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41화 (41/425)
  • 그 꿈, 내가 도와줄게 (3)

    앞으로 선희를 어떻게 도와야할까.

    선희의 재능을 어떻게 해야 꽃피울 수 있을까.

    평발 스트라이커를 계속 구상하면서도 늘 머릿속에서 이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나만 믿으라고 큰소리를 쳐 두긴 했는데, 막상 뭔가를 하려니 쉽게 떠오르는 건 없다.

    재능이 있는 아이를 어떻게 훈련시켜야 할까.

    난 만화 덕후였고, 잠시나마 만화를 그려본 적이 있다고는 해도 만화가를 키운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거기다 지금은 1983년.

    만화가를 꿈꾸기엔 그다지 좋다고 할 수는 없는 시기다.

    그럼에도 선희는 만화가가 되고 싶어 한다.

    나야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애초에 만화밖에 모르던 놈이니까 이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시작한 것이고, 미래에서 왔다는 장점을 살려 꽤나 많은 돈을 벌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까놓고 이 시절의 만화가의 사정이 좋냐하면 그건 아니니까.

    물론 IMF 이후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미래보다는 조금 나을지 모르지만, 지금 이 시절도 이런저런 규제도 많고, 정부나 각종 단체들의 표적이 되고 있으니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때에 재능 있다고 무작정 시키자니 마음에 걸리는 게 많은 것도 사실이다.

    남도 아니고, 동생이니 신경 쓰이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슨 고민 있어?”

    평발 스트라이커의 콘티작업에 한창이던 박상식이 묻는다.

    “어, 선희.”

    “왜?”

    “재능 때문에.”

    “재능? ······아.”

    박상식이 내 근심의 이유를 알 것 같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인다.

    만화가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만화가의 밑에서 일하면 현실을 깨달은 그였으니, 쉽게 이 문제에 참견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선희는 학교 성적도 훌륭해서 만화보다는 더 나은 인생이 많다고 생각할 테니까. 하지만 선희가 직접 내게 부탁까지 한 마당이니 그냥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문밖이 요란하게 우당탕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오빠, 오빠!”

    방문 앞에서 경희가 소리친다.

    “괜찮아, 문 열어도 돼.”

    내 말에 곧장 방문이 열리고 경희의 머리가 불쑥 내밀어진다.

    “오빠, 봤어?”

    “뭐?”

    “서점에 보니까, 지금 소년경양 나왔던데.”

    “그래?”

    “아, 맞다. 오늘이랬지.”

    경희의 말에 그제야 생각이 났는지 박상식이 자신의 머리를 탁 친다.

    “책 사올까?”

    “아, 그래. 얼마지?”

    “천삼백 원.”

    창간호라 그런가, 싸네?

    아니지, 호떡이 세 개에 백 원 하는 시대인데.

    천 원짜리 지폐 두 장을 내밀자 잽싸게 낚아챈다.

    “오케이! 남는 돈은 심부름 값.”

    그렇게 말하고는 잽싸게 문을 닫고 나간다.

    “와, 저 녀석, 완전히 돈독 제대로 올랐네.”

    내가 어이없어하는데 박상식이 피식 웃는다.

    “뭐, 네 동생 아니겠냐.”

    “······.”

    그리고 잠시 후 하얀 반투명 비닐봉투에 넣어서 집안으로 들어온 경희가 서둘러 책을 꺼낸다.

    표지엔 당시 최고 절정의 인기를 달리던 가수 조용필의 사진이 보인다.

    “와, 조용필이다! 난 단발머리가 제일 좋던데.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 주던 그 소녀~.”

    표지를 보며 단발머리의 노래가사를 중얼거리는 경희를 보며 혀를 찼다.

    “야, 왜 조용필에 그만 정신 팔고 빨리 만화나 확인해.”

    “아 참, 내 정신 좀 봐.”

    헤헤거리며 웃던 경희가 서둘러 표지에 적힌 제목들을 찾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곧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제목이 안보여.”

    “이름 없는 신인이라서 표지엔 안 실었나보다.”

    내 말에 서둘러 책을 파라락 넘기기 시작한다.

    “앗, 찾았다!”

    며칠 전에 강용철의 집에서 작업한 만화 ‘오리온의 표범’이 보인다.

    표지그림에 ‘강철’이라고 쓰여 있다.

    참고로 강철은 강용철의 가명이다.

    종이는 질도 나쁘고 인쇄 빨은 그리 좋지 못하다. 뭐, 시대가 시대니까 당연한 거지만.

    아무튼 고생한 느낌에 비해 잘 표현되지는 못했지만, 이 시대 만화들과 비교하면 상위권인 것만은 분명하다.

    “아싸, 여기 내가 바꾼 대사야. 여기도, 여기도.”

    경희가 웃으며 즐거워한다.

    “야, 만화 대사 분석그만하고 빨리 넘겨.”

