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83 전생 만화왕-37화 (37/425)
  • 그냥 천재 (3)

    “······어, 그래.”

    선희의 눈이 초롱거리며 심하게 빛을 낸다. 평소라면 결코 볼 수 없는 그런 눈빛이다.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가방을 챙기기 시작한다.

    그런 선희를 보고는 나도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나 다락을 내려간다.

    나와 선희가 다락방에서 나오자 방에서 소설책을 보고 있던 경희가 눈을 반짝인다.

    “어디가?”

    얘도 왜 이렇게 부담스러운 눈빛을 보내는 거야.

    “아는 형 화실에 좀 다녀올 거야.”

    “선희랑?”

    “어. 화실일도 좀 돕고, 구경도 시켜 줄 겸.”

    내 대답에 벌떡 일어나더니 나에게 찰싹 달라붙는다.

    “나도 가면 안 돼? 나 심심한데.”

    “놀러가는 거 아니거든.”

    “나 그냥 꼼짝 않고 가만히 있을 테니까.”

    그 말에 부엌에 있던 엄마가 나선다.

    “넌 또 어딜 가려고? 조금 있다 시장에 갈 때 같이 가야지. 오늘 김장준비나 도와.”

    “그래. 넌 집에서 엄마 도와드려.”

    “칫.”

    주둥이를 삐죽 거렸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선희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큰 길로 나가 곧바로 택시를 잡아 잡았다.

    택시를 타려고 문을 여는데 언제 따라왔는지 고양이가 먼저 얼른 탄다.

    “어?”

    순간 택시운전사의 눈치를 봤다. 하지만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건지 가만히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하는 수 없이 서둘러 타자 고양이는 선희의 무릎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웅크린다.

    그러자 선희도 자연스럽게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내가 목적지를 이야기하자 택시가 바로 출발했다.

    그런데 갑자기 선희가 입을 열었다.

    “왜 택시?”

    탈 땐 별 반응이 없더니 타고나서야 무표정한 얼굴로 묻는다.

    “시간 아끼려고.”

    “택시비 비싼데.”

    “괜찮아. 이 정도는.”

    “안 괜찮은데. 비싼데.”

    혼자서 중얼거린다.

    이렇게 보고 있으니 어째 히키코모리의 느낌이 강하다는 느낌이다.

    그래도 동생이니까 오빠인 내가 이해를 해야 할 테지.

    그런데 다시 선희가 물었다.

    “나 뭐 도와야 해?”

    “그냥 뭐, 이것저것. 너 만화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그리고 도와주면 용돈 정도는 줄게.”

    “얼마?”

    “얼마 줄까?”

    “2,300원”

    “2,300원? 꽤나 구체적이네. 뭐 필요한 게 있어?”

    “백지연습장이랑, 볼펜, 그리고······.”

    “아, 그래. 알았다. 뭐, 필요한 게 있으면 사야지.”

    그렇게 말하며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면 되겠지?”

    그러자 큰 눈을 껌뻑이며 내가 내민 돈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리고 짧게 한마디 한다.

    “많아.”

    “그래?”

    나는 내밀었던 돈을 다시 지갑에 넣으려했다.

    그런데 선희의 재빠른 손이 내 팔목을 콱 붙잡는다.

    “······?”

    “······꺼냈으니까.”

    “그냥 달라고?”

    그 말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내 손에서 만 원짜리를 가져가더니 빠른 손놀림으로 가방 속에 있던 지갑을 꺼내 돈을 조심스럽게 넣는다.

    사실, 이 시절의 만원이면 엄청 큰돈이다. 하지만 일을 부리려고 한 이상 인건비는 제대로 줘야지.

    “뭘 해야 해?”

    “뭐, 만화원고 지우개질이나 먹칠 정도면 돼. 그 정도라면 할 수 있겠지?”

    내 말에 고민도 없이 머리를 끄덕인다.

    “······응.”

    “실제원고라고 긴장할 필요는 없어.”

    “어, 긴장 안 해.”

    “그, 그러냐?”

    괜히 나만 무안해지네.

    어느새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곧 박상식과 강용철이 화실이라고 불리는 낡아빠진 건물에 다다랐다.

    대문을 통과해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작업 중이던 두 사람이 우리를 보고 화들짝 놀란다.

    “어? 네 동생이잖아.”

    박상식이 선희를 보며 말했다. 그러자 선희가 말없이 머리를 살짝 숙인다.

    “아, 일 도와주려고 데려왔어.”

    “그렇구나.”

    “그런데 그 고양인 뭐야?”

    “선희가 키우는 고양이.”

    “백설기.”

    “아, 그래. 백설기.”

