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꿈, 내가 도와줄게 (1)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이젠 그만 가볼게.”
“어. 그래. 오늘 선희랑 네 덕 크게 봤다.”
선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강용철의 화실을 빠져나왔다.
원래라면 나와 박상식이 같이 하루 이틀정도 묵으며 작업을 도와줄 생각이었는데, 선희가 엄청난 작업 속도로 인물터치를 싹 해치운 덕분에 여유가 생긴 탓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남은 작업량이 작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가장 시간이 많이 걸리는 배경 작업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복잡한 우주선 내부구조의 배경이 많아 손이 많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우주 배경도 많아서 먹칠과 함께 머리빗이나 칫솔을 사용해 별을 표현하는 기교 따위를 번갈아 사용함으로서 시간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어쨌건 선희 덕분에 하루 정도의 시간을 더 벌수 있었으니 강용철의 부담도 많이 줄었을 것이다.
큰길을 향해 걸어가며 선희를 돌아본다.
선희는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처럼 보이지만 미세하게나마 만족한 듯한 느낌이다. 뭐, 가족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것이라고나 할까.
아, 그러고 보니 이제야 내가 진짜 가족이 되었다는 느낌인가.
아무튼 선희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인다.
그나저나 배가 고파온다.
작업에 정신을 빼고 있었던 덕분인지 먹는 것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집에 가서 밥을 먹어도 되겠지만 모처럼 인데 밖에서 먹고 들어갈까?
오늘 선희가 한 것도 많은데 제대로 사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선희가 움찔하며 걸음을 멈춘다.
“왜 그래?”
“······.”
선희는 대답도 없이 그저 한쪽을 바라보고 있다.
시선을 따라 가보니 이 시절엔 흔하지 않은 가게, 햄버거 가게가 보인다.
아, 전에 경희가 갈색머리 여자에게 햄버거를 받아와서 쌍둥이들이 맛있게 먹던 모습이 떠오른다.
아, 그래도 햄버거가 떠오른 모양이군.
그래, 이 정도는 먹어야지.
“햄버거 먹을래? 세트로 시켜줄까?”
“······.”
“두 개 먹을래? 세 개?”
“······.”
“괜찮다니까 그러네.”
“······.”
그런데 어째 별 말이 없다.
그래도 먹는 거라면 경희 못지않은 먹순인데.
이상하다는 생각에 다시 가게 쪽을 바라본다.
그런데 가게에서 방금 나온 것으로 보이는 한 무리의 가족이 보인다.
4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부부와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와 고등학생정도로 보이는 사내아이, 그렇게 네 명이다.
그들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하하호호하며 가게에서 햄버거가 담긴 종이봉투를 들고 나오다 우리와 눈이 마주쳤다.
아는 사이인가?
그런데 어째 저쪽 사람들 표정이 썩어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봉투를 들고 있는 여자아이는 봉투를 등 뒤로 숨기고 있다.
뭐야 저건.
“어, 윤환이구나. 그리고 누구지? 경희인가?”
중년의 사내가 우리를 보며 의외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같이 있는 가족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변해있다.
난 이들이 누군지 알 수 없어 그냥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데, 곁에 있는 중년여자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한다.
“어른을 봤으면 인사를 해야지. 작은아버지랑 작은어머니가 우습니?”
작은아버지와 작은어머니?
아, 그런 사이구나.
그렇다면 인사를 하는 게 당연하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하며 선희를 돌아봤지만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얘가 평소 얼음 같아도 인사는 하는 그럭저럭 하는 편인데.
그런데 어째 작은 아버지를 봤는데도 오히려 눈빛이 더 차가워진 것 같은데.
“아, 선희구나.”
“얘, 넌 인사할 줄도 몰라? 아무튼 쪼그마한 게 성격도 왜 저모양인지.”
작은어머니라는 사람의 말본새를 보니 별로 우리 집과는 사이가 안 좋은 모양인데.
거기다 대놓고 이렇게 사람 앞에서 저런 소리를 지껄일 정도면, 선희가 싫어하는 것도 어째 이해가 된다.
그때 마누라의 눈치를 보던 작은아버지라는 사람이 우리를 보며 물었다.
“그래, 요즘 집은 어떠니? 어머니는 건강하시고?”
“네.”
“다행이구나.”
그런데 작은어머니라는 여자는 그를 잡아끌며 투덜거린다.
“여보, 그냥 가요. 괜히 얽히지 말고, 돈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렇지만······.”