    “잠깐 있어봐. 며칠 동안 지겹게 본거면서 왜 그렇게 독촉해.”

    “너야말로 만화를 보면서 대사만 몇 번이나 확인하는 게 이상한거지.”

    “내 데뷔작이야. 신경 쓰는 게 당연하지.”

    “데뷔작?”

    황당해서 말이 안 나온다.

    대사 몇 개 고치더니 완전 자기작품이다.

    “나름 원고료 받고 쓴 데뷔작이잖아.”

    “원고료는 무슨.”

    “원고료지. 돈을 받고 글을 써줬으니, 상식이 오빠, 내 말이 틀려?”

    “맞네. 원고료.”

    “맞기는 뭐가 맞아.”

    어이가 없어서.

    아무튼 한참동안 자신이 참여한 대사부분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에야 우리에게 넘어온다.

    일단 다시 처음부터 차근차근 페이지를 넘기며 이야기를 읽어본다.

    그림도 괜찮고, 대사, 내용을 이렇게 며칠 만에 완성된 원고로 다시 보니 꽤 괜찮아 보인다. 아니, 이만하면 상당히 재밌다. 나름 여운도 생기고.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이거, 단편이라고 했었지?”

    “그렇지. 아무래도 땜빵 같은 거였으니까. 그래도 이만한 데뷔작을 남겼으니, 출발은 나쁘지 않아.”

    나쁘지 않은 게 아니라 이정도면 기성작가라 할지라도 충분히 훌륭하다. 거기다 이 시대답지 않은 세련된 대사로 인해 인상도 크게 남을 게 분명하다.

    “오빠들 이거 다 봤지?”

    “왜?”

    “선희 보여주려고.”

    “아. 그래.”

    경희가 만화잡지를 들고 후다닥 박상식의 방을 빠져나간다.

    “행동대장이야. 쟨.”

    “요란하긴 하지.”

    스토리 작업을 끝내고 집으로 올라왔더니 경희는 방 한쪽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다.

    “선희는?”

    “물어보나마나지.”

    여전히 다락에 콕 박혀 지내나보다.

    “오늘은 하루 종일 소년경양만 보던데.”

    “그래?”

    “어. ‘오리온의 표범’만 수백 번은 봤을 것 같아.”

    “본인이 그린 그림이 인쇄되어 나왔으니 신기하겠지.”

    “맞아. 나도 그거 엄청 신기하던데. 내가 쓴 명대사들을 보고 있으니 마음 뿌듯하더라고.”

    “명대사?”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그래. 혹시 명작으로 만들고 싶으면 이 몸을 불러줘. 성심껏 거들어줄게.”

    “명작? 용돈이 필요한 거겠지.”

    “크엄.”

    나는 곧바로 다락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아직도 선희는 오늘 사온 소년경양을 읽고 있다.

    아니, 정확하게는 자신이 그린 그림을 살피는 것 같다.

    “그렇게 신기해?”

    “······응.”

    머리를 들지도 않고 대답하는 모습을 보니 어째 마음이 복잡하다.

    저렇게나 좋아하는데.

    재능은 넘치도록 있는데.

    그런데 선희 곁에 놓인 그림들이 보인다.

    “······?”

    얼핏 보니, 오늘 온종일 방안에 앉아 그린 그림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펜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그러고 보니 책상엔 펜과 유리로 된 잉크병도 놓여있다.

    그걸 보고는 피식 웃었다.

    “펜이랑 잉크도 샀네?”

    “어.”

    “그런데 이거 아니야.”

    그 말에 만화에 고정되었던 머리를 들어올린다.

    “······아냐?”

    “그래. 이거 아니야. 이 잉크는 글쓰기용 잉크잖아. 이건 묽어서 못써. 그리고 이 펜도 앞에 이렇게 잉크를 고이게 만드는 플라스틱이 붙어 있잖아. 이대로 계속 쓰면 고인 잉크가 굳어서 안 돼.”

    “그럼 다른 거 사야해?”

    “뭐, 잉크는 어쩔 수 없이 다른 걸로 사야겠지만, 펜은 아쉬운 대로 이렇게······.”

    근처 가위를 집어 들어서는 펜촉 끝에 있는 플라스틱을 제거했다.

    “이렇게 떼어 내고 쓰면 되지. 그리고 전에 화실에서 봤지? 그때처럼 중간 중간에 물통에 넣고 씻어 낸 뒤에 휴지나 헝겊으로 닦으면 돼.”

    내 말에 머리를 끄덕거린다.

    그래도 펜선을 이미 경험한 탓인지, 선의 강약이 제법 노련하다.

    거기다 나름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 보려한 노력도 보인다.

    만화에 등장하는 많은 만화를 보며 나름 고민한 흔적도 그림구석구석 배어 있다.

    그런데 캐릭터들이나 전체적인 그림의 느낌이 조금 어두운 편이다.

