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43화 (43/425)
  • 뜻밖의 기회 (1)

    박상식과 나는 연락을 받고 전상길의 화실, A팀 작업실로 향했다.

    “무슨 일이래?”

    “몰라, 빨리 오라는 연락만 받았을 뿐이라서.”

    “그 양반은 툭 하면 불러내면서, 무슨 요란을 떠는 건지.”

    내가 불만스럽게 말하자 박상식이 웃었다.

    “그러게.”

    잠시 후 화실 근처 정류장에서 내린 후 걸어가다 발길이 멈춰진다.

    “왜?”

    “어, 저거.”

    내가 머리를 까닥이며 가리키자 박상식이 내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허술해 보이는 극장, 그곳엔 커다란 극장 간판에 걸린 그림이 보인다.

    “우주전사 홍길동? 저게 왜?”

    “저거, 완전 반공고전만환데.”

    “고전?”

    아, 실수다.

    나도 모르게 오래전에 봤던 걸 떠올리고 말해버린 것이다.

    “고전 홍길동으로 만든 반공만화영화라고.”

    “아, 그래? 이번 방학에 개봉한 건가보네.”

    정확하겐 방학직전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 애니는 대표적인 반공애니중 하나로 ‘해돌이 대모험’과 ‘해저탐험대 마린X’를 만든 감독이 만든 작품으로 공산주의자들이 우주로 쫓겨나 우주에서 악당이 되어 그들과 싸운다는 다소 황당무계한 내용이다.

    나름 독창성도 많았던 만화지만, 그 시절 대부분 극장용 만화들이 그랬듯, 이 작품도 표절이 난무했었다.

    이티, 타이거 마스크, 야마토 승무원 복장 등등······.

    아무튼 이런 만화영화가 실시간으로 상영되는 모습을 보는 것도 묘하면서도 흥미롭다.

    “저런 애들 용 만화영화도 좋아하는구나.”

    그렇게 말한 박상식이 나를 툭툭 치며 서두른다.

    “빨리 가자.”

    “어. 알았어.”

    잠시 후, 화실에 들어가자마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쏠린다.

    또 뭐지?

    그때, 전상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우리에게 뛰다시피 하며 다가온다.

    아, 이 사람. 또 오바질인가.

    다가온 전상길이 내 예상대로 우리 앞에 서서는 크게 웃으며 소리쳤다.

    “하하하, 터졌다. 터졌어.”

    “네?”

    박상식이 되물었지만 대답대신 계속 웃기만 한다.

    그리고는 다시 말했다.

    “이번 평발 스트라이커 말이야. 인기가 터졌다고. 출판사에서 아침에 연락이 왔는데. 인기가 엄청나다고 하더라. 대본소 중에서 몇 곳은 두질, 세질 씩 넣고 싶다는 연락이 온다고 하더라.”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증쇄보다는 어떡하든 적게 찍어 많이 남기려 하는 게 대본소 출판사들이 특징이다.

    일반 출판 책이라면 모를까, 아직 대본소 만화계엔 인지의 개념도 없었고, 그냥 어떻게든 적게 찍어서 많이 남기려는 수법만 횡횡할 뿐이었다.

    그래서 적게 찍은 책으로 지역별로 돌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래도 대박이 나면 좀 더 많은 돈을 주는 건 사실이다. 어쨌건 대부분의 돈은 출판사들이 먹는 게 현실이지만.

    어쨌든 전상길의 경우엔 경영의 왕도 적지 않은 반응이 있었는데, 이번엔 그것보다 더 큰 반응이 있었던 모양인지 유별나게 요란하게 반응한다.

    이렇게 징그럽게 우리 둘을 한꺼번에 껴안는 짓까지 하는 걸 보면.

    아, 이런 건 싫은데.

    “너희들이 해낼 줄 알았다니까.”

    전상길이 웃으며 우리를 더욱 세게 껴안자 박상식도 어색하게 웃는다.

    나도 뭐, 어쩔 수 없이 그러고 있다.

    그런데 전에 스토리작가가 있던 자리엔 새로운 사람이 앉아있다.

    단정하게 자른 머리에 곱상한 얼굴은 한 남자, 얼핏 보면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피부도 좋아서 얼굴이 더 빛나는 느낌이다.

    젊은 여자들이 딱 좋아할 그런 타입으로 보인다. 거기다 맵시 있는 청바지와 재킷도 잘 어울리고······.

    제길, 나도 어느 샌가 이 시대의 스타일에 젖어 버렸나보다 이젠 촌스럽다는 느낌도 안 드는걸 보면.

    아무튼 그는 구형(이 시절에는 아니겠지만)의 작은 헤드폰을 쓴 채 음악에 빠져 있는지 머리를 까닥거리고 있다.

    헤드폰이 연결된 곳에는 미니카세트 플레이어가 있다.

    아, 저게 그 유명한 워크맨이구나.

    일제라 당시 가격이 만만치 않았을 거라고 들었는데.

    아무튼 그는 새롭게 A팀 스토리작가가 된 모양이다.

    그런데 그가 우리를 보더니 빙그레 웃으면 손을 흔들어 보인다.

