‘캬’하며 이빨을 드러낸다.
“이거 봐, 백설기 화났잖아.”
“나 참, 이 자식은 지 몸 생각해서 그랬더니.”
“먹고 싶은 건 먹어야지. 거기다 얼마나 맛있는데.”
별로 몸에 좋은 건 아니지.
하지만 이 시절엔 이런 패스트푸드도 몸에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얼굴로 손을 치우자 서둘러 경희가 고양이에게 감자 칩을 먹인다. 녀석은 그게 또 맛있는지 쩝쩝거리며 잘도 받아먹는다.
“아유, 우리 백설기 잘 먹네. 착하다. 착해.”
경희는 그런 백설기가 너무 귀엽다며 호들갑을 떨어댄다.
그런데 양이 부족했는지 곧바로 감자 칩이 담겨있는 봉지를 통째로 물고는 바닥으로 뛰어내리더니 혼자 독차지 한 채로 열심히 먹기 시작한다.
“쪼그만 녀석이 욕심은······.”
“그래도 예쁘잖아.”
경희는 테이블 아래로 내려간 백설기를 바라보며 웃었다.
저, 고양이 자식.
분명 뭔가가 있는 게 틀림없는데 당최 그것을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그나마 말이라도 통하면 모를까.
“오빠.”
“응?”
“요즘엔 가끔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게 꿈인가 싶기도 해.”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냥. 매일, 매일이 행복해서 그러지. 엄마도, 언니도, 선희도, 그리고 나도. 이렇게 햄버거도 먹을 수 있고.”
“······.”
“요즘엔 정말 선희 말대로 외계인이 우리오빠를 납치해가고 착한 사람을 대신 데려다 놓은 게 진짜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콜록, 콜록.”
“콜라 먹어.”
“······아, 그래. 고맙다.”
그렇게 말하며 선희 쪽으로 시선을 살짝 돌렸더니, 선희는 여전히 그림에만 열중하고 있다.
“햄버거는 자주 사줄 테니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마.”
“정말? 햄버거 자주 사줄 거야?”
“그래. 하지만 너무 좋아하면 뚱땡이 된다.”
“괜찮아. 그런 건.”
그렇게 말하며 밝게 웃는다.
녀석.
그런데 잠시 동안 경희와 떠들고 났더니 테이블 아래에 있던 고양이 녀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 고양이, 어디 갔어?”
“어머? 어디 갔지? 선희야, 백설기는?”
경희의 말에 그림을 그리던 선희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묘한 시선을 느낀 내가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건지 처음 보는 젊은 남자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우리 쪽 테이블을 내려다보고 있다. 정확히 선희가 그리고 있는 그림 쪽으로.
선희가 그리는 그림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보는 것도 신기하다.
경희도 이상한 시선을 느꼈는지 젊은 남자를 올려다본다.
그제야 자신이 너무 그림에 집중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는 깜짝 놀란 남자가 허둥대더니 뭔가를 말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남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한국어가 아니라 일본어였다.
그 순간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그가 말을 돌린다.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일본어로.”
‘죄송합니다. 그림이 너무 대단해서.’라고 떠든 것쯤은 알아들었다.
그런데 상대가 일본어를 써서인지 순간 오타쿠가 아닐까싶기도 했다. 그만큼 요란한 반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너무 빤히 본 탓일까, 계속 당황스런 표정을 짓던 그가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카드 한 장을 꺼내 내민다.
명함인가?
“아, 전 이런 사람입니다.”
그러더니 다시 아차하며 다시 말한다.
카드에 적힌 것이 일본글자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모양이다.
“아, 죄송합니다. 여기에 쓰여 있는 건······.”
“미라이칸 산하에 있는 주간소년 토부, 편집부의 아카기 지로 씨?”
순간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그것도 1983년에 일본 만화출판사의 편집자를 딱 만나게 될 확률은 어느 정도 될까? 최소한 로또보다는 확률이 낮을 것 같다.
하지만, 난 지금 그 하얀 고양이를 의심하고 있다.
굳이 많고 많은 외식거리 중 굳이 햄버거를 경희가 골랐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보다는 굳이 여기 광화문 근처까지 일부러 찾아왔다는 거다.
택시를 탔을 때, 이곳에 햄버거 가게가 있는지도 모를 게 분명한 선희가 광화문을 떠들 때만 해도 좀 이상했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보면 방법은 알 수 없지만, 고양이 녀석이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의심된다.
