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42화 (42/425)
  • 그 꿈, 내가 도와줄게 (4)

    “윤환아.”

    강용철이 부른다.

    “왜?”

    “연재 시작하면······, 스토리 조금만 도와줄 수 없을까?”

    아무래도 스토리에 대한 걱정 때문인지 내게 조심스럽게 묻는다.

    당연하겠지.

    지금 자신의 스토리 실력으로 출판사나 독자의 기대감을 채울 수는 없을 테니까.

    “뭐, 구술만이라면.”

    월간지니까 가끔 스토리를 같이 고민하고 떠드는 것 정도라면 괜찮다.

    “그 정도면 충분해. 콘티는 내가 직접 하면 되니까. 그리고 그림도 한 달에 겨우 20페이지정도니까, 혼자서도 충분하고. 물론 원고료에서 네 몫으로 20퍼센트 정도 줄게. 원래는 더 줘야 되는 거 아는데 좀 봐줘라.”

    “알았어. 아 참, 2차 판권에 대한······.”

    “알고 있어. 박상식에게 들었으니까. 계약서는 써 줄게.”

    “그럼 됐어.”

    “그나저나 나도 그 2차 판권이라는 걸로 돈을 벌 일이나 있을까?”

    “그야 모르는 일이지.”

    사실, 스토리 원고료는 원래 콘티까지 직접 하면 30퍼센트 정도가 적정선이다. 하지만, 난 콘티작업을 하지 않고 말로만 할 참이니 20퍼센트 정도라도 충분하다.

    사실, 얼마 되지도 않는 원고료에서 20퍼센트나 제하고 나면 얼마 남지도 않는다.

    그나마 월간지니까 그냥저냥 속도적인 여유는 좀 있겠지만, 그만큼 돈도 얼마 되지 않아서 생활비로도 빠듯할 게 뻔하다.

    그나마 코믹스라도 팔면 괜찮은데, 월간지연재로 책을 만들려면 한권 만드는데  최소 10개월 이상이 걸리니.

    아직 주간연재만화가 활성화되려면 최소 5년은 지나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내 입장에서 공짜로 해줄 수는 없는 일이고.

    “흐흐흑.”

    그렇다고 저렇게 감동하고 있는 인간에게 우울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

    *

    다음날.

    난 곧바로 이태원으로 갔다.

    한동안 찾던 책을 찾지 못한 덕분에 결국 이곳에 있는 외국서적 판매상을 통해 미리 부탁해 놓은 책이 있어서였다.

    허술한 외국서적전문 서점에 들렀다.

    “아, 어서 오세요. 말씀하신 책, 이거 맞죠?”

    “네. 맞네요.”

    책을 확인하는데 기분이 짜릿하다.

    이 시절 구하기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한국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는 책 보따리 상을 통해 운 좋게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추가 잔금을 지불하고 책을 받아왔다.

    주문 전에 선금을 지불했지만, 조금 더 달라니 어쩔 수 없었다. 이 시절이야 뭐, 이런 때니까. 그렇다고 내가 따로 가서 사올 수도 없는 일이니.

    아무튼 책을 구입하고는 이태원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다른 책을 찾아보며 돌아다니다 운 좋게 일본 주간만화잡지인 소년매거진도 몇 권 구했다.

    사실, 이 시절은 소년점프보다 소년매거진이 조금 더 잘나가던 시절이라서 그런지 소년점프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는 다시 강용철의 화실에 들렀다. 오늘 화실에 한번 들러달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집에 돌아올 때는 이미 날이 저물어 버렸다.

    “이제오니?”

    “응.”

    “밥은 아직 안 먹었지? 다 되가니까 조금만 기다려. 따뜻한 물도 있으니까 씻고.”

    “응.”

    연탄온수기 통에 물이 가득 데워져 있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니 TV 앞에 경희가 앉아있다. 그런데 경희 옆에 고양이가 뭔가를 열심히 먹고 있다.

    요즘엔 한동안 안보이더니 다시 온 모양이다.

    “선희는?”

    “다락방.”

    “아, 참. 이거.”

    내가 비닐주머니째로 내밀자 그것을 받아들고는 안을 확인한다.

    “와, 이거 인간시장이네?”

    “그거 읽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잖아.”

    “헤헤 고마워.”

    경희가 책을 꺼내고는 뭐가 좋은지 꽉 껴안고는 좋아라한다. 그러더니 곧 눈알을 굴리고는 내게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오빠, 그런데 이거, 언니한테는 비밀로 해줘.”

    “왜? 비싼 것도 아닌데.”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내용이 폭력적이네 뭐네 하면서 잔소리를 많이 하거든.”

    “그래. 알았다.”

    “고마워.”

