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44화 (44/425)

뜻밖의 기회 (2)

강용철이 그리는 연재만화 신작 ‘오리온의 표범’과 ‘평발 스트라이커’ 새로운 스토리를 만드느라 박상식과 나는 정신이 없었다.

특히 평발 스트라이커의 경우엔 오리온의 표범과 달리 기본 열권이상의 스토리를 한꺼번에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작업시간이 많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야 머릿속에 떠올려 그것을 다른 작품에 빗대 이야기로 적당히 떠드는 것뿐이지만, 그것을 잘 정리해 적고, 다시 콘티까지 만들어야 하는 박상식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시간이 많이 걸리고 힘들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좀 쉬었다가 해. 몸 상하겠네.”

“괜찮아. 이 정도는. 그리고 너무 재밌어서 그만 두기 힘들어.”

“변태냐? 몸 좀 생각하며 일해.”

“젊은 때 열심히 굴러줘야지. 늙으면 이 짓도 못할 거 아냐.”

박상식의 말에 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데, 그때 밖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방문을 열고 누군가 우당탕 들어온다.

“오빠! 오빠!”

경희다.

“아이구 시끄러!”

“합격했어. 고입 선발고사.”

그 말에 내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 그래?”

뭐 그리 어렵지는 않을 거라고 했지만, 그래도 걱정은 하고 있었다.

엄마는 근처 절까지 가서 부처님께 빌고 왔을 정도였다.

경희가 팔짱을 끼며 으스댄다.

“아하하, 어때?”

“잘했네.”

“잘했지?”

그래도 나름 뿌듯한지 머리까지 추켜세우며 거드름을 피운다.

곁에서 콘티 작업 중이던 박상식도 박수를 치며 축하해준다.

“축하해.”

“고마워.”

“그런데, 선희는?”

“그냥, 합격 확인하고 돌아와서는 다락방에 들어갔어. 요즘 매일 같이 만화만 그리고 있는 모양이던데.”

얜 좀 기쁜 날엔 좀 기분 좋은 티도 좀 내면 될 텐데, 뭔 얼음여왕 엘사도 아니고, 이렇게 감정표현을 안하는지 원.

곧바로 나는 위층 집으로 올라갔다.

“왜?”

경희가 날 졸졸 따라오며 물었다.

“모처럼 기분좋은날인데 나가서 축하라도 해야 할 거 아냐.”

“오, 정말? 어디어디?”

“어디로 갈까?”

“햄버거! 햄버거!”

“야, 뭔 햄버거야? 제대로 된 식사를 해야지.”

“햄버거! 햄버거!”

무슨 햄버거 못 먹고 죽은 귀신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하기야, 경희입장에서는 자주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일 테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니까.

전에 햄버거가게에 갔을 땐 햄버거가 몸에 좋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놀라기도 했었지만.

어쨌건 그렇게 햄버거를 부르짖으니 다른 걸 먹자고 말하기도 뭐하네.

“그래, 알았다.”

하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더니, 경희가 양팔을 번쩍 들며 소리친다.

“대한독립 만세!”

“야, 오버하지 마! 그리고 갑자기 뭔 독립.”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뭐, 뭐야? 그게 뭔데?”

“아, 미안. 나도 모르게······. 헤헤.”

경희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어색하게 웃는다.

그나저나 방금 경희가 말한 건 뭐였지? 무슨 마법주문 같은 건가?

머리를 갸웃거리며 방으로 들어간다.

“얘, 선희야. 오빠가 말이야······.”

다락문을 열고 경희가 소리치자마자 곧바로 선희가 내려온다.

몰골이 어째 부스스하다.

“야, 이렇게 기분 좋은날은 좀 기분도 내고 그래. 히키코모리도 아니고, 왜 어두 칙칙한 곳에 처박혀 있어?”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다.

“히키코모리?”

“아, 뭐 그냥 방구석 폐인이냐고.”

그렇게 설명하는데 그때 선희가 내 앞에 뭔가를 척 내밀었다.

“어? 이게 뭐야?”

“한번 봐줘.”

“이거······, 만화 원고네?”

8절지 크기의 만화원고였다.

전에 강용철의 일을 도와줄 때 그에게 얻어왔던 원고용지인 모양이다.

“5일 동안 한 거야.”

“5일?”

표지부터 확인해보니 뭔가 예사롭지 않다.

제목은 직접 글자를 디자인 했는지 꽤나 멋있게 ‘달의 마천루’라고 적혀있다.

대사는 한마디도 없는 만화인데······, 그림의 퀄리티가 상당하다.