“그냥 가자니까.”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아버지라는 사람이 마누라에게 이끌려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어머니께 안부 전해주거라.”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사라진다.
멀어지는데 애들이 “거지들.” 이라고 지껄이는 소리도 들려온다.
중년 아줌마는 “쟤들한테 이제는 제발 아는 척 좀 하지 마.”라고 말하기도 한다.
뭐야 저것들은.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그리고 옆을 돌아보니 선희가 입을 앙다물고 아래로 뻗은 주먹이 부르르 떨리고 있다.
하긴, 친척인데 이렇게 무시를 당했으니 열 받을 만도 하겠지.
그들이 사라진 방향을 보며 내가 혀를 찼다.
“쯧쯧, 말이 심하네. 친척이라는 인간들이 이렇게 대놓고 무시하는 꼴이라니.”
그 말에 선희가 날 돌아보더니 한마디 툭 던졌다.
“친척 아니야.”
“작은 아버지잖아.”
“원수야.”
“원수?”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좀 싸가지가 없다는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원수라고 하기엔 좀 이상하다.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뭐 애가 하는 말이니까. 일종의 비유겠지.
원수처럼 밉다, 정도?
하기야, 평소 사이가 좋지 않은 친척들도 흔하니까.
어쨌거나, 모처럼 기분 좋은 날인데 엉뚱한 사람들 때문에 기분을 망칠 수는 없지.
“자자, 우리도 햄버거나 먹을까? 너 햄버거 좋아하지?”
그 말에 선희가 여전히 망할 가족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머리를 끄덕인다.
“그럼 들어가자. 먹고 싶은 만큼 사줄 테니까.”
“안보여.”
“뭐?”
“백설기, 안보여.”
“백설기?”
그러고 보니 방금까지 선희를 졸졸 잘 따라오던 백설기가 보이지 않는다.
“이 녀석 어디 갔지?”
“······.”
“기다려야 하냐?”
“아니, 알아서 찾아올 거야.”
“그럼. 햄버거나 먹으러 들어가자.”
아직 눈알을 데굴거리는 선희가 내 말에 못이기는 척 가게로 따라온다.
짜식, 귀엽기는.
***
“아까, 걔 눈빛 봤어? 쪼그만 게 눈빛이 왜 그렇게 살벌해?”
이찬용의 부인, 강선옥이 방금 보았던 남매를 떠올리며 짜증을 부린다. 평소에도 늘 마음에 들지 않는 집안이다. 특히나 저 두 남매는 더.
그녀의 딸과 아들이 그녀의 말에 동조하며 나선다.
“걔, 원래 말도 거의 안하는 멍청이 바보잖아. 그러니까 엄마가 참아. 응?”
“맞아. 그 집안 인간들은 예전부터 다 재수 없잖아. 특히 아까 그 형은 완전 깡패야, 깡패. 나도 엄청 맞았잖아.”
그 말에 강선옥의 인상을 확 일그러뜨린다.
“아니, 남자애가 여자애들에게 장난 칠 수도 있지, 그걸 가지고 그렇게 무식하게 패다니. 진짜 경우 없는 것들. 그때만 생각하면 지금도 열불 나서, 진짜. 암튼, 당신도 앞으로 쟤네들 불쌍하다고 집 찾아가고 그러지 마. 알겠어?”
강선옥의 말에 이찬용이 살짝 미간을 찌푸린다.
“그래도, 형에게 신세 진 게 있는데, 그러면 되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형이 동생 도와주는 건 당연한 거지,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그리고 이젠 죽고 없잖아. 그런데 당신이 죽은 형 가족까지 신경 쓸 이유가 뭐 있어.”
“당신은 진짜······, 형이 어려운 형편에 우리에게 큰돈을 줬잖아. 그 때문에 형네 식구가 어려워진 거고. 그런데 그걸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지. 그리고 그 덕분에 지금 우리가 자리를 잡은 거고.”
“그게 어째서 형 덕분이야. 우리가 가게를 잘 운영했으니까 이만큼 사는 거지. 그리고 당신도 형에게 할 만큼 했잖아. 명절에 선물도 몇 번 했고. 그런데 그 밉상들 어디 고마워나 하디?”
“······.”
“아무튼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 알겠어?”
“알았어.”
강선옥은 이찬용이 머리를 끄덕이자 그제야 찌푸리던 표정을 풀었다.
