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40화 (40/425)
  • 그 꿈, 내가 도와줄게 (2)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 어느새 버스가 강용철의 화실 근처까지 왔다.

    후다닥 버스에서 내리고는 곧 근처에 있던 분식집에 들어가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샀다.

    잠시 후 강용철의 집에 도착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먼저 부엌에서 그릇들과 수저들을 챙겨들고 방문을 열었다.

    드르륵.

    다시 암막커튼을 쳤는지 방안이 컴컴하다.

    조심조심 안으로 들어서서 살펴보니, 두 남자들은 얽힌 채로 한쪽구석에 잠들어 있는 게 보인다.

    커튼을 열어젖히고 나자 밝은 빛이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음, 그래도 어제 선희덕분에 방 꼴은 그럭저럭 봐줄만 하다.

    방 중앙에 있는 커다란 작업 테이블을 확인했다.

    대부분의 원고작업은 거의 끝나있다.

    아직 몇 페이지는 배경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았지만 오늘 중으로 대충 마무리 될 것 같다.

    “으음.”

    밝은 빛 덕분에 깼는지 강용철이 부스스한 몰골로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눈을 비비며 날 바라본다.

    “윤환이구나.”

    “생각보다 많이 했네?”

    “어. 새벽까지 상식이가 많이 도와줬거든.”

    아직 정신을 못 차리며 정신없이 잠들어 있는 박상식을 바라보며 피식 웃어 보인다.

    “그래도 화실경력이 제법 되는 녀석이라 배경 실력은 아직 살아있더라.”

    “상식이 형, 그 화실에선 돈도 못 받았다며.”

    “뭐, 그랬지. 난 그림속도가 너무 느려서 결국 화실에서 눈칫밥이나 먹었고. 결국 그것 때문에 스스로 나오게 된 거지만.”

    강용철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서글픈 소리 그만하시고, 이거나 좀 드셔.”

    “오, 안 그래도 자면서도 계속 배가 고팠는데.”

    “그럴 것 같더라니.”

    “그래도 네가 눈치는 빠르구나.”

    그렇게 말하더니 박상식을 흔들어 깨운다.

    “야, 상식아. 일어나라. 윤환이가 떡볶이랑 오뎅, 순대 사왔다.”

    “뭐, 먹을 거?”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바닥에서 박상식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길게 한번 하고는 곧바로 순대부터 집어먹기 시작했다.

    “얌마, 말도 없이 그냥 먹냐? 의리 없게. 같이 먹어.”

    “그런 거 몰라.”

    “이 양아치 같은 놈.”

    두 거지들이 간식거리를 정신없이 먹는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누구지?”

    강용철이 순대를 씹으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곧 문이 열리더니 선희와 경희가 방으로 들어온다.

    “어? 너희들 둘 다 무슨 일이야?”

    내가 놀란 음성으로 묻자 경희가 히죽거린다.

    “선희가 여기 오겠다고 하길래 나도 따라왔지. 안녕하세요. 아, 상식이오빠, 안녕.”

    박상식은 몇 번 봤다고 금세 친한 척을 하며 애교를 부린다.

    그런데 박상식이 머리를 긁적이며 실실 웃는 모습을 보니 그 애교가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어, 그래.”

    “와 네 말대로 똑같이 생겼네. 말 안하면 모르겠다.”

    강용철이 신기하다는 듯 웃으며 쌍둥이들을 번갈아 본다.

    그런데 경희가 내 쪽으로 다가오더니 옆구리를 쿡 찌르더니 조그마한 소리로 말한다.

    “오빠, 나한테 뭐 시킬 일 없어?”

    “시킬 일이라니, 네가 멋대로 찾아와 놓구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저기······, 선희, 용돈 줬다며.”

    어째, 들어오면서 애교 스킬을 시전 하는 폼이 수상쩍다고 했더니, 목적이 있었던 거군.

    곧 선희를 슬쩍 바라봤다.

    하지만 선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아직 작업 중이던 원고만을 들여다볼 뿐이다.

    “선희가 만 원짜리를 가지고 있더라고. 어디서 났냐고 추궁하니까, 오빠가 줬다며 다 불었어. 듣기론 심부름 값이라고.”

    아, 만 원짜리를 들킨 거로군.

    그래도 강용철에게 받을 돈까지 이야기 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만약 경희가 그 얘기까지 들으면 자기도 뭔가 하겠다고 날뛸게 분명하다.

    “어제, 여기 일 도와주고, 청소까지 해줘서 준거야.”

    “나도 청소 잘해.”

    퍽이나.