    나도 인간시장을 읽지는 않았지만 대충 어떤 종류의 글인지는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회악을 처단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다보니. 이제 중학교를 졸업하게 될 여자애에게는 자극이 크다는 의미겠지.

    하지만 경희도 이제 고등학생이니 사리분별도 못할 만큼 어리지 않다. 거기다 인간시장 자체가 사회악에 맞서는 장총찬이라는 인물의 협객 이야기니까 문제될만한 것도 아니고.

    사실, 고등학생 정도 되면 세상 돌아가는 걸 알 필요도 있고.

    그에 비해 난 별로 그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만화밖에 모르는 바보였으니까.

    아무튼 그렇게 좋아하는 경희를 두고 다락방문을 퉁퉁 두드린 후 올라갔다.

    선희는 평소처럼 앉은뱅이책상에 앉아 뭔가에 열중해 있다.

    그러고 보니 잉크도 만화에 맞는 잉크로 바뀌어 있고, 펜촉도 만화가용은 아니지만 그럭저럭 쓸 만한 걸로 바꾼 모양이다.

    선희를 그런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하얀 편지봉투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그런데 아직 내가 올라온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했는지 여전히 그림에만 몰두해 있다.

    “선희야.”

    “······!”

    그제야 열심히 움직이던 손이 멈춘다.

    “자, 이거 받아.”

    편지봉투를 살랑살랑 흔들자 선희가 묘한 표정을 짓는다.

    “이게 뭐야?”

    “용철이 형, 출판사에서 돈 받았데. 너에게 전해주라더라.”

    “······고마워.”

    자신이 처음으로 번 돈이라 그럴까 봉투를 쥔 선희의 작은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아, 그리고 이것도.”

    내가 바닥에 둔 비닐봉투를 툭툭 치며 가리켰다.

    “운 좋게 구했다.”

    선희가 의아한 눈빛으로 비닐봉투 들어 안을 들여다보고는 곧 그것을 꺼낸다.

    크고 두툼한 만화책이 한권, 그리고 일반적인 만화책 한권이다.

    둘 다 일본 단행본 만화로 번역되지 않은 원서다.

    “이거, 오토모 카츠히로라고 일본 작가 만화인데. ‘아키라’랑 ‘동몽’이야. 네 그림을 보니까, 떠오른 만화야. 아마 네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따로 주문을 넣었는데, 그게 오늘 들어왔더라고. 뭐, 어쨌건 운이 좋았지.”

    내 설명을 들으며 책을 펼친 선희는 그대로 얼어붙어버린 듯 멈춰버렸다.

    제대로 충격을 받았는지 동공에 지진이 일고 있었다.

    하기야 그렇기도 하겠지.

    이 당시 영화적 연출에다 사실적인 묘사의 대가 오토모 카츠히로의 등장은 일본에서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으니까.

    소녀와 노인의 초능력 대결을 그린 동몽은 1980에서 1981년까지 연재한 만화 134페이지에서 100페이지가 추가되어 발행된 단권짜리 단행본으로 1983년 8월에 나온 신간이다.

    특히 이 만화에 등장하는 악당 초능력자 노인이 쓰고 있는 모자의 경우 나중에 나온 ‘닥터 슬럼프’의 아라레가 쓰고 있는 모자로 오마주 된 걸로 유명하다.

    후에 이 만화는 작가인 오토모가 허락하지 않아 다시 발행되지 않을 것이니 세월이 지나면 굉장히 귀한 만화책이 될 것이다.

    그리고 너무나 유명한 아키라의 경우는 1982년부터 1990년까지 연재한 만화다.

    지금은 1983년 말.

    아키라의 경우는 아직 일본에서 한참 연재가 진행 중일 때다.

    아키라는 이후 1988년에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고 그야말로 사이버펑크 애니의 전설이 된다. 이후 터미네이터2 ‘심판의 날’과 매트릭스에 영향을 준걸로도 유명하다.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오토모 카츠히로에게 영향을 준 프랑스의 만화가 뫼비우스의 작품도 부탁해봤지만, 판매상이 구하지를 못했다고 한다.

    하기야, 쉽게 구해질 만한 책이 아니긴 하지.

    어쨌건, 지금 동몽을 펼친 채 아무 말도 없는 선희를 보고 있으니 그 마음이 어떨지 알만하다. 이 순간 아마도 이제까지 보아왔던 만화들(물론 그림이라는 것에 한정해서)은 모두 쓰레기처럼 보일정도로 압도적인 그림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테지.

    낡은 아파트단지에서 벌어지는 초능력자들의 배틀물.

    건물이 무너지는 디테일한 그림에 리얼한 전투까지.

    아마도 선희는 인생의 가장 충격적인 순간을 지금 이 시간 경험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 다락방을 내려왔다.

