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8화 (38/425)
  • 그냥 천재 (4)

    “그럼 해봐. 실수 같은 건 조금도 신경 쓰지 말고.”

    “형.”

    “해보고 싶다잖아. 거기다 재능도 있어 보이고.”

    그렇게 말하며 계속 원고를 선희에게 내민 채로 말했다.

    “자 해봐.”

    선희는 곧 그가 내민 원고를 받아들고는 데생이 되어 있는 그림을 잠시 동안 내려다본다.

    실제원고.

    바로 출판사로 들어가서는 만화잡지에 진짜로 찍혀 나오는 만화가의 원고다.

    평소 표정이 별로 없는 선희지만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리는 건 느낄 수 있었다.

    나름 긴장한 모양이다.

    뭐,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냥 아무생각 없이 바라보는 걸로 보일수도 있겠지만 나에겐 그 작은 차이가 보인다.

    결심했는지 선희는 자신이 쥐고 있던 펜을 들어 조심스럽게 잉크를 찍는다. 그리고는 곧 데생위에 펜선을 입혀가기 시작했다.

    슥슥

    강약, 강약.

    입체감을 주기 위한 선의 강약을 의식적으로 주며 연필 선을 따라 천천히 잉크 선을 입혀나간다. 그리고 우주복의 디테일은 앞전에 완성된 원고를 참고하며 꼼꼼하게 그려나간다.

    자신의 펜선도 의도적으로 완성된 원고와 비교하며 작업하고 있다. 갑자기 다른 펜선이 중간에 개입되면 이질감이 생긴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 모습을 데생을 하던 강용철이 힐끔거리다 피식 웃었다.

    박상식도 먹칠과 지우개질을 하며 작업 중인 선희를 슬쩍 바라본다. 여전히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일단 인물들 위주로 펜선을 입혀나가는 모습을 얼핏 보니 이상한 점이 있다.

    이상하게도 얼굴은 모두 비워둔 채로였다.

    “얼굴은 왜 빼고 그려?”

    얼핏 떠오른 것이 있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어봤다.

    그랬더니 펜선을 멈추지 않은 채로 대답한다.

    “조금만 달라도 이상해.”

    “뭐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니까.”

    그 말에 데생을 하던 강용철이 멈칫하더니 이쪽을 보며 감탄한다.

    “와, 그런 것도 알아?”

    사실 문하생이 많은 화실에 가면 펜선도 얼굴과 손 같은 것만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데생을 빼면 문하생 서열이 가장 높은 경우였다.

    그리고 규모가 작은 곳에선 데생맨이 얼굴 펜 터치만 따로 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 만큼 얼굴을 그리는 건 전문적인 영역에 속한다는 뜻이다.

    선희야 그런 세세한 이야기까지 알고 있을 리는 없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 사실 때문에 박상식이나 강용철도 놀라는 눈치다.

    그러나 정작 입을 열었던 선희는 빠르게 펜선만을 놀리고 있을 뿐 별다른 표정 없이 원고에만 열중해 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펜 놀림이 점점 노련해 진다.

    내가 선희에게 물었다.

    “그런데 진짜 펜 사용하는 거 처음 맞아?”

    “어.”

    내 질문 특유의 퉁명스러움으로 대답한다.

    “어째 나보다 잘하는 것 같은 느낌인데.”

    이번엔 박상식이 놀란 음성으로 중얼거린다.

    “이쯤 되면 천재가 맞네. 만화천재. 아니, 펜선을 잘하니까, 펜선희?”

    어이없는 개그에 모두의 시선이 몰리자 박상식이 시선을 피한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선희의 펜이 멈칫한다. 그리고 입에서 ‘아.’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세히 보니 손에 잉크가 묻어 원고에 약간의 지문이 생겨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박상식의 남극빙하 같은 썰렁한 개그에 집중력을 잃었던 모양이다.

    “쯧쯧, 다 큰 어른이 그딴 유치한 헛소리를.”

    “아, 미안해.”

    그런데 선희는 자신의 실수에 당황했는지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평소 실수가 없던 선희로서는 이런 사소한 실수로도 이런 과한 반응을 보인다.

    “그거, 괜찮아. 잠시만.”

    그렇게 말한 강용철이 자신의 책상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온다.

    “이걸 바닥에 깔고 펜선을 넣으면 돼.”

    그렇게 말하며 원고위에 깔고 펜선 작업하는 시늉을 보이고는 그것을 선희에게 내밀었다.

    “지문 남은 건 그냥 화이트 작업하면 되니까. 괜찮아.”