    “됐어. 청소 다 끝났어.”

    “우 씨.”

    경희의 볼이 크게 부풀어 오른다.

    “넌, 그냥 여기 있는 떡볶이나 먹어.”

    그 말에 경희는 쀼루퉁한 얼굴로 순대와 떡볶이, 어묵을 집어먹기 시작한다. 선희는 여전히 원고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때 경희도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노트를 바라본다.

    “이거 뭐야?”

    “콘티라고 만화그리기 전에 미리 작업하는 거야.”

    “아.”

    박상식의 설명이 고개를 끄덕인 경희가 노트를 펼쳐 읽기 시작한다.

    그리고 읽어가며 눈살을 살짝 찌푸린다.

    “왜 그래?”

    “이거 말이야. 이거.”

    경희가 원고에 있는 대사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말한다.

    “그게 왜?”

    “이 대사, 너무 이상해.”

    “이상하다고?”

    “후져. 촌스럽고.”

    그 말에 박상식과 강용철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경희가 엉뚱한 소리를 하는 것 같아서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조용히 떡볶이나 드시지, 뭔 말도 안 되는 참견이야?”

    “나 참, 봐봐 이 대사 너무 문어체잖아. 뭔가 연극대사처럼 뻣뻣하지 않아?”

    “연극대사?”

    사실,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읽어보니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고.

    “특히 여기가 우습잖아. 그리고 이 부분이랑 이 부분도.”

    콘티에 적힌 대사를 가리키며 히죽거린다.

    “그 정도면 괜찮지.”

    “괜찮기는, 이 부분도 그래. ‘놀라운 모습이다.’ 이게 뭐야? 너무 촌스럽잖아. 나라면 ‘놀랍고도 신비한 광경이야. 압도될 것 같군.’ 뭐 이런 식으로 좀 멋지게 하면 좀 좋아?”

    그 말에 박상식이 금방 반응한다.

    “오, 그거 괜찮은데?”

    “상식이 오빠도 그렇지?”

    “그럼, 네 생각을 한번 옆에다 연필로 한 번 적어볼래?”

    “후후후, 역시. 알았어. 맡겨두셔.”

    경희가 신난다는 듯 연필을 집어 들더니 콘티에 있는 대사들 옆에 새로운 대사를 써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작업이 끝나고 나자 곧바로 강용철과 박상식, 그리고 내가 돌아가며 대사를 확인했다. 사실상 대사의 내용은 그대로지만 경희의 손을 거치고 나니 좀 더 내용이 세련되어진 느낌이다.

    강용철도 경희가 고친 대사가 마음에 드는지 감탄한다.

    “확실히 느낌이 한결 괜찮네.”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경희가 날 가재미눈으로 바라본다.

    “어때? 이제 용돈 받을 만하지?”

    “에휴, 그래 알았다.”

    내가졌다는 시늉을 하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자 경희가 싱글거리며 파리처럼 두 손을 싹싹 비빈다.

    내가 지갑에서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밀자 경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물었다.

    “어? 뭐야? 선희는 만 원 줬다며?”

    “어. 그런데 왜?”

    “그런데는 무슨, 난 왜 천 원인데?”

    “대사 몇 개 고쳐놓고 무슨 오바야? 싫으면 관두던가.”

    내가 경희에게 줬던 돈을 도로 지갑에 넣으려하자 후다닥 돈을 채가고는 자신의 주머니에 푹 찔러 넣는다.

    “누가, 싫대? 이거면 회수권 10장 사고도 100원이 남는데.”

    그렇게 말하더니 찌푸리던 표정을 다시 풀고는 능글맞게 웃는다. 그리고는 팔을 걷어붙이며 소리친다.

    “혹시 다른 일도 있으면 시켜만 줘. 최선을 다해 일할 테니까!”

    “돈독이 올랐구나.”

    “이제 중학교도 졸업했다고, 앞으로 돈 나갈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게 뭔데?”

    “여고생이 되면 품위 유지비가 많이 든데.”

    어디서 헛소리를 듣고 온 건지 당당하게 말하는 경희를 어이없이 바라본다.

    어쨌거나, 이 녀석 앞에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바뀐 대사를 보며 대사센스에 솔직히 놀랐다.

    이 시절 만화들이 좀 묘하게 어색한 대사를 많이 쓰고 있었는데, 경희가 고친 대사는 오히려 내가 왔던 시대에 가까운 느낌이 들 정도로 리얼한 느낌이었으니까.

    콘티를 다시 확인해 보니, 경희가 고친 대사 덕분에 확실히 이야기에 생동감이 생긴다.