    뭐야 저놈은?

    넉살이 좋은 스타일인 모양이다. 처음 보는데도 저렇게 친한 척 하는 걸 보면.

    어쨌건 뭔가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을 가진 남자였다.

    그나저나 전상길의 요란한 행동 덕분에 A팀 화실 사람들의 시선이 몽땅 우리에게 쏠려있다.

    평소에도 우리를 별로 호의적인 시선으로 본 적이 없긴 했지만 오늘따라 더 그런 느낌이다. 개중에는 대놓고 노려보는 놈들도 끼어있을 정도니.

    하기야, 동료였던 스토리작가가 밀려나갔으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쳐냈다고 여기겠지.

    사실, 나도 이 사람들에게 그리 환영받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자자, 일단 두 사람 다 앉아.”

    아무튼 여러 시선을 느끼며 전상길에 의해 중앙에 있는 소파에 강제로 앉혀졌다.

    “자자, 양군아 가서 커피라도 좀 내와 봐.”

    그 말에 직원 하나가 안쪽에 있는 부엌으로 들어간다.

    계속 싱글거리던 전상길이 커피가 나오자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처음 스토리를 받았을 때도 재밌기는 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반응이 좋을지는 몰랐다. 출판사에서도 시리즈를 잘 이어가면 농담 조금 보태서 ‘지옥의 외인구단’ 만큼 인기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더라.”

    아무리 농담이라도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지옥의 외인구단은 한국만화계의 전설과도 같은 작품인데.

    뭐, 그렇다고 해도 기분이 좋은 건 사실이다.

    옆에 앉아있는 박상식은 지옥의 외인구단이라는 말에 입이 귀밑까지 찢어진다.

    나도 사실, 이렇게까지 반응이 좋을 거라고는 생각 못했으니까.

    “자, 이거.”

    우리에게 봉투를 내민다. 각자 하나씩.

    “이번에 반응이 좋아서, 나름 성의껏 넣었다. 아직 출판사에서 추가 돈을 받은 건 아니지만, 일단 너희라도 먼저 받아 둬라. 혹시 생각보다 돈이 더 들어오면 추가로 더 줄 테니까, 너무 섭섭해 하지는 말고.”

    눈앞에서 돈 액수 확인하는 건 좀 그래서 그냥 슬그머니 봉투를 안쪽주머니에 넣었다.

    박상식은 아직 얼떨떨한지 봉투를 그저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다.

    이젠 큰돈에 익숙해졌을 법도 한데, 아직은 아닌가보다.

    최근 박상식은 많은 돈을 번 덕분에 얼마 전에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과 동생들이 살고 있는 집을 새롭게 리모델링한 모양이었다. 거기다 제법 큰 규모의 논밭도 사들이고, 동생들 셋의 학비도 해결했다고 한다.

    당연히 시골마을에선 박상식이 서울로 올라가서 크게 성공했다며 마을잔치까지 했다며 쑥스러워했었다.

    어쨌거나, 그 덕분에 요즘엔 정말 나를 무슨 큰 은인처럼 대하고 있다.

    “그리고 말인데······.”

    뭘 얘기하려는 지 알만하다.

    “계속 이야기를 부탁해도 될까?”

    이미 속편은 A팀에 넘긴 상태다. 그럼에도 그 이후의 작품까지 부탁한다고 한다.

    사실상 첫 이야기부터 저렇게 인기가 높으니 짧게 끝내기는 아쉬울 테지.

    만화가로서 이런 대박을 자주 얻을 수는 없을 테니까.

    아니, 평생 동안 한 작품도 못하는 작가가 대다수긴 하지만.

    봉투를 주머니에 챙기던 박상식이 날 돌아본다.

    나더러 결정하라는 뜻이다.

    솔직히, 속편에 가능성을 두고 항상 쓰는데다가 스포츠물이라면 언제라도 이어 쓸 수가 있다. 거기다 아직 중학생이 주인공인 이상 이야기의 길이를 정하는 건 내 마음에 달려 있을 정도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B팀의 경영의 왕까지 작업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전상길은 내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그래. 조금 여유를 두고 천천히 생각해보고 말해줘. 너무 부담가지지 말고. 뭐, 될 수 있으면 긍정적으로 생각해주고.”

    무조건 하라는 거지.

    뭐, 나도 굳이 안할 이유는 없다.

    인기작이라면 권당 받을 수 있는 돈도 커질 테니, 굳이 사양할 이유 따윈 없으니까.

    그때 우리 쪽을 계속 유심히 바라보던 새로 온 스토리작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약간은 흐느적거리는 걸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모습을 본 전상길이 ‘아무튼 저 녀석’이라고 중얼거리더니 우리를 보며 말했다.

    “아, 자네들 처음이지? 이 친구 이번에 우리랑 같이 일하게 된 A팀 스토리맨. 이대봉.”

    전상길이 소개하자 그가 주둥이를 툭 내밀며 콧등을 찌푸린다.

    “진짜, 이형. 왜 이래 정말. 제임스라니까. 제임스.”