    “이름이 백설기? 어째 어울린다.”

    두 사람이 하얀 고양이가 선희 다리 곁에서 머물러 있자 신기하다는 듯 보며 웃었다.

    “야, 사람 저렇게 잘 따르는 고양이는 처음 본다.”

    “그러게.”

    강용철도 동감한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들어온 선희가 무표정한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러더니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응? 왜?”

    내가 묻자 작은 소리로 선희가 말했다.

    “더러워. 여기.”

    그 순간 방안 공기가 싸해진다.

    순식간에 갑분싸.

    어쨌거나 선희의 한마디에 강용철과 박상식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다.

    하긴, 거침없는 돌직구 성 발언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겠지.

    오히려 난 이 상황이 재미있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이정도면 괜찮지.”

    “돼지우리야.”

    그 말에 강용철이 충격을 받고는 휘청거린다.

    “형.”

    쓰러지려는 강용철을 박상식이 부축한다.

    “남자혼자 사는 곳인데,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 오늘은 네가 좀 참아.”

    “못 참아.”

    강용철이 다시 휘청거렸다.

    완전히 너덜너덜 해지고 있다.

    “못 참다니? 그럼 돌아갈래?”

    내 말에 선희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입을 연다.

    “그럼 돈은 돌려줘야해?”

    “돌려줘야지. 아무것도 안했으면 당연한 거지. 무노동 무임금. 몰라?”

    “······.”

    “뭐, 돌아가는 버스비 정도라면 주지.”

    “······.”

    선희가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는다. 아무래도 고민에 빠진 모양이다.

    하지만 얼굴만 봐서는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런 모습을 두 남자들도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박상식이 날 쿡 찌르며 작은 소리로 물었다.

    “돈이라니? 무슨 돈?”

    “아, 뭐 일을 시키려면 돈을 줘야지.”

    그 말에 강용철이 화들짝 놀란다.

    “돈이라면 내가 줘야지. 네가 왜?”

    “나중에 형에게 따로 받을 거야. 보아하니 지금은 빈털터리 같으니까.”

    이번에도 강용철이 주춤거린다.

    이제 카운터 한방이면 완전히 기절할 태세다.

    그런 상황에서도 날 보며 한마디 던진다.

    “누가 남매 아니랄까봐 직설적인 건 둘이 똑같구나.”

    “그래?”

    그런데 그때 선희가 고민을 끝냈는지 입을 열었다.

    “좋아, 하겠어.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뭘?”

    선희는 대답대신 먼저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손수건 하얀 손수건 한 장을 꺼내 반으로 접더니 그것으로 마스크를 만들었다.

    그리고는 방을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곧 방구석에서 뒹굴고 있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찾아 한쪽에 놓아두고는 그다음 반쯤 닫혀 있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짝짝짝.

    우리들을 주목시키려는지 박수를 몇 번 친다. 그리고는 양손을 허리에 턱 걸치며 우리들을 내려다본다.

    모두 얼떨떨한 표정으로 선희를 바라보더니 한마디 한다.

    “······바깥으로.”

    “모두 나가라고?”

    내 말에 선희가 머리를 끄덕인다.

    박상식과 강용철이 나와 선희의 눈치를 살핀다. 어떡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모습이다.

    “어서!”

    선희가 독촉하자 난 할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쉬고는 일어서서 바깥으로 나갔다. 그러자 남은 두 사람도 후다닥 바깥으로 나온다.

    강용철은 얼마나 정신이 없었는지 이 추운 날 맨발로 나와 버렸다.

    스스로도 황당한지 서둘러 들어가서는 다시 슬리퍼를 신고 나온다.

    어쨌거나 여전히 둘 다 얼떨떨한 표정이다.

    “우리 집인데, 쫓겨났네.”

    “윤환아, 어쩐지 네 동생 대단하다.”

    두 사람의 말에 나도 허탈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선희가 저런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 나도 처음 알았으니까.

    그렇게 세 남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당에 서 동안 집안에서는 제법 요란한 소리가 들려온다.

    청소를 하는 건지, 집을 부수는 건지.

    백설기도 바깥에 나와 햇볕이 잘 드는 자리에 앉아 앞발을 혀로 핥고 있다.

    그리고 한참 뒤.

    여전히 손수건마스크를 한 선희가 문을 열고 나오더니 옷을 툭툭 털고는 말한다.

    “끝났어.”

    선희의 말에 박상식이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들어가자마자 그의 감탄 섞인 음성이 들려온다.

    “와, 신세계다. 신세계.”

    뒤따라 들어간 강용철과 나 역시 그저 입을 떡 벌리고 방안을 둘러볼 수밖에 없었다.