며칠간 아키라와 동몽의 영향을 받았던 탓인지, 그림의 디테일이 이시절의 한국만화 같지가 않다.

세세한 달 표면의 묘사라든가, 거대빌딩의 묘사가 놀라울 정도다.

냉정하게 그림의 디테일만 놓고 보면 내가 있던 시절의 일본만화가 부럽지 않을 정도다. 다만, 아직은 보고 경험한 만화가 적은 탓인지 연출부분이 아마추어 냄새가 난다.

사실, 이 시절에 나온 만화 중 내 눈까지 만족시킬 만화가 거의 없다는 걸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대사가 전혀 없는 12페이지짜리 만화.

나오는 캐릭터들의 외모는 괜찮은데, 별다른 대화도 없고, 묘사도 단면적이라 밍숭맹숭한 감은 있다. 그래도 17살이 갓 된 나이와, 초짜라는 것을 더해보면 얜 정말 난 녀석인 건 분명하다.

“어때?”

“······생각보다 대단해서 놀라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내 말에 선희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린다.

“왜?”

“······기분 좋아서.”

“그럼 제대로 표현을 해. 숨은 미소 찾기도 아니고.”

“······.”

선희의 원고를 보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온몸에 전율이 인다.

얜 진짜 타고난 만화천재다.

이런 아이가 왜 하필 이런 시대에 태어난 것일까.

이만한 능력이라면 일본에서도 충분히 통할 거다. 지금 일본은 한참 만화 붐을 타며 잡지연재만화 시장이 엄청나게 성장 중에 있다.

선희 정도의 센스에 조금만 더 공부한다면······, 그림만 놓고 보면 충분히 통할 것이다.

스토리부분도 나와 박상식이 돕는다면 일본잡지에서 주최하는 신인공모전에 합격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공모전에 당선되었다는 건 만화가의 첫 관문을 통과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후엔 연재를 위한 준비에 들어가고 그것을 담당 편집자들이 보조해 케어한다. 그러나 담당 편집자가 괜찮다고 판단해도 편집부회의를 통해 통과하지 않으면 다시 수정을 하거나, 혹은 갈아엎고 새로 다시 시작해야 한다.

문제는 이 과정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덕분에 신인공모전에 당선만 되고 사라지는 만화가가 숫자는 엄청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게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일 경우에 넘어야 할 과정이라는 것이다.

한국인이 이 시절 일본작가가 된다는 건 도대체 얼마나 더 큰 관문을 통과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압도적인 만화를 보여준다면 어떻게든 길이 열리기는 하겠지만, 선희의 현재 실력은 그 정도는 아니니까.

만약 지금이 2018년이었다면 그나마 한국이라는 페널티가 조금은 줄어들 테니, 조금 더 나은 환경일지는 모르지만 어쨌건 현재는 1984년.

하,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아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가 일본어를 좀 한다는 사실이다.

어릴 때부터 일본만화 덕질에 빠졌던 덕분에 일본어는 덤으로 익힌 탓이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알 수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사실, 얼마 전부터 나도 일본에 가려고 이런저런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직 여행자유화가 제대로 된 시절이 아니라 그런지 해외여행을 위해선 제법 까다롭다.

한 줄로 설명하면, 50세 이상, 관광예치금 200만원이다.

200만원이야 어떻게든 마련하면 된다고 해도, 50세는······.

결국 현재로서는 외국을 나가는 건 힘들어 보인다.

자세히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80년대에 여행자유화가 되었다고 하니, 몇 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혹시 그것도 나이라든가, 뭐 그런 제한이 있는 건 아니겠지?

그것까지 생각하니 어쩐지 그냥 한숨이 나온다.

“휴우.”

한숨을 짓는 내 모습이 이상한지 어느새 다락방까지 따라 올라온 경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왜 한숨을 쉬어?”

“아무것도 아니야.”

“햄버거는 언제 갈 거야?”

“넌 아까부터 계속 그것만 생각했냐?”

“응.”

배시시 웃으며 활기차게 머리를 끄덕인다.

이 녀석, 한 대 쥐어박을까.

냐아앙.

선희의 반대편에서 백설기가 머리를 빼꼼 내밀며 운다.

“어? 이 녀석도 있었네?”

“얘도 햄버거가 먹고 싶데.”

“뭔들 안 먹고 싶겠냐? 고양이 탈을 쓴 돼지인데.”

내 말에 백설기가 이빨을 드러낸다.

이 자식 내 말을 알아듣는 건가?