    원고 옆에 있던 수정액을 집어 들며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곧바로 선희가 작업 중이던 원고를 가져가 지문이 생긴 자리에 조심스럽게 수정액을 바른다. 그러자 얼룩졌던 부분이 가려지고 수정액을 바른 부위가 금방 마른다.

    “이건 유성이라서 금방 마르니까 그 위에 다시 펜선을 입힐 수 있어. 원고 마무리 작업엔 화이트물감으로 수정하면 되고.”

    강용철의 말에 선희가 살짝 한숨을 쉰다. 그래도 금방 수습이 되자 나름 안도한 모양이다.

    선희는 강용철이 내민 종이를 바닥에 깔고 다시 펜선작업에 열중했다.

    그런데 펜을 사용하면 할수록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다. 조그마한 손으로 꽉 쥔 펜이 종이위에서 빠르게 춤을 추고 있는 기분이다.

    그 엄청난 기교에 두 남자들도 하던 작업을 멈추고 계속 바라보고만 있다.

    곧 원고 한 장의 인물 펜선작업이 끝이 났다.

    선희가 완성된 원고를 내 쪽으로 슬쩍 밀었다.

    난 그것을 들어 확인했다.

    테두리 선과 배경을 제외하고 인물 펜 터치가 모두 끝났다는 건 확인되었다. 제법 많은 양의 인물이 등장하는 페이지임에도 생각보다 훨씬 깔끔하고 빠르게 완성이 된 것이다.

    “형이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

    나는 원고를 다시 강용철에게 내밀었다. 그래도 데생 당사자가 직접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할 테니까.

    그리고 원고를 확인한 강용철은 한참동안 펜선을 확인하더니, 커다랗게 변한 눈으로 선희와 날 번갈아 바라본다.

    “펜선의 느낌이······, 나랑 비슷한데?”

    “어디 봐.”

    곁에 있던 박상식이 머리를 삐죽 들이밀며 원고를 본다. 그리고는 머리를 끄덕인다.

    “그러고 보니, 느낌이 비슷하네. 자세히 비교 분석하지 않으면 형이 작업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데.”

    “상식이 형은 용철이 형 펜선느낌을 잘 알아?”

    “당연하지. 그동안 이 형을 알고 지낸지가 얼만데. 그리고 본인도 비슷하다고 인정하잖아.”

    “맞아. 선의 굵기도 비슷하고 펜에 힘이 들어가는 위치까지 유사해. 원래 이런 스타일인가?”

    그거야 알 수 없는 일이다.

    일부러 흉내를 낸 것인지, 아니면 원래 스타일인지.

    “이정도면 당장 인물 펜 터치 시작해도 되겠다. 펜선도 능숙해 보이고, 무엇보다 속도도 괜찮고. 아직 진짜 노련한 펜쟁이들에게는 못 미치지만 그거야 경험만 쌓이면 되는 거고.”

    확실히 애가 소질이 있었구나.

    그동안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을 뿐 그것을 확인할 길이 없었는데 경험을 시켜보니 그 재능이 바로 튀어나온다.

    이만하면 기본기는 내 생각 이상이다.

    조그마한 손으로 슥슥 그려가는 선희가 참 신통방통하다.

    “여기 거 다 그려도 돼?”

    선희가 나에게 묻자 난 곧바로 강용철을 돌아본다. 내가 주인도 아니니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강용철은 기다렸다는 듯 격하게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해주면 나야 고맙지. 그리고 원고료 받으면 작업비도 꼭 정산해서 줄게.”

    “얼마?”

    “구체적으로?”

    “응.”

    이젠 편해졌는데, 가볍게 대답하는 선희를 보며 내가 피식 웃어버렸다. 얜 정말 거침이 없다.

    그나저나 구체적이라니.

    아무튼 당황한 쪽은 역시 강용철이었다.

    “아, 뭐. 지금 내가 신인이라서 원고료가 작으니까, 페이지 당 2천 원 정도 줄게.”

    데생이 끝난다면 남은 건 총 12페이지.

    그렇다면 24,000원이다.

    선희의 입 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다. 그리고는 곧 머리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다음 데생 원고지를 집어 들고는 자신의 앞에 내려놓는다.

    어깨와 목을 몇 번 풀고, 두 손으로 깍지를 끼고는 앞으로 쭉 뻗는다.

    스트레칭으로 가볍게 몸을 풀고는 본격적으로 작업에 돌입했다.

    금액을 듣고 나더니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슥슥슥슥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펜선의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야, 돈 욕심 부리지 말고 신중하게 해라. 용철이 형 얼굴 퍼레진 거 안보여?”