    ***

    어느덧 12월이 끝나가고 1984년의 새해가 밝았다.

    이곳 나이로 22살이 되는 건가?

    그렇다고 해도 이전에 비해 아직 세 살이나 어리다.

    그래봐야 뭐 특별한 차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그건 그렇고, 드디어 우리 동네 만화방에 ‘평발 스트라이커’ 1부 10권이 들어왔다.

    하지만, 만화가의 네임벨류가 낮아선지 광고용 포스터는 붙어있지 않았다.

    이연세나 박용성, 혹은 고영석 정도의 이름 있는 만화가의 작품이었다면 나오자마자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떡하니 신작포스터를 붙여놓았을 것이다. 아니 그 정도보다 한 등급 아래라도 보통은 신작이 나오면 붙어있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시 전상길이라는 이름은 아직 대본소 업계에선 그냥 듣보잡 수준인 것이다. 물론 나 역시 80년대 만화도 그렇게나 많이 보았음에도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걸 보면 당연한 건가.

    근처엔 만화방에 두 곳이 있는데 둘 다 사정은 마찬가지다.

    안으로 들어가 반응을 살펴봐도 아직은 이렇다 할 분위기는 아니다.

    만화방을 나오며 박상식이 머리를 긁적이며 갸웃했다.

    “어? 반응이 별로 없나?”

    “아직은 모르지.”

    “그럴까?”

    그렇게 말하는 나도 조금 긴장되기는 했다.

    ***

    문이 덜컥 열리며 중, 고등학교 학생들이 만화방으로 우르르 들어온다.

    인근학교에서 방학기간동안 보충수업을 받던 아이들이다.

    “아줌마! 평발 있어요?”

    “아, 지금 저쪽에서 읽고 있는데.”

    “하나 밖에 없어요?”

    “세 질이나 들였어. 그런데도 지금 다 보고 있잖니. 잠시만 기다려봐,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볼 테니까.”

    “저부터 주세요. 제일 먼저 왔으니까.”

    “제가 조금 더 먼저 들어왔어요.”

    “아니거든.”

    그때 책을 읽고 있던 사람 한명이 버럭 한다.

    “아, 그 새끼들, 조용히 안 해?”

    “아유, 미안해요.”

    그렇게 말한 주인아줌마가 곧바로 아이들에게 주의를 준다.

    “너희들 조용히 안하면 쫓아낼 거다. 자자, 여기 번호표 있으니까 받고 기다려.”

    “······.”

    아이들에게 번호표를 나눠 준 뒤 곧바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쪽으로 간다.

    “앞 권은 다 읽었어요?”

    “그렇기는 한데······.”

    “뽀빠이 과자 하나 줄 테니까, 좀 봐줘요.”

    “알겠어요.”

    서둘러 책을 걷어간 만화방 주인아줌마가 곧바로 번호표를 확인하며 아이들에게 넘겨주며 돈을 받는다.

    얼마 전에 지옥의 외인구단 때도 책을 먼저 읽겠다고 난리법석을 떨던 독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아니 지금도 지옥의 외인구단은 인기가 있다.

    하지만, 그때는 대부분 청년 이상 층에 폭발적이었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책은 좀 달랐다.

    중학생 축구선수가 주인공이라 그런 것인지, 중고등학생, 아니 국민학생들에게도 엄청난 인기가 있었다.

    책이 입고되고 며칠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추가 주문을 넣었고, 운 좋게 오늘 두질을 더 받았다. 하지만, 세 질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인근에 있는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죄다 하교시간에 맞춰 찾아오니 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추가 주문을 넣어봤지만, 한동안은 어렵다는 말만 돌아왔다.

    이렇게나 인기가 있으니 좋긴 한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너희들 동작 그만! 책 놓고 조용히 따라 나온다. 한 놈이라도 튀면 나머지 놈들이 두 배로 고생하니까 알아서 해라.”

    갑자기 인근 학교에서 선생들이 들이닥친 것이다.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평발 스트라이크’ 열풍이 일고 나서 어린 학생들 손님이 늘어난 대신에 생긴 부작용 같은 거다.

    주인아줌마에게 선생 한명이 다가와서는 한마디 한다.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합니다.”

    “아, 아니에요.”

    자신의 아이가 다니는 학교의 선생은 아니지만, 지도부 선생들이 하는 행동을 말릴 수는 없다. 저 양반들이 대놓고 만화방에 대한 것을 걸고넘어지면 인근학교로 소문이 퍼질 테고, 극성스러운 부모들까지 또 나서서 만화책을 불태우며 만화방을 사회악이니 뭐니 하며 매도 질을 할 테니까.

    그런 거 몇 번 겪고 나면 장사 계속하기가 힘들다.

    선생들에게 끌려가는 아이들을 보며 그저 한숨만 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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