    우중충했던 방안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아니, 아예 새로운 방으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반들반들한 장판, 먼지가 뽀얗던 작업테이블마저 광이 날 정도로 깨끗해져 있다. 그러고 보니 방 천장의 구석구석에 있던 거미줄도 싹 치워져있다.

    그리 오래 걸린 것 같지도 않은데, 방이 완전히 새롭게 탈바꿈되어 있으니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와아, 그렇게 지저분한 방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나도 놀랬어. 내 방 아닌 것 같아.”

    이쯤 되면 청소의 여신이 아닌가싶다.

    잠시 후 선희가 들어오더니 날 힐끔 쳐다본다.

    마치 눈빛이 ‘이 정도면 돈값 했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쨌건 방이 깔끔하게 변하자 그나마 작업에 효율이 생기는 기분이다.

    모두는 곧바로 다시 작업에 돌입했다.

    강용철은 고쳐진 콘티를 이용해 다시 데생에 들어갔고, 나와 박상식은 펜선 작업이 끝난 원고의 뒤처리에 매달렸다.

    처음엔 선희도 우리와 같이 먹칠을 하다가 펜선 작업이 밀리는 분위기가 되자 나를 보며 한마디 한다.

    “나, 펜선 해보고 싶은데.”

    “펜선?”

    선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강용철에게 시선을 돌리자 그가 미간을 찌푸린다.

    “펜선은 곤란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펜선 작업은 초짜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초짜는 아니야. 집에서 그린걸 보니 제법 잘하긴 했어. 물론 볼펜으로 한 거지만.”

    “볼펜과 잉크에 찍어 그리는 펜과는 감각이 완전히 달라.”

    그 말에 가만히 있던 선희가 불쑥 끼어들었다.

    “도전해 보고 싶어.”

    “······.”

    도전이라니, 이게 무슨 튜토리얼 모드도 아니고.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던 강용철이 곧 빈 종이를 가져온다. 그리고는 즉석으로 인물을 연필로 슥슥 그리더니 그것을 선희에게 내밀었다.

    “일단 여기에 펜선을 입혀봐.”

    그러자 선희가 펜을 들고 잉크에 조심스럽게 넣고 꺼낸다. 그런데 연필그림이 그려진 곳이 아닌 비어있는 곳에 슥슥 펜선을 그어본다.

    볼펜과 달리 날카로운 감각이라 적응하기가 쉽지 않은지 머리를 갸웃거린다.

    내가 보기에도 선이 상당이 떨리고 불안정하다.

    그렇겠지.

    이제까지 펜이란 걸 잡아본 적이 없을 테니.

    애초에 볼펜처럼 부드럽지도 않은 탓에 처음엔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도 예전에 펜으로 그렸던 적이 있었으니까. 물론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선의 강약과 그 특유의 날카로움을 이용해 그림을 더욱 입체감 있게 묘사하는 것도 가능해 지지만 그렇게 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아무튼 만화에 재능이 많다는 것 때문에 데려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당장 선희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아니다.

    어느새 선희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혀있다.

    본인의 생각만큼 펜선이 제대로 나오지 않으니 스스로 당황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선희의 모습을 본 강용철이 피식 웃더니 곧 남은 데생에 열중한다. 어쨌건 후반 콘티가 달라졌으니 새롭게 데생을 해야 한다.

    그렇게 펜을 잡은 채 끙끙대고 있는 선희를 놔두고 우리는 작업에 몰입했다.

    어쨌건, 지금은 시간이 별로 없는 상태라 모두가 다 달라붙어야 하는 상황이다.

    그래도 모두 이렇게 도움을 준다면 어찌어찌 완성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모두 작업에 열중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선희의 펜선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이어 강용철이 그렸던 연필 데생위에 펜선을 입혀가기 시작했다.

    먹칠을 하던 내가 그 모습을 보고 멈칫하자, 곧 박상식도 나를 따라 선희의 펜선 움직임에 시선이 따라간다.

    박상식이 강용철을 툭 건드리자 그가 데생을 멈춘다.

    “······왜?”

    “저기.”

    “······?”

    강용철의 시선도 선희의 펜선으로 향한다.

    그리고 곧 눈이 커진다.

    내 눈에도 확실히 아까와 달리 펜선이 능숙해져 있다. 거기다 속도도 생각이상으로 빠르다.

    그 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강용철이 데생이 완성된 페이지 하나를 선희에게 내밀었다.

    “이거 한번 그려볼래?”

    “형, 이거 원고잖아. 실패하면 어쩌려고.”

    박상식이 말렸지만 강용철은 듣지도 않는다.

    “할 수 있겠니?”

    그의 질문에 선희가 별다른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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