    “······.”

    “조심, 조심.”

    그렇게 말하는 데도 얜 정말 거침이 없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 특별히 퀄리티가 떨어진다거나 하지는 않아 보인다.

    펜이 빠르게 종이 위를 종횡무진 누비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한 페이지가 완성이 되었다.

    “어? 벌써 끝났어.”

    “······.”

    두 인간이 선희를 보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능숙한 펜쟁이보다 못하다고 했던 박상식은 스스로 한 말이 무안한지 헛기침까지 한다.

    강용철이 다시 원고를 조심스럽게 확인한다.

    느닷없이 너무 빨라진 탓에 걱정스럽다는 표정도 보인다.

    그런데 그도 곧 표정이 풀어진다.

    “괜찮네. 이정도면.”

    “어디 봐.”

    원고를 확인한 박상식도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다시 선희를 본다.

    “타고났네, 타고났어.”

    이런 식이라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원고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리는 작업은 당연히 배경이다. 그럼에도 선희가 생각외의 전력이 되어주자 심적인 부담이 줄어든 것 또한 사실이다.

    덕분에 급해진 건 데생을 작업하는 강용철이었다.

    강용철의 데생 속도는 자신의 펜선에 비해 월등히 빠른 편이다. 그럼에도 선희가 작업해나가는 속도가 워낙 빠르다보니 따라잡히는 건 시간문제나 다름없다.

    그래서일까 강용철의 데생도 은연중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펜 터치의 엄청난 추격에 스스로를 다그치며 속도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걸 시너지 효과라고 하는 걸 테지.

    아무튼 박상식과 내가 뒤처리를 하면서 두 사람의 작업을 번갈아보는 것도 꽤나 흥미진진했다.

    쫓기는 자와 추격하는 자의 대결.

    마치, 스포츠를 보는 듯한 흥미로움에 어느 순간부터는 우리도 작업을 멈추고 두 사람의 작업에만 정신을 팔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결국 강용철이 선희에게 따라잡히고 말았다.

    “아, 이런.”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강용철이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선희를 보며 말한다.

    선희는 더 이상 작업할 것이 없다는 것에 아쉬워하는 얼굴이다.

    마지막 세 페이지의 데생을 남겨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다.

    “와, 엄청나다. 엄청나. 이거 무슨 자동차경기를 보는 것 같았어.”

    “난 죽는 줄 알았어.”

    “형, 그거 알아?”

    “뭐?”

    “형, 데생 속도가 평소보다 50프로정도는 더 빨랐다는 거.”

    “젠장, 말도마라. 선희의 작업속도에 쫓겨서 나도 모르게 집중했더니 기가 완전히 다 빠진 것 같다.”

    “무슨 조련사야?”

    그렇게 말한 박상식이 낄낄거린다. 그리고는 선희가 인물 펜 터치를 끝낸 원고를 들여다본다.

    “여기 테두리는 내가 그릴게.”

    박상식은 곧바로 책상위에 있던 삼각자를 가지고 왔다.

    삼각자엔 꼭짓점 부근에 십 원짜리 동전이 테이프로 붙어있다.

    잉크작업을 위해선 필요한 조치였다.

    그것을 가지고 익숙한 솜씨로 만화 속 네모 칸을 그려간다.

    “일정한 두께로 그려야 해. 그리고 이 형 만화는 위아래는 좀 넓게, 그리고 옆으로는 조금 좁게 띄워야 해.”

    역시 오랫동안 문하생을 한 경험 때문에 이런 간단한 작업은 굉장히 능숙하다.

    나도 만화에 대한 지식은 적지 않지만, 이런 작업 모습은 유튜브에서나 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라 하나하나가 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그런데 선희도 초롱초롱 반짝이는 눈으로 그것을 보고 있다. 그것을 느낀 박상식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선희를 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이거도 해보고 싶니?”

    이번에도 선희가 끄덕인다.

    곧바로 삼각자와 함께, 자신이 사용하던 펜을 넘긴다.

    “펜은 이걸로 하는 게 편할 거야. 테두리 전용으로 질을 들여 논 거니까, 그리고 삼각자는 네모 칸이 직각이 되게끔 하기위한 거니까 내가 하던 거 잘 기억하고 해봐. 혹시 이상하다 싶으면 원고를 들어서 빛에 뒤집어 보면 느낌이 올 거야.”

    “그건 알아.”

    “아, 그랬니?”

    박상식이 어색하게 웃으며 날 바라본다.

    나야 뭐 아는 게 없으니 어깨를 으쓱해 보일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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