***

찰칵. 찰칵.

광화문 주변 사진은 벌써 필름 네 통이나 찍었다.

어제 서울에 도착해 사진만 벌써 스무 통이 넘게 찍었으니 이정도면 충분하다싶다.

이제 해야 할 일은 대충 마무리되었다.

남자는 카메라를 가방에 넣고는 입고 온 점퍼의 지퍼를 턱밑까지 바짝 끌어올린다.

“아우, 도쿄보다 훨씬 추워.”

남자의 입에서 나온 언어는 일본어였다.

이번에 그가 한국, 서울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일본인으로 이름은 아카기 지로, 중견 만화출판사 미라이칸의 주간소년 만화잡지 ‘주간소년 토부’의 직원이다.

입사한지는 2년이 조금 안된, 이제 겨우 신입이라는 딱지를 뗀 애송이 편집자다.

그는 얼마 전 인기작가인 ‘다케다 쇼타로’ 만화가 담당이 되었다.

소년지인 토부는 전체적으로 개그와 명랑이 주다. 덕분에 연재되는 대부분의 만화가 가벼운 편이다.

하지만 지로가 맡은 다케다 쇼타로는 다른 만화와 달리 청년취향의 액션만화를 주로 그리는 만화가다.

이번 신작도 리얼한 배경과 스릴 넘치는 액션을 주력으로 한 만화로 제목은 ‘슈퍼바이크’, 도로의 무법자들 이야기다.

그런데 앞으로 있을 에피소드에 등장할 한국의 서울 배경이 필요하다는 만화가 선생의 요구에 담당인 그가 직접 배경사진을 찍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슈퍼바이크를 탄 주인공이 서울 도심의 공도를 질주하는 장면을 위한 것인데, 사실 만화적 공상이 가미된 것이다. 하지만 그림만큼은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만화가다 보니 항상 자료조사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자신은 당연히 담당 편집자로서 만화가가 최대한 작품에 열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일이니, 이런 일은 당연하다. 물론 그런 것은 출판사의 입장이고, 솔직히 그는 지금 피곤에 절어 만사가 귀찮을 뿐이었다.

그가 한국에 올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 이유는 그저 한국어가 가능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사실 그의 어머니는 한국인이었고, 그 때문에 그가 한국어가 가능했을 뿐이다. 솔직히 한국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지만, 어쩌다보이 이렇게 한국까지 오게 된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께 늘 들었던 한국보다는 확실히 많이 발전했다는 건 사실이었다. 4년 후에 있을 88올림픽인지 간간이 올림픽 홍보용 오륜기나 마스코트인 호랑이 그림도 보인다.

아직은 일본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지기는 하지만, 그래도 예상보다는 도시의 규모가 크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아, 배고파.”

그러고 보니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나고 있었다.

근처를 돌아다녀 봐도 특별히 눈에 띄는 식당은 없다.

날도 쌀쌀하니 일본식 라멘이 당기지만, 한국에서 그런 곳을 찾기란 어려워 보인다.

결국 이리저리 헤매다 찾은 것이 패스트푸드, 햄버거 가게였다.

그나마 저거라도 있는 게 어디냐싶어서 서둘러 가게로 향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의자들이 빽빽하게 놓여있고, 그곳에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다.

앉아먹는 건 힘들 것 같다.

하는 수없이 대충 서서 끼니를 때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주문을 위해 안으로 들어가는 데, 문득 그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하얀색 고양이.

큰 도시 속 패스트푸드 가게 안에서 고양이가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저렇게 눈에 띄는 하얀색의 고양이라면 더욱 더.

그런 고양이가 테이블 아래에 앉아 뭔가를 먹고 있다.

신기한 일이라면 그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 말고는 누구도 고양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신도 모르게 고양이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고양이가 슬쩍 자신을 올려다본다.

멈칫.

기괴하다 여겨질 정도의 눈빛에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싸하다.

뭐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 샌가 고양이는 곧 인파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아······.”

자신도 모르게 한숨이 세어 나온다.

뭔가 모를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있던 테이블에 다시 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여자아이.

얼핏 봐서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는 왜소한 아이다. 그런데, 그런 여자아이가 테이블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열심히 노트에 뭔가를 그리고 있다.

‘만화인가?’

일본이나 한국이나 아이들이 만화를 좋아하는 건 똑같은 모양이다.

처음엔 그냥 호기심으로 힐끔 보며 지나치려고 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놀랍게도 노트에 그리고 있는 그림의 퀄리티는 낙서라고 보기엔 과한 수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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