    “아, 새끼. 제임스는 개뿔. 이대봉이 훨씬 멋지고, 남자다우면서 좋구만.”

    제임스도 이상하지만 이대봉이 멋진 이름은 아니지.

    뭔가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필사적으로 참는다.

    “됐고, 난 그냥 필명 쓸래.”

    “그래, 니 이름이니까, 니 마음대로 해라. 나 참.”

    그렇게 말하면서 우리를 보며 실소한다.

    “방금 들었지. 그런 이름이랜다.”

    “안녕하세요오. A팀 스토리맨 제임스이에요오.”

    느끼한 톤으로 뒷말을 끌며 던지는 인사가 좀 거북스럽지만 뭐, 그렇다고 티를 낼 수는 없다.

    나와 박상식이 머리를 꾸벅하며 인사를 했다.

    “이 놈, 또라이처럼 보여도 스토리는 진짜 잘 만들어. 이놈 데려오려고 진짜 고생했다니까.”

    “형, 사람을 앞에 두고 또라이라니! 그거 인격모독인거 몰라?”

    “몰라, 새꺄.”

    “형은 진짜, 그렇게 질 떨어지게 욕 하지 좀 말어.”

    “지랄.”

    묘하게 느끼한 투로 투정거리는 말이 이 사람의 특징인 모양이다. 그런데 실력 있는 스토리작가 중에 제임스라는 필명이 있었나?

    일단 내 기억에 존재하는 이름은 아니다.

    그래서 궁금함에 물었다.

    “하신 작품이 뭐죠?”

    “흐음, 그게 궁금하시구나.”

    “귀찮으시면 안하셔도······.”

    “악동시리즈요.”

    악동시리즈?

    설마 구호선 만화가의 악동시리즈 말인가?

    악동시리즈는 1982년부터 시작된 시리즈로, 당시 3권짜리로는 드물게 인기가 많아 꾸준히 시리즈가 만들어져온 작품이다. 그리고 1983년 지옥의 외인구단이 대박친 이후 장편이 대세가 되었을 때 10권짜리 시리즈로 만들어져 1985년까지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개그풍의 만화였다.

    그런데 그 만화의 스토리작가가 이 사람이었다니.

    사실, 1985년 이후로 악동시리즈가 갑자기 인기가 식어버려서 만화가 구호선은 잊혀져 버렸다. 세월이 지난 뒤, 2018년에 뒤늦게 이 작품이 조명되어 TV드라마로 만들어졌을 만큼 이야기적 센스는 상당히 뛰어났던 작품이다.

    아무튼 당시 대본소 탑7에 들어갈 정도로 인기 만화가였던 그가 이런 스토리작가를 곁에 두고 있었다니.

    가만, 그런데 그런 사람이 1984년이 되자마자 전상길에게 왔다고?

    아, 우리 때문에 A팀 스토리작가가 잘리면서 역사가 바뀌었구나.

    그런데 그때 이대봉, 아니 제임스가 날 보며 히죽 웃었다.

    “어, 나 누군지 아는 눈치네? 맞죠?”

    “아, 네. 알고 있습니다. 재작년에 나온 ‘라스베가스의 악동’이 악동시리즈 최초 작품이잖아요.”

    “오, 잘 알고 계시네. 만화 좋아하시나보다, 어쩐지 기분이 좋네요.”

    그러면서 웃는다.

    이 사람은 어째서 1985년 이후로 인기가 갑자기 떨어졌던 걸까?

    뭐 슬럼프가 과도했던 모양이지.

    “생각이 많으신 분이네.”

    “얌마, 넌 왜 윤환에게 그렇게 관심이 많냐?”

    “어째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네.”

    그렇게 말하며 묘한 표정으로 눈웃음친다.

    뭐지 이놈은?

    “이런 미친놈. 킥킥. 너 그러다 잡혀가 인마.”

    그렇게 말한 전상길은 뭐가 좋은지 한참을 웃더니 다시 날 바라본다.

    “저 녀석 원래 저래. 나쁜 뜻은 없으니까 너무 기분상해 하지 마.”

    “괜찮습니다.”

    이 시절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뭐 나한테 직접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야 별로 상관은 없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그가 이곳에서 어떤 취급을 받는지 알만하다.

    만화가 전상길이야 그를 스카우트한 인물이라 어떤지 모르겠지만, 대부분 그를 역하다는 표정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분위기에도 이대봉은 별로 개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저, 평발 스트라이커 읽고 놀랐어요. 감정묘사나 장면구성이 너무 디테일하고, 대사가 직관적이라 너무 재미있었거든요. 공부가 되었답니다.”

    “대봉이는······, 알았어, 인마 째려보기는. 제임스는 자네들 완전 팬이야. 솔직히, 이 친구를 이 화실로 데려올 수 있었던 결정적 원인이 ‘평발 스트라이커’니까.”

    “아, 그렇군요.”

    박상식이 감동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쨌건 그가 이곳으로 온 것은 결국 단순히 스토리 작가의 자리가 비어서 온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도록 해요. 우리.”

    제임스가 손을 뻗으며 말한다.

    저 손······, 잡을까 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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