고양이를 의심하는 있는 내가 비정상인 걸까?
아무튼 눈앞에 있는 일본인이 꽤나 놀라는 눈치다.
“아, 네. 그렇습니다. 일본 글자를 아시는군요.”
“조금요.”
그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이 자리 잠시만 동석해도 괜찮겠습니까?”
“네. 그러세요.”
그가 서둘러 내 옆자리를 앉았다. 그러고는 아직 이쪽에 시선도 주지 않고 계속 햄버거를 우물거리며 그림에 열중하는 선희를 보고는 곧바로 내게 묻는다.
“죄송한데 지금 그림을 그리시는 여자분, 혹시 학생이신가요?”
하지만 대답은 경희가 대신한다.
“맞아요. 곧 중학교 졸업하는데.”
그 말에 지로라는 일본인이 경희 쪽을 돌아본다.
그는 금방 쌍둥이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얼굴이······.”
“쌍둥이에요.”
“아, 그러시군요.”
일본인 남자가 웃더니 곧바로 다시 말을 이었다.
“혹시 그 쪽은······.”
“얜 선희에요. 이선희”
경희가 선희 대신 대답했다.
“아, 네. 선희 씨는 만화가를 꿈꾸시는 분이신가요?”
역시 선희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이건 확실히 우연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강제로 이어진 인연이다.
“맞습니다.”
내 대답에 그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선희의 그림을 보며 눈을 빛냈다.
“혹시 그림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다른 그림도 좋고.”
아, 젠장.
완성한 원고가 집에 있는데.
이렇게 중요한 때에.
그런데 갑자기 선희가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커다란 그림을 꺼낸다.
아까 본 그 완성 원고다.
“어? 이걸 언제 챙겼어?”
“모르겠어. 그냥 챙기고 싶었어.”
본인도 모르게 챙겼다고? 이것도 그 고양이 짓인가?
어쨌거나 원고를 가져왔다니 다행이다.
일본인 남자가 그것에 관심을 보인다.
“그거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러자 선희가 날 힐끔 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바로 그에게 원고를 내밀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원고를 받아 살피기 시작한다.
몇 장 되지 않는 그림이지만, 저쪽이 편집자라면 이 아이의 재능정도는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곧 내 예상대로 그의 표정이 점점 변해가고 있었다.
잠시 후 그림을 다시 돌려주며 그가 우리에게 말했다.
“혹시 일본 쪽에 관심은 없으신가요?”
순간 온몸에 소름이 짝 돈다.
선희의 그림 실력을 확인했을 때, 일본으로 갈 방법이 없을까 한동안 고민했었는데,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길이 생겨버렸으니까.
다만, 미라이칸이라는 출판사도 그렇지만, 토부라는 잡지는 그리 오래 회사가 지탱하지 못한 걸로 알고 있다.
한마디로 일본 소년만화 잡지 쪽에선 2류에서 3류 정도의 위치를 가진 회사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일본만화계로 데려다 줄 인연의 배 한척이면 충분하니까.
선희도 평상시와 다른 반짝이는 눈빛으로 날 바라본다.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관심은 있죠.”
“그럼, 이 원고를 저에게 주실 수 있습니까?”
“상관없어요.”
“그리고 또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네. 말씀해보세요.”
“휴가일정까지 최대한 사용하면 한국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일주일 정도 됩니다. 그때까지 단편 네임을 한편 완성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네임요?”
“아, 참. 네임이 뭐냐 하면······.”
“알고 있어요. 콘티 말씀하시는 거죠?”
“네. 맞습니다. 일본에선 그걸 네임이라 부르고 있구요. 그나저나, 대단하시네요. 생각보다 많은 걸 알고 계시는 군요.”
내가 덕후라는 사실을 또 말해봐야 입만 아프다.
“일주일동안 네임을 완성하면 그걸로 뭘 하실 생각입니까?”
“완성한 이 원고와 네임. 이 두 개로 출판사에서 제가 한번 밀어보겠습니다. 이정도 그림에다 네임만 괜찮다면 설득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나쁘지 않은 방법이다.
물론 일본으로 원고를 그냥 국제우편으로 보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하지만, 편집자가 직접 나서준다면 훨씬 가능성이 높은 건 사실이니까.
내가 지로에게 물었다.
“지금 지내는 곳이 어딥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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