    선희야 그렇다 치더라도 경희는 정말 뜬금 능력자다 싶다.

    그리고 이왕지사 이렇게 온 거 쌍둥이들에게 뒤처리 일도 같이 맡겼다.

    강용철과 박상식이 남은 배경을 작업하고, 쌍둥이와 난 뒤처리를 맡았다.

    그런데 선희는 그사이 또 자선까지 익혀서 간단한 선은 직접 긋기도 한다.

    “와, 너 그렇게 하니까 여자만화가 같다. 역시 진짜 원고를 만지니까 분위기가 달라. 빵모자 하나 쓰면 딱 일 텐데.”

    “여자 만화가?”

    “어.”

    “······.”

    선희가 눈알을 데굴거리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순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안녕하세요. 여기 원고.”

    “어? 빨리 가져오셨네? 시간이 부족할 줄 알았더니.”

    월간소년경양 잡지 내 편집부.

    담당 편집자가 강용철이 내민 원고를 받으며 말했다.

    원고를 하기로 했던 만화가가 갑자기 펑크를 내는 바람에 시간이 빠듯해서 급하게 부랴부랴 연락을 한 신인 만화가다. 그런데 걱정과 달리 제시간에 원고를 가져왔으니 놀랐던 것이다.

    “친구들이 도와줘서 쉽게 마무리 지을 수 있었습니다.”

    “아. 그러시구나.”

    그렇게 말하며 봉투에 든 원고를 꺼내본다.

    그림을 펼쳐보니, 첫 장부터 퀄리티가 상당하다.

    소개시켜준 지인의 말대로 그림만큼은 인정해야 할 정도였다. 물론, 듣기론 속도가 문제라지만, 이렇게 시간을 맞춰 가져왔으니 이젠 신경 쓸 필요 없는 말이다.

    어차피 이번 단편이 마지막일 테니까.

    편집자가 건성으로 웃으며 머리를 끄덕인다.

    “원고는 잘 받았어요. 이제 돌아가셔도 됩니다.”

    “네. 알겠습니다.”

    강용철은 조금 아쉽다는 표정을 짓다 곧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이왕이면 원고를 한번 읽어 봐주길 바랐지만, 신인한테 그렇게 신경 쓰는 편집자는 없으니까.

    강용철이 편집실을 빠져나가자 그제야 편집자가 원고를 다시 살펴본다.

    확실히 다른 만화에 비해 그림이 뛰어나다는 건 한눈에도 알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듣기론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그림능력에 비해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이런 사람은 대체적으로 처음만 살짝 눈에 띄지 결국 사라져버리는 대표적인 케이스다.

    만화는 그림 이전에 이야기다.

    이야기가 부족하면 결국 도태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림이 이렇게 좋은데 아쉽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책상위에 다른 원고들이 들어있는 봉투위에 툭 던져둔다.

    ***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정말?”

    내 말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뭔가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했더니 이런 걸 생각하고 있었구나.

    물론 만화가를 해보고 싶다는 건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결심을 하고 그것도 평소답지 않게 내게 이런 말까지 하다니.

    나름 속으로 꽤나 고민했던 모양이다.

    안 그래도 이 문제를 좀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아서 나도 고민하고 있었으니 차라리 잘 된 일이다.

    “만화가가 정말 되고 싶어?”

    “응. 펜을 처음 사용했을 때······, 그때 결정했어.”

    강용철의 화실에서 결심을 했다는 건가.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하고 난 뒤에 하는 건 어떨까 싶은데.”

    “하고 싶어. 너무. 꿈도 꿔.”

    “무슨 꿈?”

    “만화를 그리는 꿈, 만화가가 되는 꿈.”

    얘, 정말 완전히 빠져버렸구나.

    “그리고, 이젠 내가 가족들을 돕고 싶어.”

    “뭐?”

    “이제까지 모두가 날 신경 쓴 거 알아.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평소엔 무표정하게 말도 없어서 감정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녀석 그동안 그런 것들을 항상 마음에 두고 있었나보다.

    “그런 거라면, 내가 있잖아. 가족에 대한 건 내게 맡기면 되지.”

    “오빠······, 돕고 싶어.”

    “날?”

    내 말에 선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이런 생각을 했다니, 어째 감동인데?

    “그러니까, 날 도와줘. 내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건지.”

    아, 젠장.

    선희가 저렇게까지 표정을 지으니까 할 말이 없다.

    이젠 친동생이라 마음이 강해선가, 마음이 약해진다.

    “알았어.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해 도와줄 테니, 넌 나를 믿고 따라와 주겠니?”

    그 말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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