    캐릭터의 눈 꼬리도 전체적으로 날카롭고, 그림에 그림자가 많이 사용되는 특징도 보인다.

    스크린톤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입체감을 주려니 이런 형태가 되었던 건지, 아니면 원래 이런 취향인지는 아직 알 수는 없다.

    어쨌거나 본인이 원하는 그림형태가 순정만화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겠다.

    그런데······, 전체적인 스타일이 어째······, 많이 보던 느낌인데.

    정확히 어떤 작가를 콕 집어 생각하기는 힘들지만, 어쨌건 한국만화의 느낌과는 좀 다르다. 굳이 따지자면 일본느낌이랑······, 서양식 만화의 느낌이 혼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흐음.

    선희의 스타일을 보니 뭔가 이것저것 떠오르는 게 있다.

    *

    며칠 후.

    “너 마침 잘 왔다.”

    아침에 박상식의 집에 들어갔더니 외출준비를 하는지 옷을 챙겨 입고 있다.

    “어디 가? 전 선생님 화실?”

    “아니. 거긴 엊그제 콘티 넘겨줬으니 갈일 없지.”

    “그럼?”

    “너, 안 바쁘면 나랑 용철이 형 화실에 좀 같이 가자.”

    “어, 왜? 무슨 일 있어?”

    “급하게 오라는 연락만 받았어. 나도 무슨 일인지는 잘 몰라.”

    그렇게 서둘러 강용철의 집엘 찾아갔더니 우리가 들어오자마자 어디서 준비했는지 색종이 조각들을 뿌리며 흥분으로 날뛰는 게 아닌가.

    “와아아아! 기적이 벌어졌다아!”

    “······?”

    “······?”

    나와 박상식은 혼자서 미친년처럼 날뛰는 강용철을 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큰일이 있다고 해서 정신없이 찾아왔더니 이 무슨 난리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혼자서 흥분해 날뛰던 강용철이 우리를 보며 큰소리로 말했다.

    “연재 확정!”

    “뭐?”

    “······?”

    단편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소년경양에서 연재가 확정됐다고! 이번에 보낸 단편 원고의 인기가 높아서 연재결정이 났데.”

    “정말이야?”

    박상식이 놀란 음성으로 묻자 강용철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독자엽서 인기투표 3위래. 독자들이 다음 편을 보고 싶다면서 난리란다. 그래서 출판사에서 정식으로 연재를 해달라는 요청을 해왔어.”

    박상식도 그렇지만 나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름 완성도가 높다고는 생각했어도 갑자기 연재가 결정될 정도일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사실 인기투표에서 3위라면 충분하기는 한데, 그래도 갑자기 빈자리가 생기지 않는 이상 그냥 연재가 결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래저래 운도 따라준 모양이다.

    그리고 이번 단편은 어느 정도 속편에 대한 여지는 남겨둔 상태라 연재는 충분히 가능하다.

    “이게 정말 꿈인지 생신지······.”

    강용철이 자신의 볼을 꼬집고 있다.

    저거, 너무 심하게 꼬집는 거 아닌가. 볼이 벌겋다 못해 검게 변해가고 있다.

    뭐, 그 마음이 이해가 되긴 한다.

    월간지 첫 단편 데뷔와 동시에 연재까지 결정되었으니 강용철로서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순간일 것이다.

    그동안 일거리 없이 혼자 방에 처박혀 그림에만 열중했고, 느린 속도 때문에 훌륭한 그림임에도 인정을 받지 못했으니까.

    지금 시기면 한참 만화잡지가 많이 생겨나는 시기다.

    덕분에 여러 종류의 월간어린이 잡지가 있어서 만화가들에게도 일거리가 이전에 비해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아직은 그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역시 아직은 대세가 대본소만화다.

    그러다보니 이 시절 만화가들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이 얼마나 빨리 만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월간지의 경우 한 달에 20페이지 안팎이라는 시간적 여유가 많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역시 책이 나오는 간격이 너무 길어서 흥미가 있는 내용임에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덕분에 인기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점은 한 달에 20페이지만 작업하니 나오는 돈도 뻔하다. 그 돈을 화실을 운영하기는 힘든 것이다.

    그나마 1권분 량을 넘기면 나오는 코믹스의 발행이지만, 월간연재로 코믹스를 발행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만만치 않게 걸린다.

    대략 1년에 1권정도.

    그러다보니 이것도 기대하기는 힘들다.

    결국 일반적인 만화가라면 혼자 작업하지 않는 이상은 서너 군데 이상 연재를 해야만 한다. 아니면 대본소만화를 그리거나.

    뭐, 그런 사실이야 어쨌건 만년백수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지금은 충분히 즐거워해도 되는 거니까. 만년고시생이 드디어 9급 공무원에 합격했을 때의 그런 심정과 비슷할 것이다.

    물론 이 시절 공무원은 내가 있던 시절의 공무원처럼 처절하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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