“아무튼, 호래자식들이라 그런지 싸가지가 없다니까. 도대체 뭐가 되려고 저러는지.”
“뭐가되긴 깡패, 술집여자나 되겠지.”
“얌마, 너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아버지는 괜히 나만 갖고 그래.”
“그래, 맞는 말 했네 뭐.”
그렇게 떠들며 걸어가는데 앞에 어둠속에 하얀 물체가 보인다.
“엄마, 저거 뭐야?”
“글쎄?”
그렇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보니 하얀 고양이다.
“뭐야? 고양이네. 그런데 저 눈빛 어째 기분 나쁘네.”
“맞아. 뭔가 기분 나쁜 고양이야.”
“저리 안 가! 훠이, 훠이.”
고교생인 아들이 버럭 소리쳤지만 고양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어쭈! 저게?”
그렇게 말하는데 갑자기 고양이가 서둘러 자리를 벗어난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이 그제야 피식 웃는다.
“까불고 있어.”
그런데 그때였다.
부르르르릉.
갑자기 커다란 트럭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근처를 지나갔다.
그런데 갑자기 휘청거린다.
덜컹.
밤이라 도로 한쪽 편에 깊게 패인 고인 흙탕물을 발견하지 못한 모양인지 그 위로 거칠게 지나쳐 간다.
촤아아아아.
순간 엄청난 양의 물이 그들 가족을 덮쳤다.
“끼아아악!”
“으악!”
“엄마야!”
“우왁!”
가족모두가 제각각의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곧 그들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어버렸다.
스스로를 보며 지금 일어난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모처럼의 외출이라고 잔뜩 신경 써서 입고 나온 옷들이 엉망이 된 것이다.
아니, 그보다 이 꼴로 집으로 돌아갈 일을 생각하니 눈앞이 막막해진다.
“이,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진짜!”
“아이 씨, 이 꼴이 이게 뭐야?!”
“아이잉, 어떡해에.”
“넌 좀 조용히 해!”
***
늦은 아침을 먹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더니 박상식의 방문이 잠겨있다.
아무래도 어제 강용철의 집에서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다.
어쨌거나 남은 작업량이 많았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지.
나는 곧장 길거리로 나섰다. 그리고는 곧장 버스를 타고 강용철의 집으로 가면서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에 잠겼다.
선희의 그 재능.
만화가로서의 재능을 완전히는 아니라도 어쨌건 기술적인 부분에선 충분한 가능성을 보았다. 그것도 엄청난 가능성을.
솔직히 그동안 선희의 놀라운 기억력이라든가, 만화에 대한 집념들을 보면서, 얘라면 만화가로서의 재능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오기는 했었다. 그래서 그것을 확인하는 것과 나름 소소하지만 경험이라도 해주고 싶다는 생각에 강용철의 화실에 데리고 갔었다.
그런데 믿기 어려울 정도의 재능을 확인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밤새 제대로 잠들지 못했었다.
이렇게나 재능 넘치는 아이가 가족이었다니.
그런데 한편으로는 의아한 점도 있었다.
이렇게나 재능 넘치는 아이라면 어쨌건 만화가로서 이름을 날렸어야 하는데, 내 기억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 있는 여류만화가 중 선희의 얼굴이나 이름은 없었으니까.
물론, 이름을 숨기고 활동했을 수도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선희의 재능이라면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을 테고, 그랬다면 의심 가는 작가는 있을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은 알지 못한다.
높은 확률로 선희가 만화가로서 활동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일까?
지금으로서 가장 가능성이 있는 건 가족 중 유일하게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인물, 바로 나라는 존재다.
아니 정확하게는 본체인 녀석이다.
대략적으로나마 양아치 같은 인간이었을 것이라 판단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런 오빠 덕분에 여동생이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그대로 묻혀버린 것일까?
뭔가 입맛이 씁쓸하다.
에이, 이 생각은 그냥 관두자.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일어나지 않을 미래의 일이니까.
그나저나 새로운 걱정이 앞선다.
선희가 생각이상의 재능을 보여준 건 좋은데, 그 때문에 또 다른 고민이 생긴 것이다.
선희는 이제 곧 중학교를 졸업하게 될 뿐인 여자아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린 여자애를 벌써 만화가로 키우는 것이 옳은 일일까?
되도록 더 많은 인생 경험을 쌓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이런 저런 생각들로 인해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나 참. 이런 걸로 고민하게 될 줄은 몰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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